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이 시가 무엇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지 | 예스24
여행과 방황의 오솔길을 뚫고, 헤치며 온 세 편의 시집.
글: 서윤후
202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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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잘 읽히지 않을 땐 시집에 적힌 동사들을 중심으로 읽는다. 그러면 시가 펄떡이기 시작한다. ‘간다, 도착한다, 시작한다, 말한다, 눕는다, 태어난다, 사라진다, 흩어진다, 쏟아진다……’ 연필로 동사 부분에 희미한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이 시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또 어떻게 나에게로 내리는지를 본다. 새해가 되어 움직임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집에 있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사주에는 역마살이 있다고 한다. 움직일수록 좋아진다고 한다. 삶이. 그래서 집과 먼 곳에 있을 때면 나는 돌아갈 곳을 생각하며 부유한다. 돌아가 조금 더 잘 살고 싶어지는 순간을 만날 땐 여행이 되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도 좋겠다 싶은 순간엔 방황이 된다. 여행과 방황의 오솔길로 우거진 시집을 펼치면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 무수한 빙벽을 뚫고, 화마를 죽이고, 맨몸으로 풀숲을 헤치며 온 시들을 읽으면 특히나 그렇다. 이 시들과 함께 간다는 기분을 간직한다면, 이 시가 당신에게 어떤 단 하나의 ‘동사’를 선사한다면 우리는 시를 읽는 동안에도 움직일 수 있다. 움직이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트렁크』

김언희 저 | 문학동네


 

보여주마

얼음답게, 몸속을

드나드는 톱날들을 환히

보게 해주마

물이 되는 살의 공포, 나를

썰음질하는 실물의

톱니들을

만지게 해주마……… 얼음

톱밥, 물이 되는

시간의

닭살들을

(「얼음여자」의 부분, 『트렁크』 38쪽)

 

김언희 시인의 첫 시집 첫 시는 표제작 「트렁크」다. “지퍼를 열면/ 뭄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 엽기적인 트렁크를 들여다본다. 이 시로부터 시인이 지금껏 끊임없이 움직여 왔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몸이 되어, 기꺼이 자신의 몸을 해체하고 까발리면서. 많은 말을 함구하고 있던 몸의 언어는, 시인을 통해 활활 타오른다. 그 뜨거움을 ‘얼음’이라는 양식으로 다시 쓰는 시 「얼음여자」는 벼랑과 난간으로 난무한 세계에 막 발을 들이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훤히 드러내어 감출 것 없이 살이 에는 고통을 “만지게 해주마”하고 약속하는 시. 이 시집을 펼치면 비린내를 가득 품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사지, 시체, 배때기, 육신, 살가죽…… 끌고 다니던 트렁크가 터지면서 쏟아지는 말들. 시인의 시들이 나의 악취를 비추는데 그것이 꽤 즐겁다.



『단 하나의 눈송이』

사이토 마리코 저 | 봄날의책

 

바다를 건너가는 떼로부터

뒤처져버린 새 한 마리는

따라붙을 수 있으리라 믿고 날아가면서

어느새 바다 그 자체가 될 것이다

 

하루가 작은 새 한 마리라면

나는 그 긴 홰이고 싶다

(「난류」의 전문, 『단 하나의 눈송이』 36쪽)

 

고요하고 단단하게 내려앉는 사이토 마리코의 시는 일본인에게 외국어인 한국어로 쓴 시라는 점에서 묘한 시차를 만들기도 한다. 당연하지 않은 말들의 꾹꾹 눌러씀이 느껴지는 문장들을 따라 읽으면 하나의 거대한 능선을 그리고 온 기분이 든다. 너무 성급하게 앞질러 가고 있다는 생각도, 뒤처져 있다는 생각도 움직이는 사람이 갖게 되는 속도에 대한 숙명일 것이다. “어느새 바다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뒤쳐진 새 한 마리가 ‘하루’를 세어보는 단위라면 시인은 “긴 홰”가 되겠다고 고백한다. 시간이 발톱을 세워 내딛고 서 있는 곳이면서도, 끝내 그곳에만 서 있을 수 없어 떠나야만 하는 곳. 시인은 그 숙명을 일찌감치 받아들이고는 출발하는 날들과 도착하지 않는 날들을 함께 지켜보고 있다. 새해에는 매끈하고 흉터 하나 없는 긴 홰를 마음에 박고, 날아들 시간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문턱 너머 저편』

에이드리언 리치 저 | 문학과지성사


우린, 난, 넌

소심해서 혹은 용감해서

여기에 다시 돌아오는 길을

찾는 사람이다,

칼 한 자루, 카메라 한 대,

우리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신화에 대한 책 한 권을 가지고.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의 부분, 『문턱 너머 저편』 217쪽)

 

에이드리언 리치만큼 세상에 세워진 무수한 벽을 박살내며 온 시인이 또 있을까. 그의 시는 무너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회오리처럼 그 무너뜨린 잔해들과 함께 오간다. “우린, 난, 넌”이라고 반복하여 너와 나를 호명하는 ‘우리’는 함께하는 감각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을 찾는 사람”이 된다. 그것은 삶의 모험을 염두에 둔 이야기일 것이다. 돌아오기 전까지 우리는 무엇을 볼까, 무엇을 말할까, 무엇과 싸울까. 거기에는 방향이 있다. 우린 “반쯤 망가진 도구”이자 “고장 난 나침판”이지만, 우리가 함께 찾는 사람이 될 때 서로의 방향이 되어줄 수 있다. 그리고 주어진 이 시간을 “더 영원한 어떤 것의/ 측면을 따라 천천히” 가보고 싶어진다.

 

삶의 어떤 시간에 맞춰 새롭게 다지는 각오는, 이미 한 번 끝난 일들이기도 하다. 언젠가 멈췄던 것이고 그만둔 것이기도 하며 내 안에서 종료된 불균형한 감각의 기지개다. 시는 이 모든 것을 조형하면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놀랍게도 시 한 편이 복잡한 마음의 뒤엉킴을 읽어줄 때도 있다. 모두 자신의 무언가를 뚫고 찢으며 온 시들이기 때문이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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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미의관심사

2026.01.13

오.. 시태기(?)를 극복할 방법까지! 구할길이 없는 리치 시집도 꼭 읽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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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숲예구자

2026.01.13

제가 갖고 있는 두 시집이 나와서 기쁜 마음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지난 해를 뚫고 나오는 올해의 첫 시집으로 추천해주신 나머지 책도 읽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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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언희>

출판사 | 문학동네

단 하나의 눈송이

<사이토 마리코>

출판사 |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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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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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리치

1929년 5월 16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19세기 영국 대표 시인들의 시를 즐겨 읽은 리치는 후일 하버드 대학교로 통합되는 레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시를 썼고, 졸업하던 해인 1951년에 첫 작품집 『세상의 변화』로 예일 대학교에서 수여하는 ‘젊은 시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왕성한 활동력으로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적 본질을 드러내고, 미국 사회에 만연한 물질만능주의를 고발하는 시를 꾸준히 발표해왔다. 리치는 세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결혼 생활 과정에서 레즈비언인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1968년 이후부터 이제껏 여성다운 삶으로 찬양받았던 것들을 재고하여 해체하기 시작한다. 『변화에의 의지』,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문턱 너머 저편』 등 리치의 작품에서 여성의식 및 페미니즘은 일관된 주요 주제였다. 리치의 대표작 중 하나인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은 방언처럼 흩어진 여성의 언어를 공통 언어로 변화하여, 그 연대의 힘으로 삶의 변화를 가져오기 바라는 리치의 열망이 정제된 수작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아픔을 치유하며, 공동 언어와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리치는 진정으로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변해주는 시인이다. 전미도서협회상, 전미시인협회상, 래넌 재단 평생공로상, 예일 청년시인상, 리즐리 토런스 기념상, 코먼웰스 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시집으로는 『며느리의 스냅사진들』,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공동 언어를 향한 소망』, 『당신의 조국, 당신의 삶』, 『난세의 지도』, 『미드나이트 샐비지』, 『여우』, 『미로에서 울리는 전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