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애드온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라 필자가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망한 사랑이 너무 좋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지만 끝끝내 이뤄지지 않고 결국 문장만이 남아, 읽는 사람 가슴 아프게 하는 글이 너무 좋아요. 제가 큐레이션한 세 권의 책을 보고 ‘이게 왜 망한 사랑이지?’ 하고 의아해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문장들이 어떤 방식으로 저마다의 ‘망한 사랑’을 통과해 왔는지, 여러분 각자의 관점으로 함께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프랑수아즈 사강 저/장소미 역 | 녹색광선
그녀는 눈을 떴다. 돌연한 세찬 바람이 방안에 스며들었다. 커튼이 돌처럼 나부끼고, 커다란 화병의 꽃들이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이젠 그녀의 수면을 방해했다. 봄바람이었다. 첫 봄 바람. 희붐한 새벽에 나무 냄새, 숲 냄새, 흙냄새를 풍기는 바람이 휘발유를 잔뜩 머금은 파리의 거리를 가로질러 경쾌하고 기세등등하게 방안에 안착하며, 그녀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살아있는 기쁨을 알렸다.
우리는 행복할 때 다른 이들을 기꺼이 자신의 행복의 조력자로 간주한다. 다른 이들이 의미 없는 참관자에 불과했음을 깨달을 때는 오직 우리가 더는 행복하지 않을 때다.
프랑수아즈 사강을 사랑한다. 그녀가 써 내려가는 서정적이고 담담하며 우아한 문체가 좋다. 전체 작품을 모두 읽은 뒤에도 수십 번 재독하게 만드는 작품이 바로 『패배의 신호』다. 나에게는 이 책이 사강이 그린 '망한 사랑'의 정점으로 읽힌다. (사실 사강의 작품 대부분이 망한 사랑의 기록이지만.) 책의 첫 페이지는 시작부터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다. 독자를 단번에 그 안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주인공 루실이 오직 현실에만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점이 특히 좋았다. 과거에 머물지도, 미래를 꿈꾸지도 않는 그녀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행복과 평안만을 바란다. 끝이 뻔히 보이는 사랑들이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그녀와 함께 통과하다 보면, 비로소 사랑 뒤에 남겨진 문장들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샬롯 브론테 저/김나연 역 | 앤의 서재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다.
나도 나를 좋게 생각해야 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아. 난 혼자가 되거나 미움 받는 걸 견딜 수 없어
그렇다면 저는 그에게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결혼을 위한 존재가 되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제인 에어』는 내 감정의 코어 같은 책이다. 어렸을 때는 어린이 개정판으로, 그리고 성인이 되기까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감상 또한 달라졌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 물으면, 망설임 없이 『제인 에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제인 에어』를 망한 사랑이라 부르기엔 분명 해피엔딩에 가깝다. 하지만 이 책이 내 마음의 '코어 구슬'이 된 건 결말 때문이 아니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겪어야 했던 수십 번의 좌절과 처절한 '망한 순간들' 때문이다.
타인의 사랑 없이는 죽는 게 낫다고 말하던 소녀가,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등지고 황야로 나섰던 그 고통스러운 과정. 그 과정들을 필사하다 보면, 때로는 사랑을 망치는 것이 나를 구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는 걸 배우게 된다.
정세랑 저 | 난다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 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거야
강한 집단 무의식 때문에 경민이 한아를 사랑하면, 그 별 전체가 한아를 사랑한다고 했다.
한아는 어째선지 우주를 건너오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너 없이 어떻게 닳아가겠니
이건 꽉 닫힌 해피엔딩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망한 건 독자인 나다. 현실의 지구에선 이런 멋진 외계인을 만날 수 없으니까.
사실 나는 로맨스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는 설렘보다 온갖 사건 사고가 먼저 떠올라 이입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에서 한아뿐』은 달랐다. 다섯 번을 재독하게 만든 이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하는 존재)’은 사람이 아니다. 거리낄 게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나에게 반해 2만 광년을 날아왔으면서도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며 생색내지 않는 조신한 생명체라니. 지구에서의 로맨스에 지치고 질린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현실 연애는 이미 망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우주적인 문장들을 필사하는 동안만큼은 기꺼이 다시 사랑을 꿈꾸게 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aki
사랑이 끝난 뒤에 남아 있는 문장을 수집합니다. 트위터에서 끊임없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떠드는 사람. X(구 트위터) @aki_0617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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