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혜의 어떤 이야기는 두 번 태어난다
[이다혜 칼럼] 외로운 기적 소리를 닮았어 | 예스24
『기차의 꿈』은 사라진 공동체와 존재 방식을 향한 애가다.
글: 이다혜
202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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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차의 꿈>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보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내가 본 바로는 그렇다. ‘볼만한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넷플릭스 영화 <기차의 꿈>을 말하면 그게 뭐냐는 표정이 돌아오거나 “세상에, 봤어요, 저 너무 좋았어요.”하는 대답이 몇 번이고 돌아왔다는 뜻이다. “재밌었다”와는 다른, “좋았다”는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충분히 훌륭하지만 최고의 걸작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떠올릴 때면 마음이 놓이는. 행복한 이야기라서는 아니다. 행복하지 않은 이야기도 아니다. 행복하고는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이편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이야기가 다른 무엇일 수 있겠는가.  

 

넷플릭스에서 <기차의 꿈>을 검색하면 이런 간략한 소개 문구가 뜬다. “20세기 초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휩쓸던 미국. 한 벌목꾼이 사랑과 상실을 겪으며 담담하고 의연하게 일상을 이어간다.” 클린트 벤틀리가 연출한 영화는 실제로 이런 내용이고 소설에 충실하게 기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소설과 영화는 다르다. 소설이 말하고자 한 모든 것들의 더 상냥하고 다정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우리가 기꺼이 상상하고 싶은 로버트 그레이니어가 영화에 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다면 둥글려진 부분들에 다소 아쉬움을 느낄 테고,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다면 거칠거칠한 야생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소설이 영화화될 때 언제나 ‘다르게’ 극화되기 마련이고 그 다름은 두 매체의 차이에 기반하기 때문에 좋거나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기차의 꿈>의 다름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영화 <기차의 꿈>이 좋다고 느끼게 만드는, ‘아내와 딸을 사랑한 한 남자가 경험한 상실과 그 이후의 삶’이 벌목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 척박하고 고독한 삶에 대한 은은한 동경은 사실 그러한 삶이 지금 영화를 보는 나/당신 자신의 현실과 아주 멀다는(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무관하다는) 안도감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은 아닌가? 영화 속 자연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낀 순간이 참 많았는데, 소설을 읽으며 자연 묘사에 아름답다고 느낀 순간 역시 참 많았는데, 소설과 영화는 어떻게 그렇게나 다를 수 있을까. 


넷플릭스 영화 <기차의 꿈> 스틸

 

데니스 존슨은 (이젠 다소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수식어인) ‘작가들의 작가’로 미국에서 추앙받는 소설가인데, 최근 한국에 출간된 단편집 『예수의 아들』(1992)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미국의 문학 창작 수업에서 자주 교재로 쓰이는 책이다. 『예수의 아들』은 2006년 뉴욕타임스 북리뷰 설문조사에서 지난 25년 동안 출간된 미국 소설 중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예수의 아들』에 수록된 단편들을 관통하는 이름 없는 화자는 마약 중독자이며 방랑자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화자’이며, 이 인물은 데니스 존슨 본인의 삶을 반영한다고 알려져 있다. 1949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데니스 존슨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도쿄와 마닐라 등의 도시를 떠돌며 성장했다. 1967년 가을에는 아이오와대학교에 입학했고 시와 단편 소설을 써 곧 팔기 시작했다. 겔트너의 설명은 존슨이 아이오와 대학교 학부 첫 학기를 보내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생동감을 띤다. 데니스 존슨은 아이오와 대학교 캠퍼스에서 있었던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서 체포되어 치안 방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54달러의 벌금을 내는 대신 존슨은 수감되기를 원했고, 존슨 카운티 구치소에서 보낸 6일 동안 그는 존 던던을 만났다. 던던은 던던이라는 이름으로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들에 등장하게 될 인물이다. 알려진 바로는 대학원 과정을 밟으며 작가 워크숍에 있는 동안 레이먼드 카버의 수업을 듣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도약. 데니스 존슨은 알코올 중독자인 동시에 헤로인 중독자가 되었다. 수업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혈장을 팔아먹고 살았고, 술집에서 벌인 싸움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는가 하면, 마약을 사기 위해 친구들의 물건을 훔치고, 십 대에 결혼해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내가 출산할 때 만취해 있어 분만실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는 ‘더 바인’이라는 술집에 죽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의 시간이 긴 시간이 흐른 뒤, 그가 술을 끊은 뒤에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예수의 아들』이라는 소설이 되었다. 당시에 ‘더 바인’에서 어울리던 단골들이 “우리에 대해 소설로 쓰려고 그러는 거지?”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는데 실제로 그랬던 셈이다. 『천사들』이라는 소설에 쓸 소재를 위해서는 애리조나의 플로렌스 주립 교도소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그 때 수감자들도 ‘더 바인’의 단골들과 비슷한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데니스 존슨은 세 번 결혼했고, 끊임없이 외도를 했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참석하는 동시에 성중독자 모임에도 참석했다. 결국 영화화되지 못하는 일이 많았지만 시나리오 집필을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졌고, 잡지사의 의뢰로 니카라과나 모가디슈를 비롯한 분쟁지역의 취재를 하는 일도 있었다. 소설 『기차의 꿈』은 데니스 존슨이 2011년 발표한 소설이다. 


 

『기차의 꿈』은 일상적인 죽음과 보편적인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이 1917년이며 위험이 상존하는 벌목현장에서 일하는 로버트 그레이니어가 주인공이니만큼, 죽음도 고독도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우리는 이제 영화 내내 듣게 될 윌 패튼의 내레이션을 듣게 된다. 영화를, 로버트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가리키는 내레이션이다. 

 

예전에는 구세계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낯선 오솔길, 숨겨진 통로를 지나 모퉁이를 돌면 불현듯 마주치게 되는 심오한 미스터리. 그것은 만물의 근본이었다. 이제 그 구세계는 사라지고 없다. 두루마리처럼 말아 어딘가에 치워두었다 해도 아직도 그 반향을 느낄 수 있다. 

 

구세계와 심오한 미스터리. 이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적당히 신비로울 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각본을 쓴 클린트 벤틀리 감독과 공동 각본가 그렉 퀘다는 소설에서 몹시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을 전부 삭제했는데, 그와 동시에 자연의 이미지를 아름답게 포착해 담아낸다. 인간보다 긴 세월 살아온 거대한 나무들을 벌목해 철로를 까는 목재로 사용하는 벌목꾼인 로버트가 숲에서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장면을 보고 동감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장면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삶이 우리에게 레몬을 줄 때 레모네이드를 만들라는 격언이 절로 생각날 정도다. 좌절이 있지만 그것에 치이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얼마나 희망적이고도 멋진가. 


영화는 공들인 초중반부에서 로버트가 가족을 이루고 비록 곤궁할지언정 온전히 충만한 행복을 안기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성장해 자신의 가정을 이루고 그 안에서 충만한 삶을 꾸리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영화가 세 가족의 행복한 나날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그 가족을 상실한 로버트의 고통에 관객을 연루시키기 위해서다.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가족의 행복한 순간은 놀랍도록 짧게 스쳐 지나가고, 그마저도 지고의 행복 같은 뉘앙스를 담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로버트가 딸 케이티와 보내는 순간에 내레이션으로 이렇게 말한다. “돌아보면 이 시절이 그는 가장 행복했었다.” 소설에서는 아직 말도 못 하는 어린 딸이 궁지에 몰린 짐승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고 느끼는 로버트를 묘사한 뒤 이런 문장을 덧붙인다.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그 뒤로 평생 동안 이날 밤의 이 순간을 잊지 못했다.” 전자는 행복을 구체적으로 짚어내지만 후자는 강렬한 순간이었음을 언급하는 식이다. 소설에서도 로버트의 결혼생활은 충만했지만, 영화와 같은 방식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넷플릭스 영화 <기차의 꿈> 스틸컷

 

1920년 즈음 서부에서의 삶은 남자에게 가혹했고 여자에게는 더 가혹했다. 소설에서는 특히 그렇다. 사람들은 수시로 죽었다. 로버트가 일한 벌목 현장에는 ‘과부 제조기’라고 불리는 사고가 잦았다. 높은 낙엽송에서 떨어진 죽은 가지에 뒤통수를 맞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벌목현장에 어울리지 않게 되고도 일을 했던 피플스는 그런 죽은 가지를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어느 날 아침 죽은 채 발견되었다. 나중에 로버트 역시 그렇게 날아온 가지에 턱을 맞아 턱이 비뚤어졌다. 그 턱은 끝내 바로잡지 못했고, 그래서 음식을 씹을 때마다 통증이 심해 그는 남은 평생 깡마른 몸으로 살았다. 관절도 부서졌다. 로버트가 어렸을 적 우연히 마주친 죽어가는 남자는 자기 과거를 들려주는데, 형의 집에 얹혀살던 그는 열두 살 난 조카의 방에 밤마다 들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전부 했고, 조카는 임신을 했고, 그의 형은 분노해 딸을 때려죽였다. 

 

무결하지 않기로 말하면 로버트 역시 빼놓을 순 없다. 영화에서 중국인 노동자를 몰이하는 사람들을 그저 방관하는 것처럼 보였던 로버트(그랬던 일만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의 일화는 소설에서 아예 첫 장면으로 등장한다. 창고의 물건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은 중국인 노동자를 죽이려는 무리에 가담했던 그는 중국인의 발을 적극적으로 붙잡았다. “내가 놈을 잡았어요. 말만 해요!” 영화의 로버트와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은 때로 좋은 꿈처럼 환상적인 영화와 정서적으로 크게 다르다. 소설은 거칠거칠한 리얼리즘 속에 깃든 환상적이고 기적적인 느낌을 한껏 끌어올린다. 로버트는 철로가 동부와 서부를 잇는 미국의 산업적 각성 한복판에서 산업화 이전의 존재로 살았다. 도시로부터 멀리, 정보로부터 멀리 있었던 그는 세계대전에 대해서도 피상적인 이해만을 갖고 살았다. 

 

소설을 영화와 비교해 가장 당혹스러워지는 순간은 로버트의 딸이 죽지 않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깜빡이면서부터다. 로버트는 어느 날 늑대무리를 이끄는 늑대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다리 사이에 피투성이가 매달려 있었다는 목격담은 늑대소녀에 악마적인 이미지를 더한다. 앞서 어린 딸의 눈을 “궁지에 몰린 짐승”같다고 연상했던 일이 예언이라도 된 것인지, 아내와 딸이 불길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 로버트는 계속 꿈을 꾼다. 기차의 꿈과 아내의 꿈. 아내의 꿈에서 그는 아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내는 그에게 딸 케이트가 자신과 함께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소문의 늑대 소녀가 그의 집 근처에 나타난다. 한쪽 다리가 으스러진 채 인간의 말을 하지도 못하고 로버트를 경계하는 그 소녀를 로버트는 도와준다. “그는 그냥 알았다. 이 아이는 그의 딸이었다.” 하지만 새벽이 되어 그가 기차 소리를 들으며 잠든 사이에 아이가 창문으로 뛰어나간다. 로버트는 따라 나가지 않는다. 영화에서 생의 기적처럼 묘사되는 비행기를 타는 후반부의 장면 역시 소설에서는 그저 짧게 언급하고 지나간다. 그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영화 <기차의 꿈> 스틸컷

 

소설 『기차의 꿈』은 사라진 공동체와 존재 방식을 향한 애가다. 그 한복판에는 데니스 존슨이 집착적으로 공들여 묘사하는 자연이 있다. 

 

일몰 때 그는 딱 멈춰 섰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절벽이었다. 스푸르스 호수라고 불리는 물가로 내려가는 뒷길을 발견한 그는 수백 피트 아래에 있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평평한 수면이 잔잔하고, 흑요석처럼 검었다. 주위를 에워싼 절벽의 그림자가 그 호수를 잡아먹고, 상록수와 상록수의 그림자가 그 호수를 이중으로 둘러쌌다. 그 너머로 아직 햇빛을 받고 있는 캐나다 로키산맥이 보였다. 꼭대기에 눈을 얹고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산은 구름에서 영양분을 취했다. 마치 땅이 창조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웅장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그의 삶을 채운 숲은 너무나 울창하고 높아서 세상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볼 수 없게 그의 시야를 대체로 가려버렸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나 산을 하나씩 가질 수 있을 만큼 세상에 산이 많은 것 같았다. 그에게서 저주가 사라지고, 욕망이라는 전염병도 스르르 날아가 저기 먼 계곡에 내려앉았다. 

 

이제 자연을 묘사하는 솜씨 그대로 로버트의 죽음에 부치는 부고가 작성된다. 이 대목은 성스러울 정도로 간결하며, 영화에서도 그대로 내레이션된다. 이 단락들을 비교해서 읽어보기를 바란다. 데니스 존슨이 ‘작가들의 작가’라는 말은 과장일 리 없는 것이다. 

 

그레이니어는 여든 살이 넘어서 1960년대까지 살았다. 살아 있는 동안 태평양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서부까지 여행한 적도 있지만, 바다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동쪽으로 가장 멀리 간 곳은 몬태나주 경계선 안쪽으로 40마일 거리인 리비였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한 명, 아내 글래디스였으며, 재산은 땅 1에이커, 말 두 마리, 수레 한 대였다. 그는 술에 취한 적이 없고, 총기를 구매한 적도 없고, 전화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기차를 자주 탔지만 자동차도 많이 탔고, 비행기도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말년의 10년 동안 그는 읍내에 나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며, 자손을 남기지도 않았다.

 

소설에서는 로버트에게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은 연결될 듯 결국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된다는 감각은 의미를 원하는 인간의 바람일 뿐이므로. 생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또 필연적으로 멈출 뿐이므로. 다만 그 모든 순간들, 장면들, 소리들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증폭되고 폭발한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자주 잔혹하고 고독하며 불균질하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친절하게 설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영화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고, 소설은 소설이 잘하는 걸 했다. 

 

+

 

영화 <기차의 꿈>의 화면비는 3:2로, 1920년대 사진들에서 영감을 받은 선택이라고 한다. 아돌포 벨로소 촬영감독은 인터뷰에서, 나무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고 하늘도 한 화면에 담기 위해 헤드룸(인물 머리 위 공간)을 넓게 남기는 장면을 많이 찍었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점도 약간 미심쩍다. 이 선택이 아름답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자연 풍광을 이 정도로 많이 공들여 찍는 영화들은 이보다 와이드한 화면비를 선택하기 마련 아닌가? 물론 넷플릭스 공개를 기본으로 하고, 그 말인즉 핸드폰을 비롯한 ‘작은’ 화면으로 보기 편할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모르겠지만.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 영화의 숲은 굉장히 알록달록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밝게 촬영되었다. 실제로 풍성한 색채의 자연이 시종일관 기분 좋기는 한데, 많은 경우 숲은 이보다 더 어둡게 촬영되는 일이 많다. 특히 이런 상실과 고독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 역시 ‘작은’ 화면, 어두운 화면일 때 관람자가 화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게 되는 상영환경을 고려한 선택인 건 아닐까. 물론 (차라리 야한 건 괜찮아도) ‘불편’할 수 있는 설정들이 일제히 정리된 것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다만 오해는 마시길. <기차의 꿈> 영화는 정말 좋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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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꿈

<데니스 존슨> 저/<김승옥> 역

출판사 | 다산책방

예수의 아들

<데니스 존슨> 저/<박아람> 역

출판사 | 기이프레스(giyi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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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팟캐스트 <리딩 케미스트리> 진행.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몇몇 영화들이 얼마나 소설인지 얼마나 영화인지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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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존슨

1949년 뮌헨에서 태어나 도쿄, 마닐라, 워싱턴 D.C.에서 자랐다.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멘토인 레이먼드 카버를 만났다. 스무 살이던 1969년 첫 시집 『물개 사이에 선 남자The Man Among the Seals』를 출간하며 데뷔했다. 1983년 첫 소설 『천사Angel』를 발표해 평단의 찬사를 받은 존슨은 1992년 소설집 『예수의 아들Jesus’ Son』을 출간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발돋움했다. 이 소설은 2006년 [뉴욕 타임스]가 ‘지난 25년간 최고의 책’ 중 하나로 선정했고,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6년 유망한 작가에게 주어지는 와이팅상을 수상했고, 구겐하임 기금의 수혜자로 선정되었다. 2007년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연기의 나무Tree of Smoke』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했고,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기차의 꿈』은 존슨이 2002년 [파리 리뷰]에 처음 발표한 소설로, 같은 해 아가 칸 상을, 이듬해 오헨리상을 받았다. 2011년 정식으로 출간되어 [뉴욕 타임스] ‘주목할 만한 책’으로 선정되었고, 2012년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그해 퓰리처상은 수상작을 선정하지 않았다). 2019년 리터러리 허브 선정 ‘지난 10년간 최고의 소설 Top 20’에 이름을 올렸다.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던 데니스 존슨은 2017년 5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