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책을 고르는 일은 일종의 의식이다. 새해 다짐을 하듯, 아니, 좋은 꿈을 꾸기를 바라며 묵은 해의 마지막 잠자리에 들듯. 꿈은 고를 수 없지만 책은 고를 수 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직업적인 독자들에게 그 사실은 더욱 각별하다.
모든 책은 다음 책을 부르고, 이어지는 책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흐름은 때때로, 실은 자주, 우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곳으로 이끈다. 마치 유튜브 알고리듬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이라고 쓰고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젓는다.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는 당장 말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비교라면 일단 사양하고 싶은 것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이니까.
그래, 연재 첫 글이고 마침 새해이기도 하니, 새해 첫 책을 고르는 기쁨을 쓰자. 꼭 읽어야 하는 책과 그것에서 이어진, 꼭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읽게 되는 책들과 함께 추는 도미노 춤에서 살짝 빠져나와, 순전히 나를 위한 책을 고르는 기쁨을.
…정말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그날따라 집에서 나오기 전에 먹은 삶은 달걀 하나로도 허기가 가시질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근처 식당에 들러 콩나물국밥을 먹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작업실을 향해 가는데,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운 소방차와 구급차와 경찰차가 보였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고,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검은 연기도.
그 연기가 작업실 건물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낯선 풍경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잡힐 듯 잡히지 않은 불길을 바라보다가, 경찰관의 인도를 따라 들어간 건물 내부는 더욱 생경했다. 까맣고, 축축하고, 냄새가 났다. 작업실 문은 뒤틀려 있었고, 바닥은 검게 젖은 발자국으로 어지러웠다. 그리고 분진, 책과 음반과 컴퓨터와 테이블과 식기와 그 밖의 모든 사물들을 공평하게 뒤덮은 작고 유독한 먼지들이 있었다.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면—불은 아래층에서 났고, 원인은 누전. 다행히 아무도 다치진 않았다. 작업실 문은 화재 진압을 위해 강제 개방하는 과정에서 망가졌고, 새 문이 올 때까지 일주일 가까운 시간을 열린 채로 있었다. 전문 업체를 불러 청소했지만 분진이 달라붙은 책은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책에 짙게 밴 냄새도.
그렇게 새해가 되었고,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냄새는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지금 나는 ‘가시다’라는 말의 묘함을 생각한다. 그건 어떤 상태가 없어지거나 달라진다는 뜻의 동사이지만, 내게는 종종, 그리고 이런 경우엔 특히, ‘가다’의 높임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의 거취를 결정할 권리가 없고, 오직 때가 되어 스스로 ‘가시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어려운 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떤 것들은 그렇게 온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때로는, 실은 자주, 책도 그렇게 온다. 내가 고른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내가 고르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 첫 책이 된 클레르 마랭의 『제자리에 있다는 것』도 그랬다.
체감 영하 십오 도의 추위에 창문을 활짝 연 채, 분진을 닦아보려 바닥 가득 늘어놓은 책들을 바라보며, 내게 무척 익숙했으나 이제는 냄새도 공기도 느낌도, 말하자면 모든 것이 지독하게 낯설어진 그곳에서 내가 달리 고를 수 있는 책은 없었다—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원고를 위해서라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나에게 남아 있던, 어쩌면 유일한 자리.
『제자리에 있다는 것』
클레르 마랭 저/황은주 역 | 에디투스
『제자리에 있다는 것』의 한 대목에서 마랭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엇이 될지 진정으로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며, 많은 경우 일은 상황에 따라 내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지고, 나의 직업 또한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나를 이끈 것은 인생의 변덕스러운 부침이라고.
“상황에 따라 흘러 들어오게 된 이 자리에 너무 큰 중요성을 부여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처럼 어떤 무질서 속에서 내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확고한 의지나 목적, 우주적 질서의 결과라기보다는 다양한 실존의 혼란이 초래한 결과다. 나는 어쩌다 보니 여기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책에 ‘위로’나 ‘힐링’ 같은 말을 붙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냉소적인 독자라서가 아니라, 그 말들이 너무 닳아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맞춤한 ‘제자리’는 처음부터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할당된 자리와 떠남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낼지를 묻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적잖은 위안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내 책들을 예전처럼 복구하는 일이 아니라, 이 책들을 내가 여러 방식으로 드나들 수 있는 자리로서 다시 바라보는 일이라는 생각도. 마랭은 말한다.
“우리는 정문으로만 들어가지 않는다. 늘 환영받는 존재인 것도 아니다. 그 공간을 둘러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보고, 소유의 개념에서 벗어나 그곳을 제 것으로 만들어 보자. 이 장소가 내 소유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통해 존재의 잠재력을 발휘해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
희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는 언제나 롤랑 바르트를 떠올리고, 그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에서 했던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희망이 없어도 시작할 수 있다면, 시작하기 위해 연습하는 일은 오히려 더 정직하지 않을까?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그러니까 연습은 없고 오직 실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연습과 실전은 다른 말이 아니다. 다만 어떤 이들에게는 ‘실전’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고, 그럴 때 ‘연습’이라는 우회가 필요한 것일 뿐.
그런 생각은 나를 『겨울 연습』으로 이끈다. 김화진과 정기현이 쓴 소설과 정지혜와 황은주가 쓴 에세이를 묶은 겨울 앤솔러지다. 부제는 빛, 볕, 흐름, 소리. 그 네 단어는 정확히 지금 내가 다시 찾아야 하는 감각들이었다. 탄 냄새 대신 신선한 종이 냄새가 먼저 오는 책. 내게는 그게 필요했다.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옮긴 번역자 황은주의 이름을 여기서도 발견하는 것은 반가운 우연이다. 어떤 연결은 뜻하지 않은 겹침을 만들기도 한다.
김화진, 정지혜, 정기현, 황은주 저 | 스위밍꿀
김화진의 「앉은 자리」에는 볕이 있다. 팥주머니와 팥죽 같은 물리적인 따뜻함에서 시작해 이름 붙이기 어려운 온기로 끝난다. 정지혜의 「플로모션」에는 흐름이 있다. 물웅덩이를 바라보던 유년의 시간에서 ‘즉흥 접촉’의 움직임, 영화 속 물의 이미지로 우리를 이끈다. 한 편은 마음의 온도를, 다른 한 편은 몸의 리듬을 조용히 되찾게 하는 것이다.
정기현의 「밤나무 가지에 이름 모를 해조가」의 빛은 다정하다가 불쑥 번쩍이고, 황은주의 「피아노 화덕」의 소리는 음악을 따라가다가 울음을 통과한다. 그 번쩍임과 눈물은 어떤 교훈으로 봉합되지 않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정확한 감각으로 남는다. 추운 겨울날 처마 밑에 달린 투명한 고드름처럼, 담백하고 상쾌한 느낌으로.
이렇게 네 편의 작품—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황예인의 「에디터 노트」까지 읽고 나면, 유독 가혹한 겨울이지만 조금 더 잘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각기 다른 글들 속에서 겨울을 충분히 연습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에 ‘실용적’ 같은 단어를 쓰고 싶진 않지만, 희망과 달리 연습은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제야 새해가 된 기분이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제자리에 있다는 것
출판사 | 에디투스
겨울 연습
출판사 | 스위밍꿀
금정연
읽고 쓰는 사람. 『아무튼, 택시』, 『담배와 영화』,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한밤의 읽기』, 『모두 일요일이야』 등을 쓰고 『문학의 기쁨』,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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