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인 오스틴 탄생 250주년이었던 2025년, 작가의 생일인 12월 16일에 꼭 맞춰 그의 초기 소설인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이 새롭게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메리 셸리, 수전 손택, 토니 모리슨, 비비언 고닉, 실비아 플라스, 매기 넬슨 등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세계인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해온 김선형 번역가의 작업입니다. 번역가는 두 책과 함께 『디어 제인 오스틴』이라는 에세이를 함께 내놓았는데요. 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에세이에서 번역가는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의 탁월한 위치를 정확하게 조명하는 동시에 고전문학을 번역하는 일이 어떤 구체적인 고민의 과정을 거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경험하고 이해하며 느끼고(sensible), 출발어와 도착어의 환경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sensible), 언어의 강을 건너온 작품이 독자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짐작하는(sensible) 일. 그런 경험을 기꺼이 하면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다가서는 일.”(50쪽)은 그 자체로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요.
무엇보다 새로이 번역되어야 하는 이유로 김선형 번역가는 『디어 제인 오스틴』에 실은 참고문헌을 가리키며 “그 사이의 연구를 반영하”는 번역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말을 듣고 살펴보니 2000년대 이후 발표된 비평적 연구 자료가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제인 오스틴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경어체로 번역한 번역가의 선택은 작품을 읽는 즉시 설득이 될 겁니다. 제인 오스틴 새 번역 작업은 1년 뒤 『맨스필드 파크』와 『에마』로, 2년 뒤 『노생거 애비』와 『설득』으로 이어질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한 작가의 작품을 한 명의 번역가가 번역한 덕분에 발견되는 것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경어체여야만 했던 이유
제인 오스틴의 초기 작품인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을 새로 번역하고 그에 관한 에세이 『디어 제인 오스틴』을 출간하기까지의 과정을 “비평이자 고백이자 번역”(65쪽)이었다고 쓰셨어요.
다양한 세계문학이 번역되어 있죠. 그 가운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정말 다양한 번역본이 있어요. 그러니 왜 새로 번역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확실한 이유를 주는 번역본을 내놓고 싶었어요. 세계문학은 인공지능 번역에 가장 취약한 것 같거든요. 저작권이 없으니까요. 때문에 더욱 ‘문학 번역을 왜 사람이 해야 되는가’ 생각하죠. 이에 관해 총론으로 볼 수 있는 홍한별 번역가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라는 아주 좋은 책이 있고요. 저는 이 책으로 각론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문학 번역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사고의 과정은 제가 30년 동안 번역했던 모든 책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지만요. 『디어 제인 오스틴』에서 그 과정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어요.
“제인 오스틴의 ‘톤’을 꼭 한번 제 문장으로 포착하고 싶었”(9쪽)다고도 하셨죠. 실제로 이번에 새로 번역하신 두 작품은 경어체로 쓰였는데요.
경어체로 쓴 것은 그 목소리여야만 작동하는 층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문학 번역의 디테일에 관하여: 세 개의 장면’라는 챕터를 쓰기도 했어요. 어째서 젊은 소설가가 소설이라는, 당시 아주 젊은 양식을 선택했는지를 생각해야 해요. 젊은 양식이었다는 것은 거기에 기존의 선입견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죠. 이 작품들이 18세기의 고전이고, 위대한 문학이라는 선입견을 빼고 볼 필요가 있어요. 어떤 작가가 완전히 새로운 경지의 장르를 탐험하려고 나섰을 때, 이야기꾼으로서 선택한 목소리를 저는 편지글의 목소리와 거의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투여야 했고요.
특히 초기 작품인 이 두 작품이 그랬다는 것이죠?
맞아요, 그런 면에서 중반 이후의 작품에 경어체를 선택한다는 것은 미친 짓일 거예요. 아무리 읽어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거든요. 그 즈음이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소설가의 목소리가 나오고요. 훨씬 아이러니하고 진지한 목소리가 되고, 사유가 복잡해져요. 『맨스필드 파크』와 『에마』는 더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무엇보다 윤리에 대해 굉장히 투철한 소설들이죠. 놀라운 것은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서른 살에 재고할 때 그 목소리를 고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전혀 다른 목소리, 전혀 다른 장르의 작품들이 거의 1-2년 사이에 출간이 되었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젊은 여자의 목소리라 해서 고전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인지적 편향인 것이죠.
또한 저는 문체가 곧 문학이라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학성의 감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저한테는 “펨벌리로, 그러니까, 가는 거예요.”(『오만과 편견』 2부 19장) 이렇게 막이 딱 끝나는 것이 문학성이거든요. 뉘앙스와 디테일이 문학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번역해서 지키려고 노력해요. 번역가에게 그것을 읽고 느끼고 지키는 마음이 있다는 걸 기록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중반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아무래도 그 소리가 안 들린다는 말씀에 귀를 번쩍 뜨게 되네요.
초기 작품에는 묘사나 판단, 긴 서술이 전혀 없어요. 『이성과 감성』도 이야기의 중반쯤이 되면 엘리너의 목소리와 화자의 목소리 사이의 거리가 거의 없어지는 지점들이 생겨요. 그 지점은 이 여성들에게 내면이 생길 때거든요. 외로운 개인이 될 때부터 점점 서술자와 인물의 간격이 줄어요. 화자와 인물, 어느 쪽인지 몰라야 하는 모호성이 이 소설의 아주 중요한 포인트죠. 그러려면 처음부터 경어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 제인 오스틴의 초기 작품에는 누구는 이런 사람이다, 하는 식의 일반화된 서술이 없고 두 작품 모두 엄청나게 구체적인 얘기들만 한다는 거고요. 그것이 다 사람에 대한 얘기들인데, 그 톤이 구어체로 저는 들려요. 경어체라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소설이 쉽게 읽히라고 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덕분에 독자 역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았던 것들을 붙잡을 수 있게 될 거예요. 새로운 번역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고요. 그렇기 때문에 ‘단어 대 단어’라는 번역의 기술을 포기해야 했다고도 하셨나봐요.
포기해야만 한다, 생각해요. 언제나 문학 번역에서는 단어 대 단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어요.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의 내면이 쫙 펼쳐지는 부분이 그래요. 다아시와 헤어진 후에 집안이 리디아 문제로 너무 정신이 없을 시기가 있거든요. 이때 엘리자베스는 자기의 연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요. 저는 그 점도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자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막 버린다는 이야기는 남자 소설가들이 쓴 여자고요.(웃음) 여기서 엘리자베스는 사랑을 잃어서 아쉽다고는 생각하지만 지금 이 문제가 중요하니까 일단 연애 생각을 치워둬요. 그러다 리디아가 결혼을 한다고 하고, 부모가 관련한 문제로 막 싸우죠. 바깥의 소음인데요. 그때 무언가 ‘됐다’ 싶은 생각이 드니까 내면이 밀려 들어오는 순간이 있어요. 바깥이 막 시끄러운 와중에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확 들어가는 순간 말이에요.
이런 문장을 보세요. “엘리자베스는 겸손해졌고, 깊은 상실감이 슬퍼졌어요. 후회가 되었어요. 정확히 무엇이 후회되는지 모르면서도 후회했어요.”(『오만과 편견』, 502쪽) 다음에 “몸이 달았어요, (중략) 되어버렸는데. (중략) 듣고 싶었어요.(중략) 막혀버린 것만 같은데.” 하는 식으로 내면이라고 생각되는 ‘문체’가 생겨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뭐 했기 때문에 후회됐어요, 뭐 했기 때문에 애가 탔어요, 하고 번역하면 완전히 효과가 달라지잖아요. 이 부분이 저는 되게 엘리자베스 같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서술자와 엘리자베스가 거의 구분돼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번역했어요. 저는 이것이 문학성 같아요.

인류의 유산인 고전문학
이 작품을 이 톤으로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품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요, 다시 읽으면서 여러 방향을 타진했는데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린 거였어요. 왜냐하면 600페이지를 다 경어체로 한다는 건 엄청난 모험이기 때문이에요. 유치하게 느껴지거나 동화처럼 읽힐 수 있거든요. 그럼에도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다른 소설이나 에세이를 많이 번역했어도 경어체를 선택한 적은 없어요. 어느 쪽도 그냥 결정한다고 되는 게 아닌 거예요. 예를 들어 『시체들을 끌어내라』 속 크롬웰의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야 하고요. 매기 넬슨은 또 완전히 달라야 하죠. 문체가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것을 번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오래 생각해왔죠. 각 작품 속 화자의 목소리들을 번역해야 한다고요.
작품마다 고유한 목소리를 찾아내다니, 번역가로서의 고민이 무겁게 들리는 말씀이에요.
거기에 더해 동시대에 우리 문학의 문체가 달라지면 번역의 문체도 달라져야 한다고도 생각하거든요. 언어의 지형이 엄청나게 달라졌으니까요. 한국문학의 문학적 언어라고 인식되는 지형도 또 달라져야 하는 거예요.
“고전의 번역본은 클래식 음악 연주처럼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습니다.”(11쪽)라고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새 번역의 필요를 말할 때, 문체의 변화를 비롯한 지금 독자의 변화라는 점 역시 중요한 이유가 될 테고요.
현대문학은 사실 변주가 가능하지 않은 부분도 많은 것 같아요. 지금 아무도 베토벤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소설이 창생하던 위대한 시대는 지나갔다는 점에서도 클래식의 재연주가 중요해지는 건데요. 제 생각에 인공지능이 파괴하는 가장 큰 부분이 ‘빌둥(Bildung)’이라는 인간성 같거든요. 때문에 그런 작가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 질문해보게 돼요. 그러니 적어도 고전문학 번역은 인공지능한테 맡겨서는 안 되는 일 같아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인류의 유산이니까요. 그 맥락에서 문학성이 무엇인가를 정말 많이 고민했죠.
『애도하는 음악』이라는 책에서 작가는 2차 대전 당시 클래식 음악가들이 그것을 어떻게 애도했는지, 어떻게 그 자체가 기념비가 되었는지 얘기해요. 그러면서 자신이 이런 책을 쓰는 이유를 깊은 청취로만 클래식의 길이 열리는데, 그 깊은 청취라는 기술이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들어 말하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에게 텍스트를 읽고, 관련된 비평서를 읽는 건 너무 당연한 독서였어요. 그후에 읽은 것을 또 읽고 또 읽는 것도 당연했고요. 그렇게만 느낄 수 있는 읽기의 경지가 있으니까요. 그걸 『디어 제인 오스틴』을 통해 대학교 교양 수업 차원으로나마 독자가 느끼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해설도 수업을 하듯 썼고요. 그렇게 엮어서 읽는 경험을 한 번 하면 다음부터는 ‘깊이’ 읽는다는 것을 알게 되겠죠.
제인 오스틴 작품의 탁월한 면들 중,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이해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인간 심리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지금도 전혀 낡지 않게 읽히는 면이 있고요. 나아가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는 점까지 만나게 되면 작품을 너무나 풍성하게 읽게 되잖아요.
그 점에서 제가 느끼는 제인 오스틴의 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이성과 감성』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는데요. 레이디 미들턴이 풍자를 얘기하면서 그건 좀 삐딱한 사람들이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부분이 있어요. 보면 하나도 안 변했잖아요. 여자들의 어떤 영역에 지성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반 조건은 여전히 똑같은데요. 그에 대해서 제인 오스틴은 쓴소리를 끊지 않았어요. 자기의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그 말을 하는 게 너무 대단해요. 남자처럼 굴지 않고 말이에요.
“『이성과 감성』과 『오만과 편견』은 흡사 울스턴크래프트에 대한 서사적 화답 같은 작품”(45쪽)이라고도 하셨죠.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에 영향을 분명히 받았을 거라고요.
이 해석은 여전히 래디컬한 해석인데요. 어떤 인지적 편향 없이 이 작품들을 읽으면 reason(이성)이나 feeling(감성)이 아니라 sense나 sensibility라는 단어를 그냥 선택했을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돼요. 분명히 그 부분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죠. 제인 오스틴의 오빠들 역시 워낙 래디컬한 자유주의자들이었잖아요. 집안의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분위기였을 텐데요. 19세기 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태인들이 빌둥을 믿으며 총력을 기울여 교양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 그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듯, 영국에서는 중산층들이 빌둥을 믿으며 젠틀맨이 되고자 했던 노력이 그 시대 영국의 문화를 끌고 갔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위기 안에 있던 가족이라면 돈 말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나 하는 점은 중요한 문제였겠죠. 그런 의미에서 그 시대와 현재의 우리 사이에 아주 중요한 접점이 있는 것이고요.
거기에 더해 여성성이라든가 결혼이라는 제도 같은, 전반적으로 팽배한 반지성주의가 우리 인생을 얼마나 편협하고 납작하게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 역시 중요한 접점인데요. 무엇보다 제인 오스틴은 좀 너그럽게 보는 마음이 있거든요. 사람을 똑바로 보는 힘, 복잡하게 보는 시선 말이에요. 그것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람들의 불완전함에 관한 얘기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서로가 완전하기를 원하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인간성이야말로 우리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이고요. 제인 오스틴이 그걸 보여줘요.

컨텍스트에서 의미를 만드는 일
한 작가의 전작을 한 명의 번역가가 하는 작업은 굉장히 큰 작업이고, 드문 작업이기도 한 것 같거든요. 이 작업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사실 이런 식으로 한 번역가가 매달리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아요. 직업이니까요. 이 두 권만 해도 그에 대한 책을 수십 권은 읽거든요. 그렇게 시간을 투입하면서 번역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또 영문학 배경이 없는 번역가라면 비평까지 읽을 이유를 못 느끼실 수도 있고요. 저는 약간 중간적 입장이어서 가능했어요. 늘 하고 싶었던 것이 영문학을 좋아하게 만드는 거였고, 그래서 번역을 할 때마다 늘 답답했거든요. 사고의 투입량이 너무 많으니까 이렇게 하는 일이 맞나, 싶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번역가로서, 하청업자가 아니라 담론의 생산자로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요. 번역가 후배들을 위해서도 각론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어떤 선택을 어떤 이유로 하는지 짧게나마 보여주고 싶었죠.
에필로그에서 “번역가가 축자적 정합성이라는 ‘기능적’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면, 제가 아무리 숨어도 사라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데 연원하는 고유성이야말로 우리의 작업을 한없이 인간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만들어줍니다.”(283쪽)고 쓰시면서 AI 시대에 번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어요. 문학으로서의 번역, 예술로서의 번역을 말씀하신 것이 참 좋더라고요.
그것 말고는 존재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해 몇 년 내로 기능적인 면에서는 AI와 경쟁이 안 될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도 그렇죠. 출판사도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따라서 번역가도 담론 생산자로 나서지 않으면 직업으로서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요. 필경사가 그렇듯 번역가는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번역만큼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 있는 직업은 없는 것 같아요. 번역가는 정말 희생적인 직업이고, 정말 사랑해서 하는 일이거든요. 그런 면에서도 번역가 스스로 아주 치열하게 문학성을 고민해야 해요. 거기서 다양성이 나와요. 다양성이 필요하지 않으면 AI가 다 쓰면 되겠죠. 스토리가 문학이라고 생각하면 도저히 AI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어요. 그러나 AI와 달리 인간의 존재는 뾰족뾰족하고 노이즈가 있어요. 그게 되어야죠. 바이어스가 돼야 해요.
AI 시대를 앞에 두고, 인간은 노이즈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어느 자리에서나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노이즈와 바이어스를 없애는 게 AI거든요. 그래서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중간 지대를 만들잖아요. 문학은 그것에 절대로 도움 줘서는 안 돼요. 그러니 고전 문학을 지켜야죠. 물론 21세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나올 것 같았지만 다른 종류의 문화들이 생겼어요. 락이나 팝, 블루스 같은 것이 후에 다 보존이 되겠죠. 다만 저는 이 형태의 소설을 만든 인간에 대한 낙관이 있어요. 그게 저는 우리 시대에 위로가 많이 되는 것 같거든요. 르네상스가 가져온 것이고, 19세기 혁명기가 가져온 것이 돈이나 신분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고요. 지금, 산업 재해에 대한 무감각 같은 것이 전부 그러한 근대적 개인에 대한 낙관의 종말이잖아요. 그것을 각각의 사례마다 싸우는 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각자 지킬 수 있는 걸 지키는 건데요. 제가 지킬 수 있는 거는 이런 것 같아요. 저는 이걸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이걸 알아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을 담아 완성했고, 이어 『맨스필드 파크』와 『에마』, 『노생거 애비』와 『설득』까지 완성할 새 번역을 독자가 어떻게 읽어주면 좋을까요?
일단 정말 재미있다고 느끼시면 좋겠어요. 이차적으로는, 해설을 읽으니까 더 분명해지는 부분이 있다는 앎의 발견인데요. 당시의 예법 같은 것이 스토리에 관여하는 부분이 되게 많아요. 그걸 발견하시면 좋겠고요. 또 『디어 제인 오스틴』과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을 마음껏 엮어서 읽는 경험을 하시면 좋겠어요. 책은 관련 있는 주제로 책탑을 쌓아가는 게 되게 중요하거든요. 지금 진짜 중요한 것은 컨텍스트에서 의미를 만드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원전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게 되게 중요하죠. 그 원전이 왜 좋은가를 알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적어도 이 세트 안에서는 엮어서 읽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그러면 이후에 『맨스필드 파크』와 『에마』까지 엮어서 볼 수 있고요. 더 나아가 『노생거 애비』와 『설득』까지 다 엮어서 볼 수 있어요. 그러면 독자가 제인 오스틴을 스스로 알 수 있게 되는 거죠.
어쩌면 그러다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볼 생각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게 우리가 잃어버린 독서 경험 같아요. 그건 순전히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그 무용함이 진짜 중요하거든요. 제일 인간다운 일 같기도 하고요. 앎과 재미는 그렇게 다르지 않아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신연선
읽고 씁니다. 장편소설 『구름이 겹치면』, 에세이 『하필 책이 좋아서』(공저)를 출간했습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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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힘
2026.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