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저 | 문학과지성사
『공중의 복화술』은 시가 완성된 문장으로 도착하기 이전의 순간을 더듬는다. 문학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발화의 주체는 누구인가. 한 편의 시가 ‘나’의 고백처럼 보일 때조차, 그 문장 안에는 수많은 타인의 목소리가 스며 있다. 이 책은 몸과 목소리가 먼저 울려오는 책이다. 공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복화술이란 타인의 입을 빌려 말하는 기술인 동시에 말해지지 못한 것들이 언어의 틈을 통해 다층적으로 흘러나오는 방식을 말한다. 이 모든 페이지를 넘나들며 목소리, 슬픔, 고통, 죽음, 침묵, 불안, 무한, 불가능과도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시/문학의 발생 조건을 사유하는 이 책은 단일한 자아의 표현이 아니라 여러 겹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장소이며, 시인은 이 교차로의 온전한 통로로 살아낸다. 죽은 자, 사라진 자, 억눌린 자의 목소리가 공중에 매달린 채로 흔들린다. 나는 그 흔들림을 읽는 독자인 동시에 잠시 빌려진 몸이 되어간다. 시인은 말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말하게 하는 자이다. 시는 세계를 설명하기보다 세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붙드는 일에 가깝다.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숨을 고쳐 쉰다.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으나 이름 붙이지 못했던 떨림들, 울림들. 공중에서 매달린 채로 서성이고 있는 그 모든 목소리들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면서.
하미나 저 | 물결점
에세이와 논픽션, 시적 산문과 대화록이 나란히 놓인 이 책은 장르적 경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단일한 자아 서사를 의심하는 자리에서 출발한 이 혼종적인 책은 형식적 실험이기보다는 세계 인식에 대한 정직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듯 풀어놓지만 감정에만 기대지 않는 것. 개인의 서사가 어떻게 사회의 구조와 맞물려 있는지, 어떻게 내면화된 규범이 오랜 자아를 옥죄는지 면밀히 짚어나간다. 읽어 나가는 내내 공감과 함께 각성에 가까운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되, 상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 자신을 갈라낸 자리에서 자기 동일성의 환상을 해체해 나가는 문장들. 그래서 이 책은 스스로를 정돈하지 않는다. 모순되는 진술과 단절된 문장, 때로는 충돌하는 감정이 그대로 병치된다. 일관된 자아로 설명되기를 강요받는 자리에서 벗어나 타협과 삭제의 산물인 자신의 부분을 다시 꺼낸다. 다시 꺼내어 대면시키고 충돌시키고 다시 배열한다. 나를 갈라 꺼내는 일은 고통스러운 자기 변혁인 동시에 새로운 창조이자 연대의 방식이라는 것. 자신의 취약함을 통해 오히려 더욱더 단단한 하나의 언어와 내면을 지어 올린다. 책은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있느냐고. 자신을 갈라내 끄집어내는 자리에서 비로소 온전히 살아가는 숨이 열릴 수 있으리라고.

<애프터 양> | 영화
코고나다 감독
이 영화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기억의 형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족의 구성원이었던 안드로이드 양이 작동을 멈춘 뒤 가족은 그의 내부에 저장된 기억을 하나씩 복원해 본다. 그 기억들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 햇빛이 드는 각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입말 같은 한 줄의 노래, 누군가의 옆모습. 코고나다의 영화 <애프터 양(After Yang)>을 보고 나면 일상의 사물과 풍경에 스며 있는 신성을 다시금 찬찬히 바라보게 된다. 식탁 위의 물컵, 창가의 식물, 현관에 놓인 신발. 영화 속 인물들이 안드로이드 양의 기억을 복원하듯이 우리 역시 사물들에 깃든 그 모든 시간의 흔적을 더듬게 된다. 우리는 모두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의 삶은 어떤 기억들로 쌓여가고 있는가. 코고나다는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한 순간의 장면들이 존재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인물들을 멀리서 지켜보듯 담는다. 과장된 감정 대신 침묵과 여백으로 채우면서. 영화 속에서 상실과 이별과 슬픔은 지극히 고요하고 깊은 애도의 방식으로 흐른다. 기억하고 사랑하고 머뭇거리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안드로이드 양은 어디까지 인간인 것일까.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이 영화는 우리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완성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MTV Unplugged in New York | 앨범
너바나
너바나의 ‘MTV Unplugged in New York’(1994)은 커트 코베인 사후에 발매된 라이브 음반이다.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록밴드 활동을 하던 이십 대 초반의 공기가 그대로 밀려온다. 왜곡되고 과장된 디스토션 사운드 대신 담백한 어쿠스틱 기타와 첼로 소리가 전면에 놓인, 꽃과 양초와 밝고도 어두운 빛이 가득했던 공간 속에서 커트 코베인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욱더 또렷하게 터져나오는 청춘의 내면을 드러낸다. 그보다 앞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 등장했을 때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메탈리카, 메가데스, 건즈 앤 로지스, 스키드 로우 등을 카피하던 대학 록밴드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너바나의 음악을 카피하던 순간. 하드락/헤비메탈의 무겁고도 장엄한 테크닉과 정서를 밀어내고,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얼터너티브/그런지 락이 전면으로 부상하던 그 순간. 너바나는 펑크의 날것의 울림과 팝적인 멜로디 감각이 묘하게 결합된, 그래서 저항적인 정신과 함께,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상업성까지 느껴지는 사운드를 구현해 냈다. 그들의 음악은 분노와 체념, 냉소와 순수가 동시에 스며 있었다. 소리의 표면은 긁히고 찢겨 있었지만 그 속살은 놀라운 정도로 부드럽고 섬세했다. 그의 음악에 열광하던 시절,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안 된 어느 늦은 봄날, 신문 기사를 통해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알게 된다. 밴드 활동을 같이 하던 선후배들과 합주실에 모여 너바나의 앨범을 들으며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애도했던 순간도 한 장의 사진처럼 뚜렷이 남아 있다. 젊었고 서툴렀고 무엇이든 영원할 것처럼 믿었던 그 시절, 커트 코베인의 치열함과 취약함이 나의 이십 대와 경계 없이 이어지며 청춘 특유의 예민함과 불안함과 열정이 응축된 시절로 데려간다. 질주하는 사운드를 벗어난 절제된 어쿠스틱 연주 속에서 오히려 더욱더 처절하고 절박하게 드러나던 커트 코베인의 목소리. 그리하여 이 앨범은 내게 단순한 라이브의 기록이 아니다. 지나간 청춘의 감수성이 지문처럼 남아 매번 다시금 나를 울리는 목소리이다.

<No. 1, 그룹 X, 제단화> 캔버스에 유채, 금속박. HaK 187. | 미술
힐마 아프 클린트
힐마 아프 클린트의 <No. 1, 그룹 X, Altarpiece 제단화>(1915)는 거대한 삼각 구도 속에 기하학적 형상과 유기적 곡선이 결합된 작품이다. 캔버스 위에 유채와 금속박을 사용해 구축된 이 작품은 추상의 기원을 재고하게 만든다. 추상미술은 흔히 칸딘스키 이후의 역사로 설명되지만, 힐마는 그보다 앞서 비가시적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힐마의 작업은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는다. 신지학과 영적 탐구에 깊이 몰두했던 그는 보이지 않는 차원의 질서를 시각화하려 했다.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일정 기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도 자신의 작업을 미래에 맡긴 결단의 방식으로 읽힌다. 말년에는 그림 그리기 대신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작업 노트를 정리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봉인해버린 힐마의 태도에서 나는 어떤 결기를 느낀다. 인정받기 위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려야만 했기에 그려나간 사람의 고요한 확신. 힐마의 작품 앞에 서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동시에 무한해진다. 정교한 색과 선과 문자가 무질서하게 얽혀 있는 채로 하나의 온전한 질서를 이루어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설계도가 있다는 듯이. 우리의 삶에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도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은 이해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 모든 인생의 점과 점, 선과 선, 면과 면이 오롯한 의미를 지니며 연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새겨넣듯이.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지워졌던 힐마의 이름이 뒤늦게 조명받는 상황을 보면서 나는 한 예술가가 그 자신의 생애와 작품을 통과해가는 어떤 시간들에 대해 생각한다. 진정한 작품들은 지워진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까지도 포함할 때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 되살아난다고. 한 예술가의 조용하고도 치열한 분투를, 그 자신만의 영원의 세계를 이제라도 만날 수 있어서, 그렇게 한 화가가 그려낸 영원의 세계를 통해 내 영혼의 무한함을 다시금 감각할 수 있음에 초월적인 충만함을 느끼면서.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제니
시인.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영원이 미래를 돌아본다』, 산문집 『새벽과 음악』 을 출간했다. 언어의 구조의 집을 통해 가닿을 수 있는 세계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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