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컷
“클로짓은 단순한 옷장이 아니라 작은 강당 같은 곳이었다. 가장자리를 빙 둘러 스타일이 다른 온갖 구두가 벽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야말로 슬링백, 스틸레토 힐, 발레 플랫, 하이힐 부츠, 토오픈 샌들, 비즈 장식 샌들이 가득한, 최신 유행 디자이너들을 위한 윌리 웡카의 공장이나 다름없었다.” (- 로런 와이스버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중에서)
패션지 보기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패션과 뷰티 페이지를. 외래어 단어가 너무 많아서 조사만 한국어인 듯한 문장이 떠받치는 반짝이는 화보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구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 같은, 세상의 어려움에서 먼 곳에 존재하는 반짝이는 약속들. 피부 표현도 반짝, 액세서리도 반짝, 화보 페이지의 종이 역시 반짝였다. 그런 의미에서 화보만큼 광고가 볼거리였다. 화보도 대다수 광고였지만 어쨌든 그랬다.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오직 반짝인다는 이유로 곰곰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는 긴 시간에 걸쳐 반짝이던 것들이 그렇게 반짝이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었고, 일에도 고단함이 있었다. 돈을 버는 일을 할 때면 언제나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뚝딱거리는 기분 속에 살았다. 로런 와이스버거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처음 읽은 시기도 그런 뚝딱거리는 시기였다. 지금 있는 곳이 ‘내 자리’라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 믿는 척하는 건 쉬웠지만 나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하기는 어렵던 때, 이 불쾌한 이물감을 느끼는 잡지사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에 몰입하기란 얼마나 쉬웠던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로런 와이스버거의 소설이다. 2026년에 출간 20주년 전면 개정판이 출간되었으니 적잖은 시간이 흐른 셈이다. 이 책의 전면 개정판이 2026년에 출간된 이유는 전 세계 누적 판매 부수 1300만 부라는 사실보다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속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가 개봉 예정이라는 소식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당시 이슈가 된 데에는 작가의 이력이 한몫을 했다. 로런 와이스버거는 패션지 <보그>의 편집장 애나 윈터의 어시스턴트로 일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소설의 내용은 패션계에 관심도 없고 관련 지식도 거의 없이 잡지계에서 직업을 구하던 주인공 앤드리아가 패션지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되면서 경험하는 일을 다룬다. 전 세계 패션 트렌드를 이끄는 패션지 <런웨이>, 그 매체의 편집장으로 긴 시간 군림하며 패션쇼의 가장 앞자리에 언제나 초대받는 미란다 프리스틀리. “백만 명쯤 되는 여자들이 너무도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앤드리아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한다. 잡지사 에디터로 가는 길이 운 좋게 시작되었다는 막연한 낙관으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컷
누가 봐도 미란다 프리스틀리는 애나 윈터였다. 작가의 이력은 책 홍보의 가장 유혹적인 부분이었다. 패션지 보기를 좋아했으나 나 역시 애나 윈터가 누군지 몰랐다. 한국 패션지 편집장 이름도 모르는데 미국 패션지 편집장 이름을 알 리가 있나. 소설을 읽으며 찾아본 애나 윈터는 실제로 패션계에 군림하는 여왕벌 같은 인물이었다. 깔끔하게 손질된 금발의 보브컷, 실내에서도 절대 벗는 법이 없는 커다란 선글라스, 웃는 법을 배운 적 없는 것 같은 표정에 ‘대충 입는다’는 말은 취급하지 않는 게 분명한 완벽한 옷차림. 애나 윈터는 1985년부터는 영국판 <보그>의 편집장을 지내다 1998년부터 2025년까지 미국판 <보그> 편집장을 역임했는데,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미국에서 2003년에 출간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애나 윈터 전설의 초입에 이 작품이 나왔다고도 할 수 있겠다. 패션지는 종종 봤어도 패션계에 무지한 나 같은 이들을 위해 부연하면, 1998년 미국판 <보그> 편집장이 되면서 애나 윈터는 커버 사진 관행을 바꾸었는데(‘핵폭탄 윈터’라는 별명이 이때 생겼으며 당신은 이제 수많은 별명을 듣게 될 것이다) 편집장을 맡고 만든 첫 표지 모델은 19살이었던 미카엘라 베르쿠로, 5만 원짜리 청바지에 크리스티앙 라크루아의 1천만 원대 보석 장식 티셔츠를 입고 표지 사진을 찍었다. <보그> 표지 모델이 청바지를 착용한 최초의 사례였다.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사례인 것이다. 패션계의 콜럼버스. 2009년에는 애나 윈터가 2007년 <보그> 9월호를 만드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셉템버 이슈>도 선을 보였다.
애나 윈터는 그 자신의 룩을 정밀하게 조율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표정을 읽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감정 표현이 적고 곁을 주지 않는 성격이라고 알려져, ‘얼음 공주’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매일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테니스를 치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친 뒤 오전 7시 30분에 <보그> 사무실에 출근하는 생활을 이어갔으며, 베라 왕, 존 갈리아노, 마크 제이콥스를 비롯한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들을 패션계 최고의 디자이너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패션계의 교황’이니 ‘패션 대통령’이니 하는 호들갑스러운 별명은 애나 윈터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유명해도 패션계 바깥의 사람들에게 애나 윈터는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나오기 전까지는.
소설을 영화화하면 소설의 결정적인 장점들이 영화의 틀에 맞춰 깎여 나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항상 원작 소설의 손을 들어주곤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그 좋은 예다. 이 두 작품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호 의존적 관계에 놓여 있으며, 장점이 서로 다르다. 일단 소설은 ‘그’ 애나 윈터의 어시스턴트를 지낸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냥’ 까다로운 직장 상사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사연을 갖게 됐다. 설령 같은 내용을 다룬다 해도 그런 인물이 있다는 취재와 그 사람의 부하로 일을 했다는 경험은 같을 수 없다. 아무래도 후자 쪽은 ‘비하인드’를 털어주는 것 같은 내밀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소설에서 작가는 자캐인 앤드리아를 더 변호하고, 상사인 미란다 프리스틀리를 더 비호감으로 그린다. 놀랍지는 않다. 나 역시 한때 직장생활이 힘든 나머지 직장 상사를 등장인물로 하는 소설을 써보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일하는 매체가 미국판 <보그>가 아니었을 뿐이다. 로렌 와이스버거가 <보그>에서 일한 기간이 10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을 아는데 같은 회사에서 직속 부하로 10개월 정도 일하는 게 부족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쨌든 팔이 안으로 굽는 이 소설에서 독자는 명확하게 앤드리아의 ‘편’을 들게 된다. 이런 (약)점은 소설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한때 애나 윈터 밑에서 일했던 전 <하퍼스 바자> 편집장 케이트 베츠는 앤드리아가 왜 미란다 프리스틀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가 왜 안드레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 했고, <뉴욕 타임스>의 재닛 매슬린은 “가십 없이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어갈 능력이 작가에게 있는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심술궂은 폭로성 책”이라고 평했다. 문제의 가십이야말로 독자들이 읽고 싶어 했던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컷
영화는 여기서 더 매력적인 선택을 내리고 다른 길을 간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캐스팅이다.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은 미란다는 메릴 스트립이, 앤드리아는 앤 해서웨이가 연기하게 했다. 앤 해서웨이는 책을 좋아하는, 패션이나 뷰티에 큰 관심이 없는 ‘원석’ 같은 상태의 앤드리아가 패션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까지의 ‘변신’ 과정을 매력적으로 보여주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재미 중 하나는 앤 해서웨이의 옷차림이 점점 바뀌고, 그 결과 일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과정 그 자체다. 하지만 메릴 스트립이야말로 중요했다. 소설의 미란다가 잘나긴 했지만 잘난척해서 밉상인 윗사람처럼 다소 평면적인 악인의 인상을 주었다면, 영화의 미란다는 그야말로 피와 살이 있는 현실 속 성공한 여성의 초상 그 자체였다. 메릴 스트립의 미란다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고, 그 일을 세상 누구보다 잘하는 사람이었다. 영화의 미란다에게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동료라기보다는 ‘아랫사람’이라는 선명한 인식을 가지고 군림하는 사람 특유의 자신감이 있었고, 결정을 내리는 데 흔들림이 없었으며, 패션 산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자기 주관이 있었다. 앤드리아가 바랬던 ‘진지한’ 저널리즘의 측면에서 패션지가 하는 역할은 빛과 소금보다는 설탕 옷에 가까울지 몰라도(혈당수치를 주의하시오), 패션 산업과 그 산업을 움직이는 패션지의 역할은 세상 모두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별 차이 없는 것 같은 컬러를 두고 고민하는 패션지 사람들을 보며 풋 웃는 앤드리아에게 미란다가 일침을 놓는 대목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23분쯤 지나 나오는 이 장면에서 미란다는 특유의 오만하고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넌 자기가 입은 게 뭔지도 모르고 있어.”라고 말문을 연다.
“그건 그냥 블루가 아냐. 정확히 세룰린 블루야. 또 당연히 모르겠지만 2002년엔 드 라 렌타와 입생 로랑 모두 세룰린 컬렉션을 했지. 세룰린 블루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백화점에서 명품으로 사랑받다가 슬프게도 니가 애용하는 할인매장에서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수백만 불의 수익과 일자리를 창출했어. 근데 패션계가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그 스웨터를(여기서 메릴 스트립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 앤 해서웨이를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한다.) 니가 패션을 경멸하는 상징물로 선택하다니 그야말로 웃기지 않니?”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컷
소설에 없는 이 장면은 관객이 미란다가 하는 일을 약간이나마 이해하게 하는 동시에 앤드리아의 경솔함을 인지하게 한다. 앤드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진지한’ 저널리즘이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임시로 스쳐 지나는 패션지에서의 일을 낮잡아본다. 일을 낮잡아보니 일하는 사람들도 낮잡아본다. 그 자신도 회의에 참여하고 있으면서 진지하게 논의하는 사람들을 보고 코웃음 친다. 이런 동료와 함께 일한다고 생각해 보라. 자기는 사실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믿으며, 회의 안건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웃기다고 생각하고 방관하는 동료를. 이 장면에서부터, 별걸 다 가지고 까다롭게 군다고 생각했던 미란다가 가진 권위가 허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피어오른다. 메릴 스트립의 미란다는 소리 지르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다소 한심해하는 듯한 말투로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후반부에 이르러 지친 얼굴의 미란다 모습까지 보고 나면,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미란다의 모습에서 제법 멀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당신이 경력은 제법 쌓였지만 자기 자리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면 <악마를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의 에밀리에게 예상치 못한 동일시를 할 가능성도 높다. 살면서, 어떤 사람들은 주인공으로 태어난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니었고, 내 차례라고 생각한 순간에 기회는 사뿐히 날아올라 그 사람에게로 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는 것만도 못한 얼굴을 하고 뒤에 남는 사람이 바로 에밀리다. 영화는 에밀리의 괴로움을 동정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마음이 에밀리에게도 기울게 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컷
애나 윈터는 2025년 뉴요커 라디오 아워 팟캐스트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애나 윈터는 영화의 내용을 모르고 프라다를 입고 시사회에 갔다. “우선 메릴 스트립이었잖아요, 정말 환상적이었죠. 정말 즐거웠어요. 굉장히 재밌었고요. 미우치아(프라다)와 저는 그 영화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데, 미우치아는 이렇게 말했죠. ‘그 영화가 당신에게 정말 좋은 홍보가 됐잖아요.’” 소설과 영화가 나오고 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패션지를 포함한 잡지와 저널리즘, 출판은 큰 변화를 겪었다. 애나 윈터는 2025년 <보그> 편집장 자리를 떠났지만 전 세계 28개 보그 에디션의 편집 디렉터이자, 보그와 뉴요커를 모두 소유한 콩데 나스트의 최고 콘텐츠 책임자가 되었다. 여전히 새벽 4시 30분이나 5시에 일어나 온라인으로 모든 영국 신문들과 타임스를 읽고, 워싱턴 스퀘어 파크를 산책한 뒤 헬스장에 갔다가 러닝해 귀가한다. 그리고 출근, 하루가 시작된다. 이런 일상이라니, 정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출판사 | 문학동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팟캐스트 <리딩 케미스트리> 진행.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몇몇 영화들이 얼마나 소설인지 얼마나 영화인지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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