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박찬하
이 책은 고대 그리스부터 2500년의 역사를 꿰뚫으면서 유럽 정치의 문법을 파악하려 시도한다. 왜 문법일까? 문법은 보통 언어에 적용된다. 고대 그리스는 정치적 문헌의 풍부함(헤로도토스-투키디데스), 정치 서술의 전통, 분석 개념의 정교함(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폴리스의 문법’을 성찰할 수 있도록 공적 삶의 표준을 물려주었다. 현실 정치가 이들 고대인에 의해 ‘정치학’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개념화되었고, 여기서 하나의 문법으로 정리되어 후대에 계승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셨지만, 『정치의 발명』은 선생님 연구의 결정판으로 여겨집니다. 전공과도 가장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요. 정치학자로서의 연구들이 이번 책에 어떤 방식으로 일단락, 종합되었다고 보면 될지요?
저는 정치학자이지만 세부 전공은 유럽 정치와 정치경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18년 출간한 『문명의 그물』은 유럽이 기나긴 역사 속에서 하나의 문명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문명은 언어와 종교에서 시작해 정치와 경제에 이르는 다양한 그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치의 발명』은 『문명의 그물』 연장선에서 정치 영역을 집중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정치의 그물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본 셈이죠.
이전에 펴낸 『자본주의 문명의 정치경제』, 『부의 세계사』, 『자본주의 인문학 산책』 등은 정치경제 관점에서 쓴 책입니다. 거시적인 역사 관점에서 시장과 자본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져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적용했습니다. 저는 유럽 정치와 정치경제를 연결할 때 문화나 문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자본주의나 시장은 단순한 제도나 시스템이 아니니까요. 시장이나 자본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동반하는 사회와 문화, 즉 문명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견해는 자본주의가 처음 만들어질 때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베버부터, 자본주의를 경제 시스템을 넘어 하나의 문명이라고 주장한 슘페터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시각입니다.
『정치의 발명』에서는 문화나 문명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듯, 민주주의나 유럽 통합과 같은 실험을 뒷받침하는 토대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언어에서 빌려온 문법이라는 개념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고요. 이번 책이 제 연구의 결정판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큰 단락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살펴본 자본주의와 문화의 거시적 관계를 정치 부문으로 옮겨 민주주의와 문화를 연관지어보는 시도였으니까요.
이 책은 고대 로마와 같은 변방이 중심이 될 수 있고, 열린 태도만 갖춘다면 열등한 이등 시민이 세계의 중심이 되며, 그곳의 제도들이 세계의 보편적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합니다. 그렇다면 유럽이 아닌 변방, 즉 아시아에서 서양의 정치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역사를 거시적으로 볼 때 변방이 중심이 되는 현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21세기 현재만 보더라도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이 현상은 불과 100년 남짓한 일이거든요. 200년 전만 해도 세계 경제의 생산력 중심은 미국도 유럽도 아닌,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였다는 연구도 똑같은 현상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변방에서나 중심이 되는 세력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변방에 위치하지만 중심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돼 있어야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고대 그리스가 변방이었을 때도 당시 문명의 중심인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연결되어 있었고, 변방이었던 고대 로마도 그리스와 문화적으로 가까운 지역이었죠. 로마의 중심성은 다시 프랑스나 영국을 거치게 되고, 이후 서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연결되고 확산하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일종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변방이 중심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심 세력이 오만하고 폐쇄적으로 변하는 동안 변방은 겸손하고 개방적으로 배울 수밖에 없는 처지를 인식하고 실천했기 때문일 겁니다. 로마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출발부터 망하는 날까지 일관되게 로마는 선진 그리스를 숭배하고 존중하며 배우려는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물론 아이러니하게 로마도 북쪽의 야만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무시하다가 무너졌습니다.
동아시아와 서구의 관계는 매우 복합적이며 단순하게 중심/변방으로 분석하기 어렵습니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확고한 역사적 유전자를 지니기 때문이죠. 실제로 2020년대 들어 미국과 대등하게 대립할 만한 세력을 갖추자 중국은 자신이 이미 세계의 중심이 된 듯 사고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내부에서 변방적 입지에 처했고, 근대에도 세계에서 변방에 위치합니다. 앞서 지적했듯 한국이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은 중심에 연결된 변방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만과 폐쇄성을 극복하고 겸손과 배움과 개방으로 이끌어온 덕분인 거죠.
한국의 이런 겸손한 태도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서구의 정치사상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변방적 특징을 가진 대만이 한국과 비슷하게 가장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정치 체제를 갖는 것과 유사한 현상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위험한 판단은 역시 오만입니다. “우리가 세계 민주주의를 주도해간다” “우리가 세계의 모범이 되는 위대한 국민”이라는 식의 주장은 자만과 아부의 표현입니다. 민주주의란 끊임없는 반성과 혁신을 실천하면서 완성됩니다. 저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현재 한국의 정치는 이론, 형식, 그리고 제도적 민주주의만 받아들였지 실천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봉건적이라고 봅니다. 기존 업적에 만족하기보다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지속적인 혁신과 정치의 발명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열어가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중심을 물리치는 변방은 언제나 있었다
이 책은 이민족 간의 갈등, 계급 갈등, 국가 간 갈등, 종교 갈등 등 여러 다툼을 봉합하는 느낌을 줍니다. 꽤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이념하에 유럽 국가들은 장기간에 걸쳐 개별 행동을 하려는 충동을 억제하고 구심력을 잘 키워온 듯합니다. 우리는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과 어떻게 갈등을 봉합하며 정치적 이상을 조금이라도 실현시킬 수 있을까요?
제가 박사학위를 마친 지 30년쯤 되는데, 그동안 줄곧 유럽의 통합이라는 현실과 동아시아의 분열이라는 상황을 비교하며 생각해왔습니다. 동아시아 사람이 유럽의 통합을 연구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고요. 그동안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유럽이 통합할 수 있었던 필수 조건은 하나의 거시 역사적 문명을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이번 책에서 크리스천돔이라고 부르는 중세 문명의 구조가 중요하다고 지적한 부분입니다. 유럽 역사에서 교회와 교황은 다양한 국가와 사회를 하나로 묶는 치밀한 조직을 형성했고, 종교를 넘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현대에도 여전히 유럽 통합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모델을 제공하고 있는 셈입니다.
동아시아에는 유럽의 크리스천돔에 해당되는 강력한 문명적 통합 모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교·불교·도교의 문화적 공통분모가 있지만 조직력이나 정치적 영향력은 크리스천돔에 견주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제국주의/식민지, 공산주의/자본주의, 권위주의/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념과 체제, 경험 등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진행되었습니다. 식민지, 자본주의, 민주주의라는 조합을 공유하는 한국과 대만이 가장 유사하고, 일본이 제국주의 경험을 제외하면 그다음으로 가깝습니다. 중국은 식민지 경험을 거친 뒤 제국주의로의 부상해 공산주의, 권위주의 등이 결합됨으로써 가장 이질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한다면 질문처럼 갈등의 봉합이라는 최소한의 성과를 낼 수는 있겠지만,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통합적 협력은 한국, 일본, 대만 사이에서만 최대한의 결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일본은 제국주의 역사와의 확고한 단절을 천명하고, 한국이나 대만은 개방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협력을 개척해나가야겠지요. 장기적으로 공산당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중국과 민주주의 한국의 공존은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만 서로 문명적 동질감을 느낄 일은 없을 겁니다.
사진 : 박찬하
문명사적 시각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선생님 저서들은 늘 거대 역사를 포괄하며 큰 지평에서 논의를 해왔습니다. 거기서 강력한 사유와 필치가 느껴지면서도 문체는 부드럽습니다. 이런 관점은 어떻게 훈련하면서 갖춰질 수 있었을까요?
제가 거시 역사를 다루는 책을 여러 권 썼습니다만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각 시대마다 전문가들이 있는데 제가 감히 이런 이야기를 써도 되는 것인가 싶고요. 언급하는 분야도 다양하다보니 잘못된 정보를 제시하거나 빗나간 해석을 할까 두렵기도 합니다. 따라서 글을 쓸 때 손이 오그라든다고 해야 할까요. 조심스럽게 접근하다보니 자연스레 부드러운 문체가 나오지 않나 싶습니다.
다른 한편, 그간 신문 칼럼이나 월간지 연재 등의 글을 꾸준히 써왔습니다. 개인의 책에서는 강력한 주장을 펼 수 있지만, 시사적 문제에 관해서는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하다보니 좋게 표현하면 부드러운 문체지만, 어쩌면 자신 없어 보이는 글이 나오는 것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개인 성향도 단정적 결론을 내리는 걸 피하는 편입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단정적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죠. 나이가 들면서 한번 쓴 글을 자꾸 고치는 습관이 생겨 매번 각진 부분을 깎아내기도 합니다. 훈련이라기보다는 습관에 더 가까운 듯합니다.
조심스럽고 장기적인 시각을 지녀야 하는 이유
정치사회적 사건들을 볼 때 거시와 미시의 렌즈를 어떻게 번갈아 사용하시는지요? 예컨대 2024년 말 한국에서 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당면한 문제에 대한 분석과 시위 참여 등은 당장 해야 할 일인 반면, 학자로서는 시간과 거리를 두고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텐데요. 그처럼 거리를 두면 매일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한발 늦곤 합니다. 사실 우리는 사건과 너무 가까이 있고, 팩트를 알 수 없을 때가 많아, 사고의 비용을 절약하고자 이념적 틀에 끼워 맞출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역사적 시각에서 현재를 판단하기 어렵기도 하고요. 양극단 사이에서 현재의 정치를 판단할 좋은 방법을 듣고 싶습니다.
거시 역사를 많이 다루기는 하지만 제가 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부분은 거시적 현상이나 흐름, 추상적 개념을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현상과 연결해서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국주의나 민족주의를 거시적으로 논의함과 동시에 특정 상황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미시적 현실을 봐야 한다고 말입니다.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 인문학 산책』의 부제는 일상의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가 어떻게 일상에서 사회와 개인에게 구현되는지를 미시적으로 살펴본 시도였지요. 예를 들어 미시적인 김치라는 매일의 음식이 거시적인 민족 정체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민하는 형식입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설명한 ‘학자’의 어원은 흥미롭습니다. 학자를 영어로 스칼라(Scholar)라고 하는데 스쿨(school)과 연결되는 표현이죠. 이 말은 라틴어 스콜라(schola)에서 오고, 다시 라틴어는 그리스어 스콜레(skhole)에서 오는데 그리스에서의 의미는 ‘한가한 시간’(leisure)이나 ‘남는 시간’(spare time)이라고 합니다. 학자란 결국 남들이 일하거나 열심히 살 때 한가하게 앉아서 생각하고 분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부르디외가 학자의 어원을 설명하는 배경은 다른 학자들을 비판하는 과정이었어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학자들이 해석하듯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다기보다 습관적으로 행동한 결과라고 설명하려던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모델보다는 부르디외의 사회학이 주장하는 아비투스라는 개념이 더 잘 적용된다는 의미입니다. 축구 선수는 순식간에 볼을 받아 슛을 때리거나 패스를 하는데, 그런 행동을 선수가 고민하고 판단하고 계산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다, 축구 선수는 생각하기보다 즉흥적으로 아비투스를 따라 행동한다는 설명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질문에서 언급된 계엄 사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개인적으로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학자건 시민이건, 그 누구라도 아비투스에 의해 즉흥적으로 대처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차이가 있다면 자신의 행동을 사후적으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축구 선수의 사례를 다시 들자면 세계적 수준의 손흥민과 동네 조기 축구회 멤버의 판단이나 실력은 다르겠지요. 하지만 게임을 뛰면 똑같이 시간에 쫓기며 충분한 거리를 두고 고민하기 어렵다는 조건은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우유부단함을 변호하기 위해 부연 설명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저는 칼럼을 종종 쓰는데 학자의 탈을 벗지 못하고 조심스럽고 장기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에 머물곤 합니다. 강한 어조로 쓴 글은 현실에 대한 빠른 판단이라기보다 다른 사람의 성급한 속단을 비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가한 시간’을 가져야만 제대로 사고할 수 있는 스칼라이기에 SNS 같은 곳에 일상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단정적으로 발언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즉각적 반응과 행동을 요구하는 현장에서 학자 출신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 : 박찬하
정치와 언어는 어떤 관계일까요? 정치를 분석하는 데 언어의 문법을 활용하신 것을 보면 선생님께서 언어와 정치 사이의 관계를 긴밀하게 사유한 계기가 여럿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가 수사학과 토론의 영역이라면, 우리가 정치적 사고를 기르기 위해 쓰기와 읽기, 말하기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키우는 게 좋을지요?
저는 정치와 언어 둘 다 문화적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언어는 문화, 권력은 정치, 이런 식으로 나눠 생각하죠. 하지만 데이비드 흄의 설명에 따르면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정치에서 권력, 즉 파워나 힘은 지배받는 다수 쪽이지 지배하는 소수 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원인은 힘이 아니라 다수가 복종하게 만드는 의견, 생각, 사고에 있다는 말이죠(367~368쪽). 정치도 문화 현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덧붙이자면 언어건 정치건 사람이 태어나 자라면서 가족을 통해 배우고 학교에서 익히며, 사회에서 습득하는 문화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현대 사회는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언어와 정치라는 두 문화가 서로 조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는 존댓말과 반말이 위계적으로 사용되는 매우 불평등한 문화를 반영하는데, 정치는 개인의 평등을 원칙으로 삼는 문법이 표준이 되었습니다. 평등한 관계는 언어를 사용할 때 서로 경어를 쓰거나, 또는 서로 반말을 하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시적 차원의 긴장관계가 아닙니다. 대통령이 장관이나 비서관들과 대화하면서 상호성이 지켜질까요? 그렇지 않다면 자유롭게 의견이 개진되기 어려울 테고 아무리 헌법을 개정해도 제왕적 대통령제는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인위적으로 상호성을 적용하면 우스운 상황이 연출될 것입니다.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비서관님, 좋은 생각 제안해주세요” 하는 것이나,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재명아, 석열아, 이렇게 저렇게 하자”라는 방식이나 둘 다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 백악관에서 요즘 트럼프 대통령을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해집니다.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끼리 이름을 불렀거든요. 하지만 왕 행세를 하는 트럼프도 그렇게 부를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한국에서 이런 긴장이 어떻게 해소될지도 두고 볼 사안입니다. 서서히 평등성이 자리를 잡아갈지, 아니면 지금과 같은 괴리가 계속되면서 공화주의를 빙자한 제왕 구조가 이어질지.
제가 정치에서 문법을 적용하겠다는 생각을 한 또 다른 계기는 한국 정치 세력들의 황당한 라벨링 때문이죠. 예를 들어 한국의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상징으로 삼아 외칩니다. 그런데 사실상 한국 보수는 매우 반反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이에요. 국정 교과서 문제만 보더라도 하나의 목소리나 시각으로 교과서를 만들어 국민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의 정반대편에 서 있는 사고거든요.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윤석열의 쿠데타는 언급할 가치도 없고요.
마찬가지로 한국의 진보는 민족주의를 내걸고 외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집단이 같은 민족이 독재의 굴레에서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세습적 독재 정권과 협력하는 일을 당연하다고 주장할까요. 종교와 절대 왕정에 맞서 투쟁하며 만들어진 자유주의 문법이나, 모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 출발점인 네이션의 문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최근 한국의 이재명 정권이 주식시장을 불타오르게 하겠다며 코스피 5000을 목표로 하는 괴이한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좌우 정치 문법을 완전히 거꾸로 세우는 태도죠.
보수의 자유민주주의와 진보의 민족주의/사회정의는 한마디로 정치적 기만이자 놀라운 궤변입니다. 그리고 각 진영의 소위 지식인조차 침묵합니다. “다양성과 선택권을 부정하는 국정 교과서 제도는 자유주의가 아니고 파시즘에 가깝다” “북한 세습 독재와의 협력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권력에 빌붙어 북쪽의 동료 시민을 탄압하고 학대하는 기회주의에 불과하다”라는 목소리가 각 진영 내부에서 더 크게 들려야겠죠. 정치 세력에 제대로 이름을 붙이려면 한국의 보수는 국가주의 파시즘, 진보는 킹덤과 네이션을 오가면서 권력을 숭배하는 기회주의에 가깝습니다. 정확한 기준으로 정치 성향을 분별하고, 초등학교부터 개념을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라는 작은 우주
이 책 이후에도 어떤 거대 주제들을 다뤄나가실지 궁금합니다. 혹은 좀더 구체적인 사상가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쓰실 예정인지요?
책이 출간되면 항상 허무감이 찾아오곤 합니다. 새로운 책의 주제를 찾게 되는 동기입니다. 평소에 생각해두었던 여러 테마 가운데 어떤 것으로 집필을 시작하면 좋을까 고민하다보면 허무감을 극복하는 데 도움도 되고요. 『문명의 그물』을 쓰면서 언젠가 정치 부분을 따로 떼어 단행본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계획을 실천하는 데 7~8년이 걸린 셈입니다. 이번에 『정치의 발명』을 쓰면서 더 깊이 파고 싶다는 의욕을 느낀 주제는 자유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서구의 정치 문법을 수입해 어느 정도 제도화해서 활용하고는 있지만, 서구와 한국·일본·대만 등의 정치적 현실을 비교해보면 자유라는 관점에서 가장 큰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죠. 고대 그리스부터 자유를 자신들 문명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서구의 전통과 자유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동아시아의 현실, 하지만 21세기에는 세계인이 모두 자유를 입에 달고 사는 변화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자유에 관한 담론을 어떤 기준으로, 어떤 그릇에 담을지 생각 중입니다.
또한, 여전히 아이디어 차원이긴 하지만 한국어가 아닌 영어나 프랑스어로 책을 써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번 작업에서도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싶었는데, 그것은 언어를 하나의 소우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언어를 배워 말하고 글을 읽고, 영화를 보고 대화하면 하나의 소우주가 열립니다. 책까지 쓸 수 있다면 소우주가 어느 정도 완성되는 셈이죠. 10년 전쯤 영어로 단행본 분량의 원고를 작성하긴 했는데, 출판사를 찾지 못했습니다. 10년의 세월로 실패의 기억은 흐릿해졌고, 아직은 재도전의 의욕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네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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