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는 예술이 불과 수학의 결합이라 말했다. 바쁜 독자라면 불이든 수학이든 추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애정과 여유가 있는 독자라면 둘 중 하나 정도는 집요하게 추적해보고 싶어진다. 애정이 있지만 여유는 없는 독자에 해당하던 나는 ‘편집자’라는 직업을 골랐다. 돈을 벌며 정독할 수 있는 환경에서 신비로운 창작의 불꽃과 수의 시스템을 엿보고 싶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창작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창작자가 되는 것보다 큰 일이었다. 창작자가 되는 것은 그 커다란 일과에서 따라오는 전리품에 불과하다.
어떤 위대한 예술도 ‘완성’이라는 완료의 기준 없이 세상에 내놓아지지 않는다. 편집자의 원고 청탁에는 주제와 마감이 들어 있다. “마감이라는 절대적이고 물리적인 요인에 의해 소화하지 못한 채로 마무리한 작품도 적지 않다.”(이토 준지, 『불쾌한 구멍』)라고 작가는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이러저러한 구들을 빼고 뼈대만 남기면 ‘마감에 의해 마무리한다.’는 공식에 다다른다. 마감이 마무리한다. 마치 마침표처럼. 모든 문장을 끝낼 수 있는 것은 마침표가 아니던가. 창작의 시발점이자 완료의 기준이 되는 마감 없이는 그 어떤 작가도 ‘완성’할 수 없다. 개중에는 찝찝한 완성도 있을지언정… 게다가 계속되는 마감이 주어진다는 것은 단발성 창작자가 창작을 업으로 삼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는 뜻이다. 마감은 이렇듯 만화가의 생활을 조직한다. “많은 만화가들이 다가오는 마감을 두려워하며 매일 열두 시간 가까이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건강과 맞바꾼 원고를 짜내는 대단히 수수한 생활을 보낸다.”(같은 책) 한 달에 32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그리기 위해 작화에 최소 15일이 필요하며, 나머지 기간 스토리 구상과 콘티 작업을 마쳐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스토리가 제깍 떠오르지 않아 괴로움은 더해간다.
이토 준지의 산문집 『불쾌한 구멍』을, 그의 만화보다도 몰입해서 읽은 것은, 그의 기기묘묘한 만화를 해설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세계를 가능하게 했던 구조적 조건을 보여주어서였다. 그 구조 안에는 편집자가 산다. 칸에서 읽어내기 어려운 편집자의 노동을 볼 수 있는 각종 ‘후기’와 ‘회고’들. 그것들이 책으로 엮인대도 한 작가의 대표 저서가 될 턱은 없다. 그러나 ‘불’이 궁금한 당신과 나에게 적어도 이 책은 불씨와 재를 제공한다.
이토 준지는 제1회 우메즈상에 「토미에」를 응모해 가작에 선정되며 만화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대상 및 입선작이 없는 해였기에 사실상 유일한 당선작이었지만, 시상식도 상금도 없었다. 부상은 원고용지 50매 세트. 이때 수상 소식을 전한 편집자 하라다 도시야스는 이후 24년간 이토 준지의 담당 편집자로 지낸다. 「토미에」 호평 뒤에 하라다는 단편 한 편을 더 의뢰하지만, 그 작품의 독자반응은 미지근했고 이후 한동안 연락이 끊긴다. 불안해진 작가는 요청받지도 않은 신작 콘티를 보내 투지를 보인다. 이를 수용한다는 하라다의 선택을 통해 이토 준지는 작업을 이어나간다. 그가 “지금까지 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하라다 씨가 끈기 있게 지도해주었기 때문”이다.
이토 준지 특유의 강렬한 시각적 공포, 그러나 그 상상력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까지 멈출 것인지에 편집자는 끊임없이 관여했다. 데뷔 초 단편 「환각」에서 이토는 목이 기형적으로 늘어난 여자아이가 등교하는 장면을 그렸다. 같은 반 학생이 “뭐야, 그 목은?”이라고 핀잔을 주는 장면을 준비했지만, 하라다는 약자를 깎아내리는 묘사는 삼가달라고 권고한다. 이로써 작품은 대폭 수정된다. 마찬가지로 최근작 「뱌큐야 쿄코」에서는 야뇨증을 희화화하는 설정이 편집부의 제어(식은땀 정도로 표현해달라는)로 우회된다.
「탈주병이 있는 집」에서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수십 년간 유령임을 자각하지 못한 탈주병을 주인공으로 다루자, 하라다는 “전쟁이 끝나고 40년이나 지내는 동안, 유령임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숨겨준다는 설정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배경 시점을 종전 후 5년으로 한정하자, 작품의 설득력이 신장된다. 혀가 독립적인 생물처럼 움직이는 「민달팽이 소녀」는 초기에는 ‘달팽이’라고 썼던 명칭을 고쳐 쓴 것이다.
개인적으로 처음 본 이토 준지의 작품은 「소용돌이」였다. 인체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욕조에 끼어 있는 장면이 아직도 생각난다. 말도 안 되지만 그림은 된다, 그림이 되니 이야기로 읽힌다는 기묘한 박력! 이 작품은 담당하던 《월간 핼러윈》이 휴간을 맞자 “이제 이토 씨가 일이 없어지니 누가 와서 섭외해주세요.”라는 하라다의 영업(?!)으로 《주간 빅코믹 스피릿츠》의 나카구마 이치로가 지면을 마련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메이저 잡지에 대한 부담에 고사하려던 이토는 나카구마의 끈질긴 청탁(무려 온천행)에 4주에 한 편 그리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매번 단편으로 끝나는 작품만 그리던 이토가 하나로 이어지는 장편 그릴 용기를 낸 것은, 역시 안정적인 연재처와 편집자(메이저 잡지의 위용)의 존재에 있었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마을을 이어진 집(나가야) 형태로 그리자, 길이를 유지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그림은 어떤 형태가 좋을까? 고민 끝에 낸 것이 ‘소용돌이’다. 이렇게 정한 키 콘셉트를 발전시키기 위해 편집부에서는 각종 논픽션들을 디깅해 작가에게 보낸다. 장기 옴니버스 작업을 위해 작품화될 만한 소재의 창고를 마련해준 것이다.(편집자와 작가는 그중에 있던 『고대 조몬 토기에 그려진 소용돌이에 관한 고찰』의 저자를 직접 만나러 가기까지 했다.) 지문, 달팽이, 물고기의 눈, 태풍, 코일스프링, 블랙홀을 비롯한 소용돌이 형태의 물체와 현상을 알아내고 이를 각 화의 모티프로 반영한 것이 바로 「소용돌이」다. 한창 연재하던 시기가 1999년(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이라는 것도 절묘하다. 그전 단편들에서는 주인공을 죽이는 데 한 치의 고민도 없던 작가가 연작에서는 비중 높은 키리에를 위기에 빠뜨리면서도 살려두느라 애먹는데, 이것 역시 이토의 한 단계 레벨업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편집자가 올바른 의견만 내는 것은 아니다. 여러 구의 시체가 실로 연결되어 기묘한 오브제로 발견되는 「억만톨이」(2004)의 원래 결말은 주인공 미치오가 좋아하는 나츠코의 전화를 받고 찾아가서, 실로 꿰매어진 나츠코의 부모를 발견한다는 직선적인 것이었다. “좀 더 의외성 있게 전개하면 어떨까요?”라는 편집부 요청에 나츠코가 직접 부모를 실로 꿰는 장면을 그렸지만, 나중에 붙인 만큼 작가에게는 앞뒤가 맞지 않고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계속 남아 있다고 한다. 사전에 복선을 넣어두었어야 했다는 후회다. 내 생각에는 제목도 이토가 애초에 염두에 두었다는 ‘합성인간사건’이 낫지 싶다.
“수정을 요구하지 않고, 교정 실수조차 작품의 힘으로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판단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게 요시하루, 야마시타 유지, 이누이 아키토, 히가시무라 아키코, 『나사와 검은 물』 중)
관련해 떠오른 쓰게 요시하루의 일화가 있다. 그의 손글씨 ××를 メメ(메메)로 오독한 편집자 다카노 신조는 작가가 인쇄된 원고에서 실수를 지적하자 본능적으로 움츠렸다. 그러나 작가는 “괜찮아요. 메메해파리가 작품에 더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지네요.”라고 덧붙였다는 것이다. 그 말은 소심해져 있는 편집자를 격려했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메메해파리를 살려주었다. 우리는 살아남은 것밖에 만나지 못하므로, 살아남은 메메해파리가 실수일 리는 없다.
우리가 보는 만화에 연필 스케치는 없다. 잉크 채운 펜에게 가이드가 되어주었던 연필 윤곽은 성능 좋은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진다. 맥주회사에서 만든 우롱차처럼 만화가의 산문은 이 연필 스케치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런데 이 스케치에는 이제는 고쳐진 오류와 남아 있어도 좋았을지 모를 날카로운 감각이 있다. 창작자의 과거다. 그리고 또 편집자의 현재가 있다. “불쾌한 구멍”도 편집자가 지은 제목이라고 한다. ‘불쾌한 골짜기’의 이토 맞춤 변형일 것이다. 작가는 구멍을 판다. 볕이 안 들고 습해서 숨쉬기 괴로워지는 때도 있다. 편집자는 이제 충분하니 그만 파도 된다고 말한다. 혹은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당신이 목표하던 깊이에 거의 다다랐다고. 구멍 파는 연장을 쥐지는 않았을지언정 구멍 파는 데 세월을 보낸 만화가와 똑같이 편집자도 나이를 먹었다. 아마 작가가 청년일 때 이미 초로의 중년이었던 하라다가 ‘24년’이라는 구체적인 담당편집 기간을 완료한 것은, 그가 착실하게 늙어서일 것이다. 그도 자신의 가장 귀한 생을 바쳐 이토의 우물을 파는 데 동참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미래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2010년 문학교과서 만드는 일로 경력을 시작했고, 해외문학 전집을 꾸리는 팀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총서를 기획해 선보였다. 책을 둘러싼 색다른 환경을 탐험하고 싶어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의 출판 분야에서 매니저로 지냈고, 현재 다양한 교실에서 글쓰기와 출판을 가르친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사 아닌 곳에서도 교정·교열을 본다. 편집자는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재료를 모아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다만 방침을 만들고 따르는 일에 힘쓰면서도, 방침으로 포섭되지 않는 것의 생명력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직접 레이블(쪽프레스)을 만들어 한 쪽도 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낱장책을 소개한 것도, 스펙트럼오브젝트에 소속되어 창작 활동을 지속해 온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창작자, 기획자, 교육자 등 복수의 정체성을 경유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편집이므로 스스로를 한 우물 파는 사람이라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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