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함께 씻은 밤
어렸을 때는 휴일마다 근교의 이름난 목욕탕을 찾아다녔다. 찜질방이 함께 있는 목욕탕에서는 찜질도 꼭 했다. 아빠와 남동생, 엄마와 나로 나뉘어 남탕과 여탕으로 흩어졌다가 찜질복을 입고 잠시 넷이 되어서는 아빠와 엄마, 남동생과 나로 다시 나뉘어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도 모르는 새 머릿속에 단단히 들어앉게 된 생각들(자고로 휴일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뜨거운 물이나 바닥에 몸을 지지면 피로가 풀린다. 목욕탕에 가면 집보다 개운하게 씻을 수 있다. 가끔 목욕탕보다 좋은 온천에 갈 때면 머리가 어지러울 때까지 탕에 앉아 있는다, 온천수는 좋은 것이니까……)의 기원은 어쩌면 이러한 휴가 보내기에서 유래된 듯싶다.
어렸을 때 보냈던 휴가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탓인지 나는 어느 겨울, 일주일 간의 휴일이 생겼을 때 별 고민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으로 갔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에 가면 할 것이 영 마땅치 않아서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데 시간을 다 보내고는 하였다. 게다가 충주에는 온천도 몇 있으므로 내가 생각하는 휴일을 보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도 볼 수 있고…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는 내게 무얼 하고 싶은지 물었고 나는 온천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온천도 쉬는 날이 있으니 그날을 피해 새벽 6시에 할아버지 트럭을 타고 가면 되겠다고 답하였다.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가도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서둘러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벽같이 갔는데도 온천은 벌써 사람들로 북적였다. 할머니는 안면이 있는 다른 할머니들께 나를 소개했다. 어어 우리 손녀! 나는 벌거벗은 채로 꾸벅 인사를 했고 작은 온천탕에 어깨까지 푹 담그고 앉아 때때로 얼굴에도 물을 끼얹어 가며 시간을 보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내 얼굴까지 모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몸으로 겨울의 한기를 맞이하니 어쩐지 든든한 기분. 한참 동안 목욕을 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침이었다. 할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집에 가면 또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대뜸 소리를 쳤다.
에에? 왜 이 길로 간대?
할머니가 말했다.
온천 올 때랑은 다른 길로 가는 거지.
할아버지가 말했다.
왜? 이리로 가면은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데.
할머니가 말했다.
오는 길이랑 똑같은 길로 가면 재미없잖어.
할아버지가 말했다.
재미가 없기는 뭐가 없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할아버지의 고집 덕분에 우리는 집에 족히 한 시간은 더 걸려 도착했다. 늦은 아침까지 먹고 나자 다시 잠이 솔솔.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금세 일주일이 지났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에서 엄마 아빠의 집으로 돌아갈 날이 된 것이다.
첫 차를 예매해 둔 탓에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 한겨울 해는 나보다 게을러 길이 온통 캄캄했다. 가로등도 아직 불을 밝히기 전이었다. 버스 터미널은 할머니 할아버지네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할머니는 밤길(엄밀히 말하자면 새벽길이지만) 조심하라고 몇 번을 당부하였고 할아버지는 그래 가라, 하고 말았다.
읍 단위 마을의 버스 정류장은 시간이 멈춘 듯하였고 나는 그 안에 들어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창구 직원과 기사들의 대화에 지루할 새도 없었다. 버스가 오른쪽에서 등장할지 왼쪽에서 나타날지를 가늠해 보며 정류장 바깥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데 익숙한 트럭이 보였다. 트럭은 버스 정류장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였고, 그 앞 길가에 주차한 것도 아니었으며, 곧장 다시 돌아가겠다는 듯 차선 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도로도 정류장도 길가도 아닌 곳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다가가 보니 역시 할아버지의 낡은 트럭이었다. 왜 그렇게 이상하게 멈춰 서 있나 물어보니 트럭 시동이 갑자기 꺼졌다는 할아버지의 답변이 우물쭈물 돌아왔다. 어두운 밤길(새벽길)이 걱정되어 트럭을 타고 나를 쫓아와 봤는데 차가 갑자기 말을 안 듣더니 시동이 꺼져 켜질 줄을 모른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설명. 나는 저 괜찮으니까 얼른 조심히 가 보세요 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시동이 켜진 할아버지의 트럭은 그렇게 다시 멀어져 갔다. 아니 한낮 달리는 도로 위에서 시동이 꺼졌으면 어떡하려고?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는 지금,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부터 느릿느릿 멀어지는 트럭의 뒷모습을 종종 떠올린다. 왜인지 아기 같은 뒷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만일 그날, 걷는 속도와 비슷할 만큼 느리게 움직이는 트럭의 뒤를 따라 밤길(새벽길)을 걷는다면 어떤 장면이 가능할까?
*
느린 속도로 운전하면 시동이 꺼질 확률을 낮출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 천천히 움직이는 할아버지의 트럭. 발걸음을 조금만 재촉해도 금세 앞지를 수 있을 만큼 도로를 거의 기어가고 있다. 가로등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거리라 발각될 위험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기민한 할아버지가 내가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서는 안 된다. 그럼 할아버지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는 나를 몰래 뒤따라올 테고 나로서는 할아버지의 트럭이 또다시 말썽을 부리면 큰일이니 또 한 번 할아버지의 트럭이 집까지 무사히 도착하는지 그 뒤를 따라 걸어야 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서로의 뒤를 번갈아 뒤쫓는 이 행위는 끝을 모르고 계속되어 새벽이 아침이 되고 아침이 점심이 되고 그럼 별수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네 집에서 하루 더 묵고 가는 수밖에. 하지만 그다음 날이라고 해서 영원한 추격이 멈추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할아버지의 트럭과 쫓고 또 쫓기는 추격전을 영원히 거듭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안에 갇혀 서로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면서 걷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는, 그리고 할아버지는 무엇이 될까. 나의 경우를 먼저 말해 보자면 일단 몸도 마음도 튼튼해지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제는 할머니 홀로 꾸려가고 있는 뒷마당 텃밭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정기현
2023년 문학 웹진 《Lim》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걷고 뛰고 달리고 나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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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iaoirairo
2026.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