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연의 장면의 전환
[이자연 칼럼] 덧없이 짧은 것에 대한 예찬, <파반느> | 예스24
<파반느>는 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쩌다 우연히 같은 궤도에 올라 서있는 동안엔 가장 내밀한 것을 나누다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서야 할 땐 자연스레 (그러나 뼈 아프게) 이탈해 나가는.
글: 이자연
20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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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느린 삶에 관하여 

 

삶은 지루하리만치 길다. 미래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앞으로 몇 번의 월세를 더 내야 할까. 앞으로 몇 번의 연말정산과 대출 연장, 전셋집 이사를 반복해야 할까. 매일 같이 출근하고 다달이 월급을 받는 일이 얼마나 이어질까. 그리고 조금은 반항적인 질문도 하나. 이 잔잔한 생활 패턴에 변화가 생긴들, 그게 얼마나 역동적일까. 하루에도 진폭이 커졌다 작아지길 반복하던 청소년 시기와 달리 어른이 된다는 건 진공 상태에 가까운 반복을 견디는 일일지도 모른다. 중학생이 끝나면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이제는 무엇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진화를 마친 포켓몬은 사실상 잠재적 가능성이 종료되며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미정(고아성)이 그렇다. 그에게 삶은 소요와 같다. 시끄럽고, 번거롭고, 과도하게 질문하는. 어떠한 스펙터클도 기대되지 않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들 얼마나 좋을지도 잘 모르겠는. 장미꽃이 만발한 봄날에도 검은 스타킹을 챙겨 신는 그는 앞날에 어떠한 호기심도 작동하지 않은 채 무채색으로 살아간다. 심지어 그의 별명은 '공룡'. 공룡을 마주친 것처럼 사람을 한 번에 쫄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다나 뭐라나.  


넷플릭스 <파반느> 스틸컷

 

그런 미정에게 경록(문상민)이 나타났다. 자신과 비슷한 낯빛의 주인. 타인과 무리 없이 어울려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계선이 분명하고, 정확히는 세상살이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경록은 미정에게 다가가 자꾸만 질문을 건넨다. 미정은 그때마다 모기만한 목소리로 답한다.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 앞에서 이어진 첫 번째 대화. "파반느예요. 파반느는 왈츠처럼 춤을 출 때 쓰는 곡을 말하는 클래식 용어인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곡으로... 제가 좋아하는 곡이에요."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된다. 어쩌면 미정은 무채색이 아닐지 모른다.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피아노곡을 설명할 때 가장 마지막 정보로서 "내가 좋아하는 곡"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 세계가 없을 리 없다. 실제로 미정은 광고가 안 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좋아하고 래디시로 물김치를 만들어 먹길 좋아한다. 흰 쌀밥 보다는 현미밥, 영화는 <사랑은 비를 타고>, 롱스커트와 땋은 머리 등 좋아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이렇게 미정만의 '취향'이 드러나는 순간엔 언제나 그 반대편에 경록이 서 있다. 

 

여름 방학을 맞이한 어린 아이처럼 미정은 돌연 환상 세계로 진입하듯 소독차 연기에 휩싸인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클로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경록과 많은 것이 쌓이기 시작한 그의 출근길은 이제 어제 같지 않다. 그러나 진짜 현실, 즉 불규칙적으로 전등이 꺼지는 어두운 지하창고에 돌아왔을 때 ‘아라베스크’는 불현듯 사라지고 오직 백화점 소음만이 배경음을 채운다. 그 때 저 멀리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나 또 질문을 건넨다. "다쳤어요?" 안부를 물은 뒤 새끼 손가락만해질 때까지 긴 팔을 휘저으며 사라지는 경쾌한 경록을 보는 순간, 이윽고 다시 ‘아라베스크’가 이어진다. 경록은 미정에게 일종의 별세계(別世界)가 된 셈이다. 여전히 삶은 무료하고 지루하리만치 길지만 나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묻는 이와 우연히 눈맞춤을 이룰 때 전에 없던 의미가 생겨난다. 사실 그 의미란 것도 별 게 아니다. 악기 하나 연주하지 못해도 록 이야기에 흥분해 말을 쏟아내는 남자와 조용히 클래식을 즐겨 듣는 여자의 서로 다른 문화권이 기분 좋게 충돌하며 그 여파로 새로 융합된 순간이 생겨날 뿐이다. 다만 그 짧은 찰나 하나로 이제 미정은 멋있는 할머니가 되는, 전에 없던 미래를 꿈꾼다. 심지어 기대도 품는다. 

 

짧아도 너무 짧은 삶에 관하여 

 

삶은 덧없이 짧다. 막막한 현재를 바라보는 경록이 그렇다. 무용을 전공하고 싶지만 재능은 마뜩잖아 보이고, 아이슬란드의 낭만을 꿈꿔도 비용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어쩐지 청춘 낭비 같다. 거의 다 왔다고 믿었건만 여전히 도착하지 못한 오아시스 앞에서 하루가 또 저버린 사람처럼 허망하다. 미정이 무료함과 희망 없음(無望)과 싸운다면 경록은 불안과 조급증과 싸우는 인물이다. 누군가는 하루가 너무 길어서, 또 누군가는 하루가 너무 짧아서 종종걸음을 걷는다. 

 

<파반느>는 지금의 어린 세대를 잠식시킨 감정적 무게를 미정과 경록으로 대변하면서도 이 둘을 함부로 경쟁시키지 않는다. 불행 배틀을 이끌어내 무망감과 불안 사이의 우위를 가르기보다 미정의 뒷걸음질도, 경록의 앞서감도 이해하게 만든다. 동시에 함부로 낭만화하지도 않는다. 힘들기에 의미가 있다거나, 우리가 아직 어려서 불안한 거라는 속 빈 위로를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친구 요한(변요한)이 반복해 온 "청춘은 영원하다"는 말과 달리 금세 변하고 만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삶의 변주가 생기는 인물 경록은 예술 대학에 입학해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배움을 얻는다. 가장 가까웠던 요한과 미정이 백화점 지하층 생활을 전전하는 동안, 그는 자기만의 토양을 넓히기 바쁘다. 새 친구들과 있느라 요한의 전화를 무시하고, 하루 종일 미정을 기다리게 방치하면서. 게다가 그는 충동적으로 이전 백화점 동료 세라(이이담)과 하룻밤을 보내버리지 않았던가. 경록은 영화 속에서 마치 갈등의 근원이자 균열의 시작인 것처럼 보인다. 켄터키 호프집에서 보낸 친구들과의 다정한 시간이 마치 그 때문에 소독차 연기처럼 뿌옇게 사라진 것만 같다. 


넷플릭스 <파반느> 스틸컷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기 안에 간직된 귀소본능을 깨달은 남자는 뒤늦게 미정과 요한을 찾는다. 미로를 간신히 넘어 백화점 지하층으로 돌아온 남자에게 남은 것은 사라진 연인의 빈 자리 그리고 신체 기능이 마비된 친구. <파반느>는 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쩌다 우연히 같은 궤도에 올라서있는 동안엔 가장 내밀한 것을 나누다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서야 할 땐 자연스레 (그러나 뼈 아프게) 이탈해 나가는. 과거가 그립다는 이유로 뒤돌아 갈 수는 없다. 귀가하는 버스에 내려 미정을 향해 역주행한 경록이 결국 죽음을 맞이한 건 삶의 궤도를 탈선한 죄목에 처벌이었는지 모른다. 덧없고 허망해라.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 오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요한의 말마따나 모든 사랑은 오해다. 영원할 거라는 오해. 그러나 너무 많은 이해를 요구하기에 삶은 너무 짧다. 오해는 어쩌면 오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게 존재 목적인지도 모른다. 경록의 삶이 그랬고, 미정의 사랑이 그랬다. 요한의 능청스러움과 켄터키 호프집의 추억. 엄마의 사랑, 아빠의 기만. 여름날 매미소리, 공원에서의 즉흥 댄스. 모든 게 나만의 독단적인 해석이고 오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파반느'는 본래 느리게 걸어가듯 내 속도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자연의 장면의 전환

장면이 현실로 전환되는 순간, 찰나의 단상이 긴 사유로 전환되는 순간,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게 되는 순간. 영상이 자아내는 여러 ‘전환’을 포착해보고자 합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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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yin

2026.03.28

영화도 책도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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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al0321

2026.03.26

파반느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내내 떠올리게 만들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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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앙쥐

2026.03.17

영화도 책도 보고 싶네요.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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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

가족들이 일터로 떠난 빈집에서 텔레비전과 한 몸처럼 지내다가 어느덧 대중문화 비평을 말하는 어른이 됐다. 페미니즘 미디어 비평서 <어제 그거 봤어?>를 썼고, 한겨레신문 칼럼니스트 공모전에 당선되어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성 문화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칼럼을 연재했다. 현재 <씨네21>의 영화 기자로 활동 중이다. 목동불주먹이자 <슬램덩크> 사랑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