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우의 파세자타
[최현우 칼럼] 시는 무탈과 무참으로 빚어지는지 | 예스24
독자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패터슨>을 모형으로 제시했던 것은 삶의 격정과 충격적인 운명만이 시의 훌륭한 재료가 아님을, 그리고 일정 부분 시는 삶과 무관함으로 삶과 결착한다고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 최현우
202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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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업무는 크게 두 가지다. 시를 생산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내보내는 일. 시를 쓰는 일과 그것을 타인에게 보이거나 설명하는 일은 조금 다른 일이다. 전자는 나의 내부에서 내부를 맞닥뜨리는 일이고, 후자는 나의 내부를 외부와 맞닥뜨리게 하는 일이다. 시는 분명 내게서 자라나 나를 닮은 것들이지만, 내 의지나 의도와는 상관없는 쪽으로 움직이거나 생판 모르는 모습을 하고 내가 모르는 곳으로 사람을 데려가고는 한다. 시를 쓰고 고치는 시간은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에둘러 통제하려는 목축의 시간과 가깝고, 시가 잘됐다고 여기며 느끼는 간밤의 충만감과 충족감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허탈함과 허무로 빠져나가기 부지기수다. 달빛 속에서 보석인 줄 알았던 것이 햇빛 속에서 그저 흔한 자갈이었음을 깨닫게 되거나, 동전이라고 생각해서 무심코 주웠던 것이 매우 귀중한 고대의 유물로 밝혀지는 일처럼. 아마 시를 쓰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모종의 부끄러움과 자신감 없는 태도는 이런 반복에 끊임없이 마모되어 생긴 기질적 면모일 것이다. 그리고 아는 한, 그렇게 온전하게 실패하고 다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만이 결국 시인으로 살아갔고 시인으로 죽었다. 시인들 저마다의 시가 도착하는 곳이 모두 다른 것처럼, 시인들이 실패하고 넘어졌던 곳도 저마다 달라서 이를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란 매번 난감한 일이다. 그나마 오래 달리다 보니 결국 남은 건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자신의 숨소리와 여기가 어디지? 하고 두리번거렸던 기억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시절에 시를 읽고 배웠다. 일필휘지는 미덕이 아니라는 것. 

 

운이 좋아서 친애하는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허락되곤 했다. 나는 첫 시집을 내고 독자들을 활발하게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작가 중 한 명이다. 첫 책을 내고 2주 후부터 코로나 격리가 시작됐다. 그래서 그 순간들을 꽤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몇 번의 만남 속에서 한 번은 몹시 당황해서 말이 꼬여버렸다. 준비해 간 말들이 끝나고 관객 질문 시간 막바지. 한 독자 분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그분의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평범한 생활, 어떤 모멸감, 충분하지 않은 재능. 이런 저와 제 삶도 시가 될 수 있을까요? 지체하지 않고 당연하죠! 말해야 했다. 그런 질문엔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순간 머뭇거리고 말았다. 그런가? 그럴 수 있나? 내가 정말, 저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나? 허둥지둥 대답했다. 혹시 영화 <패터슨> 보셨어요?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시간 관계상 제대로 부연하지 못했다. 내내 그 짧은 대답이 마음에 걸려서 오래 복기하곤 했다. 


영화 <패터슨> 스틸컷

 

2017년 겨울에 한국 개봉한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은 당시에 갓 만나기 시작했던 지금의 아내가 그저 시인이 나온다는 이유로 나를 끌고 가서 보여준 영화였다. 막연하게 시인이 소재로 나오니 좋아하리라 여기며 쫄랑쫄랑 손을 이끄는 그녀에게 차마 대체하여 제시할 만한 데이트 계획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그때는 짐 자무쉬 감독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알지 못하던 때였고, 영화는 몹시 나른하고 느슨했다. 그녀는 이내 옆에서 기대 조금 코를 골거나 움찔거리며 잤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번 주 그녀의 격무가 몹시 피곤한 모양이라 생각하며 안쓰러워했다. 그 이후로 함께 봤지만 나만 기억하는 영화가 이토록 늘어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나는 이제 아내와 함께 영화관에 가면 되도록 어깨가 두툼한 상의를 입는다. 아내는 하도급 준 일을 회수하듯,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 이제 잘 요약하고 묘사해서 재밌게 설명해 봐, 어서.’ 하는 듯이 나를 초롱초롱 쳐다본다. 영화 감상을 외주 주다니. 푹 자서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에게도 그런 아내가 있다. 미국 뉴저지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기사 패터슨은 휴대전화나 노트북도 없이 공책에 펜으로 종종 시를 습작하곤 하는 아날로그적 인물이다. 대도시보다 비교적 낡은 소도시에서 낡은 방식을 고수하는 일종의 낡고 보통의 사람. 영화는 ‘패터슨시에 사는 패터슨’이 매일 정해진 시각에 꼬박꼬박 출근해서 정해진 시각마다 버스 정류장에 서고, 퇴근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아내의 개를 산책시키며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을 가볍게 하고 집에 돌아오는 똑같은 일주일을 다룬다. 그런 패터슨이 남들과 다른 유일한 한 가지는 시를 쓴다는 것. 그의 아내 로라는 패터슨과는 다르게 활달하고 관심사도 매일 바뀌는 즉흥적인 인물이다. 패터슨이 활자라면, 로라는 동영상이다. 그러나 서로의 다름은 사랑의 장벽이자 이유이듯, 패터슨은 로라를 아끼고 로라는 패터슨의 삶과 시를 지지한다. 영화는 패터슨의 반복하는 일상을 최소한의 카메라 움직임으로 따라다니며 패터슨이 시를 포착하고 그것을 잠시 적는 순간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조망한다. 그 일주일의 시간이 영화의 전부다. 똑같은 하루를 살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는 패터슨의 삶에서 유일하게 계속 변모하는 건 그가 적는 시뿐이다.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고 나면 다음 시를 적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격정적인 사건은 주말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부부의 개가 패터슨의 사본조차 없는 유일한 시작 노트를 전부 물어뜯어 복구할 수 없게 훼손한 일이다. 그간의 습작들을 전부 잃게 된 패터슨은 잠시 상실감에 빠진다. 오직 자신의 흥미에만 몰두하여 다소 이기적으로 보이던 로라도 그 순간만큼은 안절부절하고 안타까워한다. 기분을 추스르기 위해 홀로 산책하다가 멍하니 벤치에 앉아 쉬던 패터슨은 우연히 일본에서 온 시인을 만나 대화하다가 새 공책을 선물 받는다. 그리고 원래 해왔듯이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멀리 보이는 폭포를 바라보며 시를 적기 시작한다. 다시 돌아온 월요일 아침. 패터슨이 똑같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잠든 아내의 뒷모습에 입 맞추고 출근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패터슨> 스틸컷

 

시나 시인을 다루는 영화로 자주 언급되는 작품 중 이창동 감독의 <시>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다룬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원작으로 하는 <일 포스티노> 또한 시가 부재료를 넘어 주원료로 사용되는 영화 중 하나다. 두 작품 모두 시인이 아닌 이가 시를 쓰고자 시 창작 수업을 듣거나 시인의 곁에서 시를 배우려 한다는 점에서 잠시나마 묶어볼 수 있겠다. <시>는 주인공 양미자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으로 끝내 어떤 영혼의 전환에 도달한다면, <일 포스티노>는 주인공 마리오가 시와 시인과 맺은 우정으로 인해 단순하게 바라보던 사회를 단순하지 않게 바라보게 되는 시선을 체득하는 성장을 보여준다. <일 포스티노>의 경우 어느 정도 유머와 위트로 무겁지 않게 분위기를 다루지만, <시>와 <일 포스티노> 모두 결말에 안타까운 비극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뿐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비극적인 운명을 향해 사람이 가진 대항으로 ‘시’를 중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들은 시와 동행하고 중요한 자리에 시를 초청하는 영화이지만 결국엔 극적인 마무리로 끝나게 된다. 영화는 영화의 편인 셈이다.

 

독자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패터슨>을 모형으로 제시했던 것은 삶의 격정과 충격적인 운명만이 시의 훌륭한 재료가 아님을, 그리고 일정 부분 시는 삶과 무관함으로 삶과 결착한다고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삶만이 위대한 시를 쓰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패터슨은 끊임없이 본다. 면밀하게 보고 끊임없이 듣는다. 그리고 상상한다. 잠옷 차림으로 아침에 시리얼을 말아먹으며 식탁 위에 놓인 오하이오 블루팁 성냥갑을 보고, 아내의 담배에 불을 붙일 성냥의 미래를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성냥이 되어본다. 당신을 위해 머리에 불을 붙인다. 당신 입술 근처를 스쳐 지난 것만으로도, 나는 천국을 향해 피어오른다. 패터슨이 쓴 그 시의 제목은 ‘Love Poem’이다. 그저 시리얼을 먹다가 성냥갑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쓴 시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앞서 두 영화가 영혼을 움직이며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일종의 도구로서 시를 사용한다면, <패터슨>은 그저 생활의 잔여물로 가만히 쌓이는 시를 보여준다. 패터슨의 시는 아무것도 변하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쓸모없는 일에 그치고 마는가. 그의 생활을 쓸모없는 일의 집합으로 여기게 되는가.


영화 <패터슨> 스틸컷

 

당신의 일상이 예술이 된다거나, 너도 한 편의 시라는 식의 말에 전면적으로 항의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어디서든 이야기할 때 당신의 삶이 있는 그대로 특별하다는 식의 메시지는 말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특별함’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고 되려 항변한다. 거기엔 두 가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하나는 예술이나 시를 향한 막연한 선망이나 믿음.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일상을 예술이나 시가 되지 못한 시간이라고 판정한 이후 찾아올 절망이다. 예술 소양을 어떤 계급의 자질이라고 사유하는 순간부터 어딘가 큰 오해가 작동하고 만다. 자꾸만 증명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고 마는 것이다.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 될 뿐,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자주 놓치게 된다. 위대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야 거짓말이겠지만, 그것은 내 수단과 방법으로 조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억지로 바친 제물을 받고 기뻐하는 신이라면, 시의 신은 퇴마해야 할 악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나는 그저 내 삶과 모두가 무탈하기를 바란다. 평온을 바라는 마음은 예술가로서 실격일지 모르지만, 시를 쓰는 자들이 자주 아프지 않고 다만, 무탈 속에서 무참해지기를 바란다. 무참하다는 건, 사소한 슬픔이나 작은 아름다움에도 온전히 몰입하거나, 그 앞에서 작아지며 그 밑에 나를 작게 접어 둠으로 하염없이 부끄러워지는 일. 무탈한 사람이 시를 쓰려면 무참해지는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다시 무탈함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는 어쩌면 때리고 할퀴는 자리가 아닌, 가만히 어깨를 빌려주어야 할 곳에 있을지도 모르기에. 어쩌면 그곳에만 있을지도 모르기에. 이마저도 충분한 대답은 아닌 것만 같아서, 나는 다시 산책한다. 산책이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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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저/<황유원> 역

출판사 | 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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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우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우리 없이 빛난 아침』과 산문집 『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