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 그림을 그렸던 때는 언제였을까? 작은 조각이나 막대기를 손에 쥐고 사방팔방 선을 그었을 어린 시절의 찰나? 아니면 어떤 표면을 손으로 누르고 문질러, 시각보다 촉각으로 이미지를 더듬어 갔을 드로잉의 순간? 아직 정교하진 않았지만, 도구를 배우기 전에 몸으로 먼저 탐닉했을 조형적 시간을 상상해 본다. 손끝의 소근육이 충분히 분화하지 않았던 때, 우리는 촉각 놀이처럼 대상을 만지고 긁고 비벼보며 질감을 익히고, 그 움직임 속에서 세계와 접촉했을 것이다. 그림은 그렇게 손이 어떤 흔적을 찾아가다 점차 이미지로 피어오르며 시작되었다.
아야코 록카쿠(Ayako Rokkaku)의 회화는 그런 그림의 시작을 떠올리게 한다. 1982년 일본 치바현에서 태어난 작가는 미술 전공 교육을 받지 않은 비전공자 출신으로, 정식 도구보다 몸의 감각을 회화의 중심에 두는 방식을 선택했다. 록카쿠는 붓 대신 맨손을 사용해 물감과 화면을 마주하며, 생동감 있는 제스처가 새겨진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는 붓 끝으로 정해진 경계를 따라 색을 메우는 작업과 다르며, 손으로 물감을 집어 누르고 비비며 화면에 안착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그 결과 캔버스 위는 물감을 반죽하고 매만진 각기 다른 손동작이 고스란히 질감으로 남는다.
아야코 록카쿠 (Ayako Rokkaku) ⓒ Avant Arte
정해진 형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 혹은 추상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안료를 칠하고 퍼트리는 것을 회화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회화는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재료가 평면 위에 어떤 두께로 쌓이는지, 표면 위에서 어떻게 뭉치고 머무는지, 다른 물성의 재료가 추가될 때마다 얼마나 저항하고 흡수되는지 같은 실험인 것이다. 미끄럽고 촉촉하게 얹어졌다 마르고 굳어가는 사이, 서로 다른 반응과 속도를 관찰하고 조율하는 묵묵한 여정이 회화를 완성시킨다. 록카쿠는 물감이 손에 닿을 때, ‘진짜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고 인터뷰에서 말해왔다. 그 말은 단순히 이미지를 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재료와 맞붙고 그 반응을 내밀하게 받아들이는 화가의 원초적 탐색을 떠올리게 한다.
Ayako Rokkaku,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140×200cm ⓒ Ayako Rokkaku
록카쿠는 손의 감각에서 출발한 회화적 배경 위에, 그만의 어른 동화 같은 세계를 덧입힌다. 화려한 꽃밭처럼 흩뿌려져 알록달록 조합된 풍경과 그 속에 자리한 소녀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이 앳된 얼굴은 일본 특유의 카와이(kawaii) 문화가 가미된 도상으로, 친근한 만화 캐릭터 같으면서도 어딘지 어수룩하고 토라진 듯한 표정이 특징이다. 록카쿠 이전 세대를 대표하는 무라카미 다카시가 고급미술과 오타쿠 문화의 경계를 자신의 작업 언어 ‘슈퍼플랫’으로 시각화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면, 록카쿠의 캐릭터는 보다 사적이고 즉흥적이며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품은 형상에 가깝다.
이 차이는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두 세대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버블경제의 흥망을 목격한 무라카미의 네오팝 세대가 전후 일본 사회의 트라우마와 글로벌 산업 구조의 재편을 직시했다면, 록카쿠는 그 이후 세대로서 훨씬 더 개인적이고 섬세한 감정적 움직임에 반응한다. 집단주의적 규범보다 일상의 작은 사건, 미묘한 느낌의 변화, 디지털 환경에서 주고받는 즉각적인 이미지들이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된 상황 때문이다. 따라서 록카쿠는 이미지 뒤에 숨은 비판적 개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 이미지 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정서적 진동, 적당한 낭만과 무관심이 교차하는 감정의 결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 감수성은 록카쿠의 캐릭터가 지닌 순수하면서도 삐뚤어진 모습, 친숙하지만 고립된 표정, 호기심과 불만을 동시에 띠는 인상과 절묘하게 공명한다. 아이 같은 몸과 커다란 눈망울은 귀여움을 연상시키지만, 표정은 늘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다. 해맑아 보이다가도 심드렁해 보이고, 드러나 보이면서도 숨어 있으며, 이유를 짚어내기 어려운 감정 상태들이 동시에 묻어난다. 그러나 이 모호함이야말로 록카쿠 도상의 핵심이며, 삶의 느슨한 태도를 반영한 카와이의 미적 정서를 회화로 구현한 지점이 된다.
Ayako Rokkaku 《Breathing with the Chaos》 전시 전경 (2025.12.5.–2026.2.8., 토탈미술관)
이는 또,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는 문화 현상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감정은 숏폼처럼 짧고 즉각적으로 유통되고, 기분은 한순간의 표지처럼 압축적으로 전달되는 시대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단순한 기호만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다층의 감정, 단순한 ‘예쁨’을 넘어서는 개성적 외형이 더 큰 공감을 얻는다. 귀여움 속에 이기심이나 투정이 스며 있는 캐릭터 피규어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작은 존재들은 일상의 감정 찌꺼기를 비추는 작은 거울처럼 기능하며, 긴 설명 없이도 심리적 깊이를 투사할 수 있게 조력한다. 가방에 장식하는 키링으로 무드를 드러내는 한편, 비슷한 옷차림 가운데 개성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록카쿠의 소녀 역시 그처럼 작고 사적인 정동을 품으며, 동시대인의 얼굴을 그림처럼 비추어 보인다.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캐릭터를 고르고, 작은 인형을 데리고 하루를 나서고, 스마트폰 속에서 세계와 소통하며, 슬라임이나 스트레스볼 같은 촉각 장난감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그런 나날들의 얼굴을 말이다.
* 아야코 록카쿠(Ayako Rokkaku) 작가 정보
https://www.instagram.com/rokkakuayako/?hl=en
아티피오는 ART ‘예술’ + PIONEER ’선구자’라는 비전 아래 온라인에서 고품격 예술 콘텐츠와 아트테크를 체험할 수 있는 투명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제공하는 문화예술 플랫폼입니다. 누구나 아티피오를 통해 일상 속에서 미술을 향유하면서 안심하고 미술품에 투자할 수 있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오정은
미술비평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전문사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동시대 미술 현장과 작가 작업을 연구하며 글을 쓴다. 『경향신문』에 미술 칼럼을 연재했고, 『네이버 디자인』, 『월간미술』, 『서울아트가이드』 등 여러 매체에 기고를 이어가고 있다.
![[인터뷰] 김미래 편집장, 오카자키 교코를 잊지 마세요 | 예스24](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6/02/20260209-23893e24.jpg)

![[이길보라 칼럼] 엄마됨과 예술가](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6/01/20260106-204f725f.jpg)
![[김해인의 만화 절경] 이거 읽고 그려](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08/20250811-1ad97d18.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