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시시하고 평범할지라도, 오직 그녀 자신만의 것인 삶 | 예스24
분명 그것만은 아니었다고, 거기엔 더 많은 것이 있었다고 얼굴을 붉히며 말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정확히 설명하긴 어려워 자꾸 말을 흐리게 될 때, 나는 앞으로 『오직 그녀의 것』을 읽자고 말할 것이다.
글: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2026.01.21
작게
크게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저 | 문학동네

 

사무실에 출근한 지 한 달쯤 지난 무렵이었을까부장이 자리로 불러 ‘한 달간의 출근 소회를 써서 집배신에 올려보라고 했다그때 나는 혼자 소설 쓰던 일을 그만두고 앞으로 뭘 하며 살지 고민하다 신문사 인턴기자에 지원한 스물여섯 살이었다기자들의 기사가 송고돼 있는 집배신을 한참 새로고침한 끝에한 달간 목격한 사람들과 그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썼다삶의 작은 때가 묻어있으면서도 동시에 불합리에 대한 울분이 남아있는 사람들매일 정갈하고 정확한 글쓰기를 노동으로 해내는 사람들에 대해

 

그날 저녁 다 같이 회사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선배가 내게 물었다. “너 좋은 글이 뭐라고 생각해?” 눈만 굴리고 있는 나를 대신해 선배는 말했다. “좋은 글은월급 받은 티가 팍팍 나는 글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 되는 글은 못써도 ‘돈 받는 값 하는 글은 쓸 수 있을 거 같았다그게 이 일의 긍지겠구나어렴풋이 짐작했다선배는 삼겹살을 뒤집으며 덧붙였다. “좋은 글 써너 글 좀 쓸 줄 아는 거 같더라.”

 

그렇게 시작된 일이었다그 당부가 이후 내가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마다 어떤 닻이 되어 주었는지선배는 아마 모를 것이다그 뒤로 내가 어떤 기대와 좌절을 오갔는지 여기서 구구절절 털어놓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일이란 건 그냥 돈을 버는 수단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해버리고 싶은 날들도 숱했고때론 가혹한 일의 속성을 과하게 낭만화하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분명 그것만은 아니었다고거기엔 더 많은 것이 있었다고 얼굴을 붉히며 말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하지만 그 ‘무엇을 정확히 설명하긴 어려워 자꾸 말을 흐리게 될 때나는 앞으로 김혜진의 소설 『오직 그녀의 것』을 읽자고 말할 것이다그러면 우리가 일로부터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되어갔는지다 알지 못하면서도 이해하는 순간을 나눠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어떻게 그 모든 일은 시작되었을까되짚어보면 떠오르는 선명한 장면들 덕에 삶이란 종종 운명의 예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홍석주의 경우 그것은 책의 형태로 찾아왔다소도시 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내성적이고 운명에 순종적이던 그녀가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고 소설 창작 수업을 듣게 된 일은 마치 “석주가 책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책이 그녀를 선택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첫 합평을 마친 뒤 “쌀쌀한 겨울의 정오 속에서 꺼지지 않는 어떤 강력한 온기를 손에 쥔 사람이 된 석주는 교사가 되길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거스르며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고민해 보고 싶어요라고 조심스레 고백한다그렇게 스물네 살의 석주가 발을 들인 1990년대 출판계는 책이 여전히 ‘활판인쇄로 제작되던 시절이다타자기와 컴퓨터가 혼용되던 때, ‘교한서가에 교열자로 입사한 석주는 그곳에서 책의 표지와 날개차례와 목차 등에 오탈자와 오식이 없는지 살피는 일을 맡게 된다.  

 

모든 초보자는 서투르다그러나 자신의 서투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일과 맺는 관계는 달라진다단조로운 업무 속에서도 석주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자신의 노동이 최종적으로 가닿는 곳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 밤마다 홀로 자료실에 남는다그러던 어느 날 책과 일을 대하는 석주의 정성스러운 태도를 지켜본 사수 오기서가 그녀에게 편집부로 옮겨갈 것을 제안하면서 석주는 편집자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석주를 키워낸 것은 일 그 자체이기도 했지만교열부의 오기서와 편집부의 장민재 같은 선배와 동료들이기도 했다석주의 역량이 “그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을 때부터 그 가능성을 알아봐 준 사람들. “책을 좋아합니까?”라고 진지하게 묻고거듭 기회를 주며 기다려준 이들의 그늘 아래에서 석주는 차차 성장해 간다

 

여기에 연인 원호의 존재는 이야기에 사랑이라는 도톰한 양감을 더한다사진작가를 꿈꾸다 잡지 편집자가 된 원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절히 물러설 줄 아는 유연함을 지닌 사람이다두 사람은 함께 도심을 걷고 또 걸으며 서로의 미래를 포개어 본다원호는 “석주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었석주는 “그 활기가 느슨함으로방만함으로 번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으며 일과 사랑이 주는 충만함을 모두 누린다

 

소설은 “오래 기억에 남는……그러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우움직이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더듬거리며 말하던 새내기 편집자가, 30여 년의 세월을 통과하며 차차 자기 일의 숙련공이 되어가는 과정을 차분히 따라간다첫 직장을 떠나 새 일터에 적응하고실수하고만회하고때로는 모욕을 견디면서도 크고 작은 성취를 쌓아가는 시간들이다.

 

존경하던 이의 죽음과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포함해 삶이 요구하는 기쁨과 슬픔을 지나오면서도석주는 멈추지 않는다. “여기 있는 것보다야 교단에 서는 게 훨씬 나을 텐데여자한테는 최고 직업 아닌가” 같은 말 따위는 더 이상 일말의 흠집도 내지 못할 만큼석주는 그렇게 편집자라는 직업을 자기 몸에 맞게 길들여 나간다

 

1990년대 초 교열자로 출판 생활을 시작해 일생을 문학 편집자로 살아간 한 여성의 삶범박하게 요약하자면 이 정도의 이야기일지 모른다그런데도 『오직 그녀의 것』은 왜 이토록이나 선명한 감동을 남기는 것일까그건 아마도 석주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헌신했으며그 마음에 책임을 다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열정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일깨우고 유지하는 의지라는” 깨달음을 거의 전 생애에 걸쳐 실천해 온 삶누구도 훼손할 수 없고 앗아갈 수 없는오직 그녀의 것일.

 

그날석주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대단할 것도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 (263~264)

 

*

 

오랫동안 하나의 업에 종사하는 것은 때로 시시한 사람이라는 증명처럼 여겨진다. ‘파이어족이라든가 ‘경제적 자유’ 같은 멋들어진 말 앞에서묵묵히 지속하는 일의 숭고함을 결연한 표정으로 외치는 건 어쩐지 좀 멋쩍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말할 수 있다나 역시 보았기 때문이다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 무엇이 축적되는지거기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그 빛을 잠시라도 마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에서도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떨림과 설렘서투름과 투박함선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마음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도그만둘 수도 없는백지와 같은 자신의 삶에 높이와 깊이를 만들고 명암을 부여한 바로 그것”(271).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Writer Avatar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199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문학과 영상학을 전공했다. 발표된 적 없는 소설과 상영되지 않은 영화를 쓰고 만들었다. 2016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