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처음 낸 책(2014)은 1장짜리였다. 아코디언북을 봉투에 넣은 형태였는데, 2, 4, 6 … 18, 20쪽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코디언을 펼치면 단 한(단면으로 쓸 경우)두(양면으로 쓸 경우) 쪽으로도 볼 수 있는 그런 책. 발췌나 요약이 아니라 완결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면 단 한 쪽이라도 책이 될 수 있다, 고 말하고 싶었다. 표제작이 그대로 단편집의 제목이 되면서 가려지는 다른 수록작들의 제목을, 이런 책이라면 지우지 않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이드프로젝트에서 어느덧 세 자릿수의 ‘한쪽 책’을 채워갈 무렵, 이웃하던 (기성)출판사 대표님이 “ISBN을 받는 게 어때요? 받으면 좋겠는데? 안 받을 이유가 없잖아?” 물으셨다. ‘어째서(좋을까)요?’라는 눈빛으로 물으니, “…왜, 유통하기도 쉬울 테고, 어쨌든 책이라는 인정을 공적으로 받는 거니까요.” 사실 이 출판물은 대형서점에서 잘 유통하지 않았고(2000~4000원 사이의 책이었기 때문에 한 권이 팔릴 때마다 우리가 1000원 미만의 금액을 손해보는 구조였다.) 특별히 유통을 확장할 필요를 느낀 것도 아니었지만, ‘흠… 그런가? 해볼까’ 싶어졌다. 그때부터 이어진 문헌번호센터와의 지난한 대화.
“리플릿은 책이 될 수 없어요.”
“밀봉되어 담겨 있는 이상 다른 책들과 보관이 다를 바가 없는데요?”
“봉투가 없어지면요? 도서관에서 더스트재킷을 빼고 보관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런데 모든 책은 예외 없이 ISBN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ISBN 없는 책은 주민등록번호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긴 하죠?”
“게다가 저희는 출판사 신분으로, ‘이것’들을 서점에 유통하고 있는데요? 이게 책이 아니라면…”
…하는 식의.
그 뒤로 관리자의 재량에 따라 우리의 고안물은 (ISBN으로만 보자면) 책이 되었다가 책이 아니었다가 했다.
기성 출판의 시스템을 배워서 고스란히 출판하는 서당 개 출신의 내가 ‘독립 출판’이란 태그를 달게 된 것은 여러모로 설명하기 복잡하다. 순전히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가설만 여러 개로, 이에 관하여 궁금하다면 나중에 따로 나를 찾아주시길(서강대학교 맞은편에 작업실이 있답니다). 어쨌거나 나는 독립 출판 카테고리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그리고 그보다 많은 책을 만났다. 그중에는 ISBN보다 NO-ISBN이 많다. 지금 아니면 못 사는 책. 이 사람 아니면 안 만들 것 같은 책. 책 같지 않은 책. 가볍고 경쾌한 기분으로 집어 온 수많은 NO-ISBN들. 그들은 등록되지 않은 채, 우리 생태계를 떠돈다. 있었나? 사실은 없었나? 있다고 믿는 사람 손에만 쥐어지는 그런 책들은 중고 서점에 되팔 수도 없기에, 오히려 나의 책장을 그 어떤 공식적인 인사들보다 오래 차지한다. 어린 시절 처음 떠난 여행에서 버리지 못하고 들고 온 글자가 날아간 영수증과 티켓 들처럼. 전화번호와 성함이 제대로 저장되어 있지 않지만, 언젠가의 꿈에 나오는 여행지에서의 짧은 벗들처럼.
사설이 길었다.(하지만 아시죠? 이것은 연재 「만화절경」의 마지막 화이고, ‘마지막 인사’는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요.) 내 머리맡에 꽂혀 있는 몇 권의 NO-ISBN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 한다.

뫼비우스 콜렉션
란탄
“이 책을 펼쳤다면 당신은 나의 동료다.”라는 무서운 대시로 시작하는 이 책은, 내가 내고 싶다고 탐내던 책이고, 만약 내가 냈다면 ISBN을 등록했을 콘텐츠다. 나에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교정교열 항목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만화가 란탄의 ‘동료’임을, 펼칠 책을 인쇄하기도 전에 인증하는 데 성공했다. 이 책에는 동료를 구하는 어린 독립 만화가 ‘소심’의 모험이라고도 불릴 만한 아트북페어 경험이 담겨 있다. 2~3일 정도 되는 북페어에서 창작자이자 판매자로서 부스를 지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가혹하거나 가장 동기부여되는 창작 생활의 화양연화임을 재확인했다.

O.P.P
안유진
만화가 안유진의 모든 작품을 사랑한다. 그 작품에는 그전까지는 언어화되거나 시각화되지 않았던 내 과거의 감정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울적해지지만, 그것의 정체는 향수이고, 향수에는 어제가 아니라 오늘마저도 애틋하게 여기게 하는 마법적 힘이 있다. “언젠가부터 포장할 때 쓰이는 비닐 OPP라는 단어와 그 성질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가볍고 투명하고 빛을 받으면 반짝이고 무언가를 감싸주고, 구겨지고 바닥에 떨어지고 바람에 날아가 버리지만 사라지지는 않는 점이요.”라는 창작자이자 제작자의 설명처럼 얇고 투명하지만 어느 각도에서는 빛을 완강하게 거부하여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소녀 시절을 이 책은 보여준다.

행복고양이의 버킷리스트
김성한
나는 대사 없는 그림책이나 만화책을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다. 시끄러울 정도로 떠들어대는 1인칭 주인공 화자에게 매료되는 타입이지… 그러나 이 조용한 책은, 조용한 와중에도, 자기 안에 꽉꽉 들어차 있는, 그래서 가끔은 새어나가는 감정의 피크를 담고 있기에, 좋아한다. 이 책(초판 2021)의 개정판(2025, 개정판 역시 작가의 자가 출판이었는데) 작업을 돕는 과정에서 들은 작가의 한마디.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싶던 감정은 당연하게도 행복감입니다. 버킷리스트라는 복수의 항목을 보여주려던 이유도 한 가지로 특정할 수 없는 행복‘들’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트루매니아쇼
강마철
박력 있다. 그의 전작 『와플형 엉덩이』를 보고 생각했다. 정말 쓸데없는 상상에 정성을 들인 결과물이 만화라는 걸 오랜만에 일깨워준다. 그가 『트루매니아쇼』를 작업하고 있다고 예고했을 때, “그냥 무조건 잘될 거니까 아프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계속 그려요.”라고 주제넘게 응원하기도 했다. 주인공 연주의 이름을 뒤집으면 ‘주연’(주인공)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유일무이한 주연 연주. 만화가가 장래 희망이던 연주는 커서 그녀의 열혈 독자였던 미연을 재회하고, 미연은 줄 게 있다면서 연주의 만화 ‘노토’를 건네준다. 더는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님을 깨달아버린 연주에게 이 ‘노토’는 어떤 의미일까…! 노트의 오기라고 생각했는데, 회상 장면에서 한 번 더 나와서, 이거 긴장감에 발음이 잘못 나온 상황을 연출하려 했던 건가 싶기도 한데, 작가님, 진실은 어떤가요? (「트루매니아쇼」의 방백 흉내 내기.)

킵 더 스푼 클린
소즈소
처음엔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놀랐다! 그다음에는… 그림은 빙산의 일각이고, 현실감 있는 대사, 인물과의 대화 사이에 슥슥 들어가는 풍경이나 사물 컷의 자연스러운 연출 흐름,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짧잖아. 알차고 열심히 했는데, 더 읽고 싶어. 두 사랑스러운 룸메이트 소녀의 요리 및 식사 이야기를 담은 이 만화책의 표지에는 VOL. 01이라는 권번이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다. 내가 작가라면, 첫 권에 01 같은 표시는 하지 않을 텐데.(2를 내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나의 보험 성향을 비웃어주는 듯한 만화가의 패기. 2권 발간을 손꼽아 기다릴게요.

마따삐라따스
영제 만화 / 이정수 글
독특한 책이다. 표면적으로는 부패와 위기의 시대에 맞선 소규모 자경단의 의기를 그린다. 이면으로는…? 일단 “해적들이 가득한 바다에서 이어온 10년의 항해”라는 태그라인과 함께 뒤표지를 장식한 ‘비야게레로’는 삼성동에 있는 타코집이다. 식당 개업 10주년을 맞아 만화책을 출간했다는 이정수 사장님. 그가 물리쳐온, 혹은 동맹을 맺은 ‘해적들’은 누구였을까, 그런 이들이 득시글대는 ‘바다’는 대체 어떤 삶의 현장이었을까, 거기에서 항해를 이어온다는 것의 의미는? 두 자릿수라는 기간은? 내게 있어 그 어떤 식당보다 영웅적으로 보인, 한 자영업자의 자경 활동을 소개하고 싶다.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아
쿠로다
기획자 친구(박지호)의 소개로 보러 간 이 만화는 전시이자 책이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앞에 소개한 만화들보다도 이 만화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푸하하하프렌즈가 공간까지 북디자인 해버렸기 때문에 ‘숲’을 배경으로 한 만화는 걸으면서 읽게 설계돼 있다. 만화 속 숲은 무너지고 있다. 주인공 소녀가 아는 만큼 숲에는 균열이 생기고, 이미 존재하는 세계는 무너지며 형태를 바꾼다. 그러고 보면 무너지기로 마음먹은 숲은 꼭 전시장 같지 않은가. 모든 전시 공간은 지나치게 한시적이다. 그 안을 더듬고 탐구했던 우리 모두의 기억만은 세포 어딘가에 남기를. 이렇게 바라게 하는 힘 역시 이렇듯 ‘한시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NO-ISBN은, 그러니까 우리만 잊지 않는다면 BE-ISBN일 수도 있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 고마웠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미래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2010년 문학교과서 만드는 일로 경력을 시작했고, 해외문학 전집을 꾸리는 팀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총서를 기획해 선보였다. 책을 둘러싼 색다른 환경을 탐험하고 싶어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의 출판 분야에서 매니저로 지냈고, 현재 다양한 교실에서 글쓰기와 출판을 가르친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사 아닌 곳에서도 교정·교열을 본다. 편집자는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재료를 모아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다만 방침을 만들고 따르는 일에 힘쓰면서도, 방침으로 포섭되지 않는 것의 생명력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직접 레이블(쪽프레스)을 만들어 한 쪽도 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낱장책을 소개한 것도, 스펙트럼오브젝트에 소속되어 창작 활동을 지속해 온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창작자, 기획자, 교육자 등 복수의 정체성을 경유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편집이므로 스스로를 한 우물 파는 사람이라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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