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개와 인간의 시간
[김혜리 칼럼] 아름다움② | 예스24
임박한 3월은 개의 코가 으뜸으로 예쁜 계절이다. 모든 새순과 봉오리를 쓰다듬는, 명랑한 내 개의 까맣고 촉촉한 코를 미리 눈을 감고 그려본다.
글: 김혜리
202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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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의 아침은 뽀뽀하려는 자와 눈곱을 떼려는 자의 팽팽한 싸움으로 시작한다. 일단 눈을 뜨면 까만 콩 셋이 박힌 ‘털굴’(털북숭이 얼굴을 가리키는 반려인 용어)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시야를 육박해 들어온다. 안경 없인 거울도 안 보이는 초고도 근시인 나는 까만 콩 셋 중 눈과 코가 혼동되어 “저 이상한 표정은 뭐지?” 의아해하기도 하지만, 이내 생각할 겨를 없이 뽀뽀 세례를 방어하는 동시에 손가락 감각만으로 민첩하게 밤새 개의 눈머리에 맺힌 눈곱을 떼는 묘기를 부린다. 힘찬 강아지는 혓바닥도 기운이 넘쳐서 비몽사몽의 인간은 개가 날름대는 리듬에 맞춰 고개가 픽픽 돌아가는 한심한 꼴이 되지만, 와중에도 인간은 이만큼 아름다운 하루의 첫 번째 숏이 달리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 몇 합의 겨루기가 끝나고 반려인이 둘의 아침밥을 차릴 부엌으로 쫓겨나면 개는 비로소 침대를 독차지하고 흡족하게 스트레칭을 한다. 황급히 변호하자면 아로하가 잠든 나를 깨우는 일은 없다. “잘 때는 인간도 건드리는 거 아니다.”라는 규칙을 갖고 있어서 정오가 넘도록 일어나지 않아도 허기를 무릅쓰고 지켜보기만 한다. 단, 일어난 게 정황상 분명한데도 미적거린다 싶으면 가차 없이 뽀뽀 경보를 발동한다. 

 

이 칼럼의 독자라면 능히 짐작하겠지만 아로하는 제법 탄탄하고 식탐 있는 개다. 내게 처음 왔을 때보다 약 3킬로그램 증량했고 등길이도 10센티미터가량 늘어났다. 구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만 1살도 되기 전 새끼 네 마리를 낳고 유기 상태에서 젖을 먹이느라 지체된 발육이 뒤늦게 진행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몸집에 비해 체중이 과해 조금 걱정인데 엑스레이를 촬영한 주치의 선생님은 한 줄기 빛 같은 판정을 내리셨다. “놀랄 만큼 피하지방은 적습니다!” 말하자면 몸 내부에 장기와 근육이 꽉 차 있는데 부모나 선대 중 대형견이 포함된 소형견에서 종종 보는 유형이라고 한다. 

 

아로하의 등과 배를 가만히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 잠들어 있을 때조차 건강한 반발력이 느껴진다. ‘용산구 산소 탱크’라는 별명을 괜히 붙인 것이 아니다. 입양 초기 목욕을 시킬 때면 세상에서 제일 작은 경차를 손 세차하는 기분이 들어 웃곤 했다. 살이 오르면서 점박 무늬가 엷어진 통통한 배에는 네 쌍의 젖꼭지가 줄지어 있다. 보호소 기록이 없었다 해도 아로하가 아기 넷을 수유해서 키웠음을 눈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아로하의 맵시는 365일 국기 게양대처럼 의기양양하게 직립한 꼬리로 마감된다. 테리어 믹스답게 평균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로부터 솟은 쾌활한 꼬리는 기본 각도가 수직이고,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120도 이상 몸통 쪽으로 뻗친다. 붓글씨로 ‘용 용’(龍) 자를 쓸 때 마지막 획의 삐침이 전체의 무게 중심을 잡는, 바로 그 느낌이다.  

 

척추를 따라 뇌와 핫라인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분명한 개의 꼬리는 어이없는 정직함으로 나를 부끄럽게 한다. 뼈로 이루어진 기관이 물음표, 느낌표, 말줄임표를 잘도 써 내려간다. 보고 싶었어. 열렬히 원해. 두려워. 이런 말들을 에두르거나 안전망을 치지 않고 아로하의 꼬리처럼 곧장 말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나는 물살이의 지느러미와 새의 깃이 부러운 만큼 개의 꼬리를 영원히 시샘한다. 메리 올리버의 시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지 몰라’의 한 대목은 개의 입장에서 이 건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꼬리가 없어? (중략) 무슨 일이 있었어? 혹시 사고라도 당한 거야?”

  

개도 날 수 있다는 비밀을 반려인들은 알 것이다. 몸이 여리고 내성적이었던 타티도 산책길의 장애물 없는 구간에 이르러 이름으로 4분의 2박자 구령을 부르면 (“타티! 타티! 타티!”) 20초가량 그레이하운드 못지않게 발을 굴렀다. 아로하의 경우 질주의 신호탄은 특이하게도 오르막길이다. 모르긴 해도 “질쏘냐”의 정신이 아닐까 싶다. 개의 네 발과 두 귀가 동시에 중력을 이기며 공중 부양하는 찰나, 그와 리드줄로 연결된 사람의 생에 대한 의욕도 솔개처럼 솟구친다. 역설적으로 1인 산책자로서는 절대 사진 찍을 수 없는 순간이다. 언젠가 기술이 발전해 눈을 깜박하는 것만으로 사진을 남길 수 있다면 나는 이 아름다운 광경부터 포착할 것이다. 


 

미의 범주로 보면 아로하는 골계미의 소유자다. 쉽게 말해 코미디 주인공 재질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장만한 『미학 예술학 사전』에 의하면, 골계는 마음을 경쾌하게 만들고 중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종류의 미(美)다. 중압감, 존경, 공포를 자아내는 비장미가 골계미의 반대말이다. 아로하가 딱히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도, 횡단보도 건너편의 행인들은 파안대소한다. 개의 앞모습을 보며 걸을 수 없는 반려인 입장에서는 대체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추측할 수는 있다. 저보다 키 큰 수풀만 보면 뛰어들어 혼자 섀도우복싱을 하며 나더러 어서 사냥감 역할을 하라고 재촉할 때, 친구와 뭔가를 한참 의논할 때 둘 사이로 머리를 쑥 들이밀 때, 육류 간식을 목격하고 입에 든 채소 간식을 톡 뱉을 때, 까치를 쫓다가 놓치고 “봤어?” 하며 머쓱해할 때 아로하는 빌 머레이보다 웃긴다. 

 

미적 관점으로 개를 바라본 예술가는 고대 그리스 도자기에 케르베로스 문양을 새긴 도공부터 무수히 많다. 그중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경외심을 느끼는 예는 프란츠 마르크와 자코모 발라다. 프란츠 마르크는 이목구비와 모피의 결을 생략하고 묵직한 양감과 자세로 우주에서 개가 오롯이 차지하는 자리를 보여준다. 그의 개는 특정한 반려견이 아니라 신의 눈에 비친 보편적인 개다. 대체로 고요히 머물러 있는 마르크의 개와 대척점에 자코모 발라의 유명한 그림 <목줄을 한 개의 역동성>(1912)이 있다. 신바람이 난 닥스훈트의 발놀림과 ‘꼬리콥터’ 그리고 동행한 반려인의 걸음을 한 프레임에 잡은 이 그림은 개의 신체를 뛰어넘어 개가 인간들의 세계 안에서 만들어내는 파동을 묘사하는 데에 성공한다. 다시 한번 글을 도구로 삼는 이들이 무력해지는 지점이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라면 나도 개를 그려볼 수 있다. 임박한 3월은 개의 코가 으뜸으로 예쁜 계절이다. 모든 새순과 봉오리를 쓰다듬는, 명랑한 내 개의 까맣고 촉촉한 코를 미리 눈을 감고 그려본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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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fescent

2026.03.07

아름다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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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dptmf99

2026.03.03

넘 아름다운 러브레터입니다...(눈물찔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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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nsh

2026.03.03

반려인으로서 아침에 이 글을 읽으면서 조용히 미소 짓게 되네요~ 공감되는 글에 저희 강아지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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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예술학 사전

<다께우찌 도우지> 저/<안영길> 등역

출판사 | 미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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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테리어 믹스 아로하 샨티 킴과 서울에서 살고 있다.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 <조용한 생활> 운영. 『묘사하는 마음』,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림과 그림자』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