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선명한
[작지만 선명한] 단어 사이로 강처럼 흐르는 이야기, 화이트 리버 출판사의 책 | 예스24
작은 출판사의 책을 소개하는 큐레이션 시리즈 '작지만 선명한'. 여백과 각주로 목소리를 더하는 '화이트 리버'의 책을 소개합니다.
글: 남선미
202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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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화이트 리버’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단숨에 출판사 이름을 화이트 리버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이트 리버(White River)는 타이포그래피 용어에서 빌려온 말로, 양끝맞춤으로 정렬된 텍스트에서 단어 사이사이 공백이 수직으로 이어져 흰 강처럼 페이지 아래로 흐르는 현상을 뜻합니다. 디자이너가 조판 시 지양해야 할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양끝맞춤된 텍스트에서 단어 사이의 공백이 세로로 벙벙하게 흐르는 강줄기를 볼 때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곧장 그 공백 사이로, 세로로 흐르는 수로를 따라 뛰어들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기다리던, 아직 만나지 못했던 텍스트를 향한 염원이자 누군가 제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소망이 깃든 수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2022년, 출판사를 등록했고 좋아하는 작업자들의 책을 ISBN이 있거나 없는 방식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디자인을 할 수 있으니, 그 벙벙한 강줄기 사이로 제가 만나고 싶었던 이야기를 ‘화이트 리버’란 이름으로 흐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수로로 흘려보낸 책 중 하나가 공연기획자 손성연 님의 『미친존재감: 사라졌던 미친 공간이 돌아왔다』였고, 또 하나가 강하늘 작가의 희곡 『러빙 시어터』였습니다. 모든 책이 그렇듯, 이 두 권은 나란히 두고 볼 때 더 강렬하게 마음을 흔듭니다.


 

강하늘 작가의 『러빙 시어터』는 ‘희곡’이나 무대를 전제로 쓰인다는 점에서 벗어나, 책이라는 매체 안에서 독립적으로 작동하도록 구성된 작업입니다. ‘시내’라는 아이가 겪는 유년기의 통증을 타이포그래피에서 말하는 ‘화이트 리버’처럼 단어와 단어 사이, 소리와 소리 사이의 여백으로 독자가 감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책의 쪽번호는 강하늘 작가의 손글씨로 배치했고, 행갈이부터 단어의 끊김까지 한 목소리에 담긴 호흡 하나까지 지면에 담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러빙 시어터』는 유독 여백이 많은 책입니다.

 

손성연 작가의 『미친존재감』은 정신의학 바깥에서 진단과 비진단을 오가며 살아온 한 사람이 ‘연극’을 매개로 스스로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 담긴 기록집입니다. 강하늘 작가가 유년기의 내밀한 목소리를 여백으로 표현했다면, 손성연 작가의 글은 단단하게 짜인 본문 속에서 각주로, 문장과 문장 사이로, 여백과 여백 사이로 목소리를 흩뿌립니다. 『러빙 시어터』가 여백으로 목소리를 더한다면, 『미친존재감』은 각주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강하늘 작가와 손성연 작가의 글은 제게 ‘여백’과 ‘공백’ 그 자체를 다루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작업을 다룰 때 내용뿐 아니라 디자인 또한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화이트 리버’란 단어의 뜻을 처음 알았을 때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에 퐁당 몸을 맡겨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책을 읽을 때 마음 속으로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소리가 있습니다. 글을 읽는 내 안의 나의 목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는 남에게 들리지 않기에 은밀하고 내밀합니다. 우리는 읽을 때 동시에 듣고, 그래서 읽기는 듣기이며 듣기는 읽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러빙 시어터』와 『미친존재감』 옆에 ‘듣기’에 관한 책이 나란히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출판사 인공위성82에서 출간한 남연주 작가의 그림책 『발 밑에 있는 건』이고, 다른 하나는 오롤로북스에서 나온 로 위에 작가의 반음악총서 『아무도 보내지 않은 편지』입니다.

 


남연주 작가의 『발 밑에 있는 건』은 이 세상 발밑에 있는 것들에 귀 기울이는 법을 담은 책입니다. 독자는 이 그림책을 읽고 듣는 동시에, 책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왼쪽으로 돌리며 음악을 연주하듯 감각하게 됩니다. 흔히들 고개 숙이고 걷지 말라고 하지만, 이 책은 고개를 숙여 세상을 요리조리 돌려보고 그 움직임을 가만히 들어보라고 권합니다.

 

반면 로 위에 작가의 『아무도 보내지 않은 편지』는 ‘악보 없이 제목만 연주되는 곡’과 다른 이들의 책에서 비롯된 악보들이 담긴 책입니다. 이 책을 읽는 일은 이미 읽기 전부터 시작된 작가의 연주를 가만히 듣는 일에 가깝습니다. 악보가 없고, 그래서 음이 없으며, 동시에 침묵과 고요 사이로 흐르는 음이 담긴 책압니다.


 

남연주 작가의 책이 동작적인 소리라면, 로 위에 작가의 책은 ‘반음악’적 소리입니다. 『미친존재감』의 표지가 붉은색으로 성연 님의 외침을 큼직하게 담고 있다면, 『러빙 시어터』는 침묵과 고요, 그 사이로 흐르는 여백을 따라 목소리 없이 연주되는 희곡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권의 책을 화이트 리버의 책들과 나란히 놓았을 때, 책의 옆의 옆, 그 옆의 옆에 놓였을 때, 우리는 이미 흐르고 있던 강물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언젠가 로 위에 작가의 책에서 마주쳤던 문장을 기억합니다.

 

“마모되는 명사 / 이야기하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것은 / 거짓말이다.”

 

이제 여려분이 명사에서 동사로 흐르는 이 이야기들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화이트 리버는 수로 속에서 여러분의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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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짱

2026.01.07

울림이 있는 글이네요. 넘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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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빙 시어터

<강하늘>

출판사 | White River

발밑에 있는 건

<남연주> 글그림

출판사 | 인공위성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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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미

출판사 화이트리버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