작지만 선명한
[작지만 선명한] 기이한 설렘, 기이프레스의 책 | 예스24
작은 출판사의 책을 소개하는 큐레이션 시리즈 ‘작지만 선명한’. 먼 곳으로 떠날 수 있게 도와주는 기이한 이야기들, 기이프레스의 책을 소개합니다.
글: 최원호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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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프레스는 해외 문학을 소개하는 2인 출판사입니다. 말 그대로 기이해 보이는 이야기들을 소개하자는 다짐을 담아 시작한 곳이죠. 왜 기이한 게 좋냐면, 그게 더 설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설레려면, 경이로움을 느끼려면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어쩐지 정말 아름다운 것’을 만나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무언가를 알려 주기보다는 내가 배우고 익혀 놓았던 세상을 뒤틀어 버리는 이야기를 담은 ‘신나는 책’들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게 저희 꿈이었거든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만들자. 정말 신나는 일이죠.

 

기이프레스는 지금까지 단편 소설집 두 권을 냈으며, 앞으로 희곡과 회고록,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여러 논픽션 등 다양한 문학(적) 작품을 펴낼 예정입니다. 가능한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을 때, 지상의 그 어디보다도 멀리 가 보고 싶을 때 기이프레스의 책들을 떠올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의 국경을 넘어서 아주 먼 곳까지 안전히 모셔 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예수의 아들』

데니스 존슨 저/박아람 역 | 기이프레스(giyi press)


기이프레스의 첫 책을 정하는 건 쉬웠습니다. 저희 슬로건을 그대로 담은 듯한 책이 있었거든요. 데니스 존슨의 연작 단편집 『예수의 아들』은 설명할 수 없는(즉 기이한) 에너지로 들끓는 작품입니다. 뭐가 어떻게 돼 가는지, 스토리가 존재하기는 하는지 알아볼 수가 없는데, 그 위로 섬광처럼 아름다운 문장과 대사가 유성우처럼 떨어져 내리죠. 출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독자와 불쾌한 헛소리일 뿐이라는 독자들이 확 나뉘는데, 아마 기초적인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인 듯합니다. 아아,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대체로 어두운데 때로 불꽃처럼 아름다운 뭔가가 저 멀리서 번뜩이는, 그것이 인생일까요?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이 안에서 넘쳐나는 아름다움을,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피부로 흡수해 버리실 거예요. 정말 쓸쓸하고 짜릿한 경험이죠.

 

『조이 윌리엄스 단편선』

조이 윌리엄스 저/서민아 역 | 기이프레스(giyi press)

 

조이 윌리엄스 역시 이해를 넘어선 순간을 잘 포착하는 작가입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미국 단편 작가인 레이먼드 카버가 머무는 세계 바깥을 향하고 있다고 할까요. 카버는 인생의 아이러니와 거기서 피어난 신비로움을 아련한 하이라이트 안에 수납하지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옷을 아주 곱게 개 넣은 서랍을 볼 때처럼요. 윌리엄스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하이라이트를 등장시킵니다만, 그 순간은 아무것도 수납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찢어진 틈을 더 크게 벌려 놓습니다. 의표를 찌르는 대사도, 아름다운 묘사도, 일직선으로 흐르는 줄 알았던 시간도, 기억도, ‘나’라는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들도, 모두 그 찢어진 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 휘리릭,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만화경 같은 어둠은 마치 물리 법칙처럼 윌리엄스의 모든 작품 속에서 공평하게 작동하고 있지요. 『예수의 아들』이 마약 중독자들의 세계라는 먼 풍경 속에서 어두운 아름다움을 끌어냈다면, 『조이 윌리엄스 단편선』은 다행히 우리 바로 곁에서도 그 경이로운 혼란과 어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그렇게 이 책이 자연스럽게 저희 두 번째 책이 되었지요.

 


함께 읽는 다른 출판사의 책

 

『스캐너 다클리』

필립 K. 딕 저/조호근 역 | 폴라북스


어쩌다 보니 다시 마약에 관한 책 얘기를 하게 됐네요. 필립 K. 딕의 걸작 SF 가운데 하나죠. 주인공은 마약 단속을 위해 범죄자들 속으로 파고든 잠입 경찰인데, 문제는 너무 오래 마약 중독자들과 같이 지냈다는 겁니다. 첩자로 살아가며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정신은 마약 때문에 서서히 무너져 가고, 결국 편집증적인 압박이 그의 현실을 집어삼키기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기 시작했는데, 그 감시자는 누구일까? 이 감시를 붙인 곳은 마약 조직일까 아니면 경찰일까? 타인은커녕 자기 감각과 판단조차 믿지 못하게 된 주인공은 어떻게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요? 느끼는 일과 생각하는 일 모두 엉망진창이 돼 버렸는데, 그러니까 ‘나’라는 개념 자체가 부서지기 시작했는데, 왜 그는 포기하지 않을까요? 바보 같고 기이하고 숭고한 그의 의지와 슬픔은 정말 잊기 어렵습니다. 저는 결말을 읽고 실제로 울고 말았어요.

 

『고해정토』

이시무레 미치코 저/김경인 역 | 달팽이출판


이시무레 미치코의 『고해정토』는 미나마타병이 창궐한 마을 사람들의 삶을 담은 고발문학입니다. 글의 기세가 대단해요. 바다와 함께 평생을 살아오다 갑자기 저주와도 같은 질병을 접한 노인들은 풀이 굿이라도 하듯 삶을 털어놓는데, 그 토로 안에 신과 삶과 바다와 현대 이전의 흔적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병들어 죽은 이의 좋았던 시절을 언급하는 이들은 꼭 작은 전설을 말하는 듯하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같이 신령한 말들을 하는 게 가능할까요? 실제로 이 글을 처음 접한 편집자는 미치코가 특정 디테일을 지어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떻게 감히, 비극의 현장에 대해 쓰면서 지어낸 이야기를 집어넣을 수 있었을까요? 몇몇 사람들은 사실 미치코가 무녀일 거라고, 그녀가 조용히 미나마타의 바다를 돌아다니면서 그 목소리들을 들었던 게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미치코는 엄청나게 비참한 현실의 중심에는 형태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는 공백이 있음을 알아차렸는지도 몰라요. 그녀는 어둠을 객관적으로 기록해서 하나의 고정된 상(狀)을 만드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대신에 미나마타의 어둠에 맞서기 위해 그것만큼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던 것을, 즉 평생 가정주부로 살아오면서 봉인해 두었던 자신의 열망을 해방했지요. 그렇게 그녀는 문명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질병 앞에서 기꺼이 몽상을 펼쳤고 환상을 삽입했으며, 그렇게 수은에 중독된 바다에서 온갖 혼들을 건져냈습니다. 다른 누구도 듣지 못한 말들을 듣고 사실을 넘어선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어떤 도약이 필요하다는 기이한 사실을, 저는 이 책을 읽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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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정토

<이시무레 미치코> 저/<김경인> 역

출판사 | 달팽이출판

스캐너 다클리

<필립 K. 딕> 저/<조호근> 역

출판사 | 폴라북스

조이 윌리엄스 단편선

<조이 윌리엄스>

출판사 | 기이프레스(giyi press)

예수의 아들

<데니스 존슨> 저/<박아람> 역

출판사 | 기이프레스(giyi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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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호

출판 편집자. 풍월당 및 예하 임프린트인 ‘밤의책’을 거쳐 기이프레스와 을유문화사에서 일하고 있다. 기획한 책으로 암실문고 시리즈 전종 외에 『얼음 속을 걷다』, 『리스펙토르의 시간』,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투명한 힘』,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하얗고 검은 어둠 속에서』, 『고전적 양식』,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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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K. 딕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일생을 보냈다. 태어날 때 미숙아였고, 쌍둥이 누이는 갓난아이일 때 사망하였다. 불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안전강박증에 시달렸고, 마약에 중독되고 결혼과 이혼을 다섯 번이나 경험하는 등 불안한 삶을 살았다. 버클리 대학에서 잠시 공부하기도 했다. 1952년에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여 36편의 장편소설과 100편 이상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하지만 딕은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렸고, 죽기 몇 년 전에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1982년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블레이드 러너]로 영화화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결국 그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필립 K. 딕의 소설은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페이첵], [마이너리티 리포트], [임포스터], [컨트롤러] 등의 영화로 재탄생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은 영화 [토탈리콜]의 원작이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해서 영화, 드라마의 원작자로 이름을 올리는 등 필립 K. 딕은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대표적인 SF작가로 손꼽히고 있다. 필립 K. 딕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동시대의 SF들과는 차별화된 소재들을 다루었다. 암울한 미래상과 인간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며 끊임없이 인간성의 본질을 추구하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했다. 1962년에 『높은 성의 사내』로 휴고상을, 1974년에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로 존 W. 캠벨 기념상을 수상했다. 죽은 다음 해인 1983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필립 K. 딕상이 제정되었다. 이상은 현재 휴고상 및 네뷸러상과 함께 대표적인 SF 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The Three Stigmata of Palmer Eldritch (1965)』, 『Ubik (1969)』, 『A Scanner Darkly (1977)』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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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존슨

1949년 뮌헨에서 태어나 도쿄, 마닐라, 워싱턴 D.C.에서 자랐다.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멘토인 레이먼드 카버를 만났다. 스무 살이던 1969년 첫 시집 『물개 사이에 선 남자The Man Among the Seals』를 출간하며 데뷔했다. 1983년 첫 소설 『천사Angel』를 발표해 평단의 찬사를 받은 존슨은 1992년 소설집 『예수의 아들Jesus’ Son』을 출간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발돋움했다. 이 소설은 2006년 [뉴욕 타임스]가 ‘지난 25년간 최고의 책’ 중 하나로 선정했고,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6년 유망한 작가에게 주어지는 와이팅상을 수상했고, 구겐하임 기금의 수혜자로 선정되었다. 2007년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연기의 나무Tree of Smoke』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했고,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기차의 꿈』은 존슨이 2002년 [파리 리뷰]에 처음 발표한 소설로, 같은 해 아가 칸 상을, 이듬해 오헨리상을 받았다. 2011년 정식으로 출간되어 [뉴욕 타임스] ‘주목할 만한 책’으로 선정되었고, 2012년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그해 퓰리처상은 수상작을 선정하지 않았다). 2019년 리터러리 허브 선정 ‘지난 10년간 최고의 소설 Top 20’에 이름을 올렸다.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던 데니스 존슨은 2017년 5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