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여름 독자들이 참으로 사랑한 장편소설이 있다면, 그중 한 편은 단연 『여름은 고작 계절』일 겁니다. 출간 한 달 만에 만 명 이상의 독자를 만났고, 지금까지도 수만 명의 독자분 품에 안긴 작품이지요. 한 권의 소설이 오로지 이야기의 힘만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는 소식은 참으로 반갑습니다. 우리는 늘 그런 이야기를 기다려온 사람들이니까요. 김서해 작가의 『여름은 고작 계절』은 10대 소녀 제니의 성장기를 그린 소설입니다. IMF 여파로 살아가는 일이 막막해진 제니 가정은 아버지의 섣부른 희망으로 미국으로 떠나는데요. 자신의 세계가 통째로 바뀐 동양인 소녀 제니는 학교와 가정에서 모두 감당하기 버거운 광포함에 시달리며, 외로운 생존 투쟁을 겪어냅니다. 그런 제니 앞에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가열하게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원하는 한나가 나타나는데요. 제니는 그런 한나를 보며 많이 혼란스러워합니다. 자신을 닮았고, 그렇지만 그 모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썼던 인고의 시간이 있었던 만큼 한나를 친구로 두고 싶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어도 못 하고, 툭 하면 우는 한나를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은 제니의 발목을 계속 잡고 말죠. 결국 둘은 친구가 되고, 둘이 나눈 것은 우정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김서해 작가는 “제니에게 한나는 오래전에 입은 화상, 지지 않는 흉, 나를 개조한 신, 내가 절대로 잊지 않을 소중한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과 그런 친구가 있었기에 이 이야기 속에 빠져듦과 동시에 괴롭기도 할 텐데요. 그것은 김서해 작가가 던지는 우리를 향한 질문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그는 잘못한 과거에 대해 “그 일을 반성하고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중요하”고, 우리의 “양면성”을 인정하고 “직면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랑과 우정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죠. 작가의 말엔 “저는 한나에서 제니로 자랐습니다”(340)라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용기 가득하고,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인지 계속 곱씹게 됩니다. 이 명징한 문장에 골똘해지는 연말을, 그렇게 새로운 한 해로 나아가는 마음을 모두 회복하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내가 되는 계절
『겨울은 고작 계절』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이 책은 지난여름에 출간된 『여름은 고작 계절』의 겨울 에디션인데요. 한 해가 가기 전에 이 책을 뜨겁게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과 다시 인사를 나누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두 계절을 지나 독자분들을 새롭게 만나는 기분은 어떠하신지요.
처음에는 제 책이 이렇게 독자분들을 다시 만나도 되는 걸까 생각했어요. 리커버라는 것은 10만 부 이상, 말 그대로 정말로 큰 성원을 받은 책에게 허락되는 기회라고 여겨졌거든요. 그런 한편, 이 소설이 성장소설인 만큼 인물들이 함께 겪는 계절의 한순간이 큰 모먼트가 되는데, 특히 겨울이 무척 중요한 계절로 등장해요. 크리스마스라는 날을 통해 제니와 한나의 관계가 새로운 무드로 접어들거든요. 리커버를 통해 ‘겨울’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면서 이 부분을 부각할 수 있어 좋았어요. 무엇보다 아름답게 다시 태어난 책을 보며 기뻤고요.
『여름은 고작 계절』은 말 그대로 입소문을 타고 놀랍도록 빠르게 사랑받은 작품입니다. 이토록 큰 성원을 기대하셨는지요.
예상하지 못했어요. 쓰는 동안 무척 바빴는데, 그만큼 좋은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어요. 번역 일에, 대학원도 다니고 있었고, 아르바이트도 했고요. 그런 와중에 글까지 쓰느라 건강을 챙기지 못하다 보니 역시나 마음에도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부정적인 생각만 들고, 그러다 보니 두려움에 계속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와중에 책이 나왔고, 한 사흘쯤 지났을까요. 편집자님께서 책이 정말 잘 팔리고 있다는 연락을 주신 거예요.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이면서, 독자분들께서 올려주시는 리뷰들을 찬찬히 보기 시작했어요.
쓸 때는 그런 생각을 미처 못했는데, 막상 완결 짓고 나니 이 책을 다들 어떻게 읽어주시려나 걱정이 되었던 게 사실이었거든요. 주인공이 한국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기에 이 이야기에 공감해주실지, ‘이런 얘기를 한국인 작가가 왜 하지?’ 같은 의문 때문에 읽고 싶지 않으시면 어쩌나 싶었어요. 하지만 제 우려와는 달리 정말로 많은 분이 공감해주시고, 좋은 반응을 널리 전해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러니까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전해 듣기로는 이 소설이 20대분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해요. 그만큼 입소문이 빠르고, 멀리 퍼진 것 같아요. 제가 한국 나이로 서른인데, 쓸 당시도 그렇고 여전히 20대 정서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에 같은 세대에게 가닿는 어떠함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돼요. 특히나 비슷한 성장 배경을 지나왔을 테고, 소설 속 환경이 미국이라고는 해도 인물이 겪는 사건은 누구나 겪어봄 직한 것들이기도 하고요. 지금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을 독자분들께 잘 닿은 것 같아 기뻐요.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이 작가님의 이야기들이 파편처럼 녹아든 작품이라는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해주셨는데요. 그 부분에서 “한나에서 제니로 성장했다”라는 문장에 무척 공감했어요. 더불어 “내가 된 적은 별로 없었다”(262쪽)는 제니의 말에도요. 작가님께서는 ‘나로 산다는 것’을 누리고 계신지요.
“내가 된다”는 게 굉장히 어렵잖아요. 그 생각에 맺히면,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누구나 다 제니처럼 때에 따라 필요한 페르소나를 하나씩 가져와서 그때그때를 잘 넘기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조금 다른 이야기 같기도 한데, 제 경우는 어떤 순간이든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감각으로 해내면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아요. 아무리 싫은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지금을 견디고 나면 나는 성장해 있을 거고, 이 모든 게 내게 도움이 되었을 거야’ 하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정말로 글 쓰는 걸 너무 좋아했어요. 작가가 되고 싶었고, 감사하게도 작가로 활동하며 살아가는 순간을 맞게 됐어요.
나로 사는 것이라면, 정말 원하는 걸 하며 사는 것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면,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한데요. 일단 그 기준은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신나게 하는 일 아닐까 해요. 어릴 때를 돌이켜 보면 부모님께서 공부와 관련한 정말 많은 것을 시키셨고, 저는 하기 싫어했는데요.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건 그냥 다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지금의 생활에 어떤 불만도 없어요. 이제 저는 ‘내가 됨’을 많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제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한 사람이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내가 되는 감각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쓰기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과 희열
학부에서 글 쓰는 것을 전공으로 하셨어요?
아니에요. 저는 문헌정보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사서로 활동하신 것이군요.
맞아요. 이 학과에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성적에 맞춰서 선생님이 추천한 과에 지원한 것이었는데요. 사서라고 하면 책과 가까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거부감이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진학하고 보니 문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오히려 수학적 혹은 논리적 사고를 기본으로 한 학문 공부를 해야 하더라고요. 특히 컴퓨터 정보학 같은 과목을 들을 때는 좀 무서웠어요. 이런 쪽엔 좀 자신이 없었고, 이론을 너무 어려워했어요. 문제는 우리 학과는 반드시 실무를 거쳐야 졸업할 수 있거든요. 그때는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 막막했는데, 막상 실습에 나가 도서관에 있어 보니 의외로 좋은 거예요. 무엇보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공간이고, 제법 할 만한 업무인 데다가 서비스 제공하는 것도 저랑 참 잘 맞았어요. 사람을 만나니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일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 좋다’라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는데, 하다 보니 늘 단골만 오는 거예요. 늘 같은 사람만 만나는 일이 반복되었죠.(웃음) 그래도 사서는 기본적으로 제가 참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요. 쭉 사서로 살아도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정말 제가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업으로 삼을 수 있게 된 지금 느끼는 것은, 작가로 지내는 것이 훨씬 제게 좋다는 거지만요.
다른 공부, 다른 일을 함에도 언젠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말겠다는 마음을 늘 품고 계셨나요? 작가님의 데뷔작이 된 앤솔러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에 참여하시게 된 계기는 작가님의 블로그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직장 생활을 할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요. 영원히 이렇게 살 것만 같았죠. 왜냐하면 그때 저는 작가는 글쓰기를 고통스럽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여겼거든요. 잘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사실 그런 이유로, 익명에 숨어서 글쓰기를 오락으로만 즐기고 싶었어요. 그렇게 블로그에 글을 잔뜩 쓰기 시작했던 건데, 그 글들을 본 한 편집자분께서 제게 “소설도 한번 써보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 전부터도 픽션이 가미된 이야기들을 쓰고는 있었거든요. 그러다 제가 어느 날 “저 이제 캐나다 워홀 갑니다. 한국에 없어요”라고 블로그에 썼는데, 그 소식을 보시고는 바로 만나자는 연락을 주셨어요. 그렇게 처음으로 본격 소설 쓰기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단편 소설 「폴터가이스트」를 발표하게 된 거예요.
그 편집자님께서 ‘김서해’라는 작가를 발굴해내신 거네요.
그렇죠. 제가 블로그에 쓴 글은 제게 호의가 있는 팔로워들이 읽는 것이잖아요. 대부분 제 글에 대해 이의를 걸지 않고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지 “이런 부분은 이해가 안 가는데요?” 하는 반응을 남기는 분은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이분과 함께 작업하기로 한 후 처음으로 프로 입장에서의 유의미한 피드백을 받게 된 거예요. 편집자님께서 객관적인 기준으로 제 글을 봐주셨고, 그게 얼마나 큰 배움이 되었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품게 된 마음은 이런 것이었어요. ‘와, 나 더 잘 쓰고 싶다!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글을 써보고 싶다!’
소설 쓰기를 통해, 작가님께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찾으신 것 같아요. 작가님 안에 늘 있었지만, 꺼내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요.
써보고 싶은 것들을 하나둘 완성해보고 나니 그런 지점에 도달하게 된 것 같아요. 『여름은 고작 계절』은 특히나 장편소설이라 긴 호흡으로 끌고 갈 이야기를 써야 했는데, 제 경험의 일면이자 제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가 실마리가 됐어요. 사실 저는 이민 경험은 없고, 여러 번의 체류 경험이 있는데요. 그렇다 보니 이민자 친구들은 정말 많은 거예요. 그렇게 디아스포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제 안에 자리했고, 이 이야기를 보편적인 방향으로 풀어가려면 성장소설이 맞겠더라고요.

시작은 실로 하나의 장면
『여름은 고작 계절』은 어떤 계기로 구상하게 되셨어요?
저는 어떤 장면을 쥐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써나갈 힘을 획득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어떤 장면을 떠올려봐요.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장면에 대해서요.
그게 소설의 첫 부분이죠?
맞아요. 그 장면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쓰게 됐어요. 재밌는 건, 이 장면은 어느 날 제가 지하철에 있는데 갑자기 떠오른 것이거든요.
언젠가 겪었던 일이었나요?
아니에요. 제 경험과는 무관한 장면이에요. 갑자기 왜 이 장면이 떠올랐는지 몇 날 며칠을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웠어요. 게다가 이 장면은 한 친구가 다른 한 친구를 죽자고 때리는 모습이잖아요. 그렇다 보니 ‘대체 이게 뭐지? 얘는 쟤를 왜 때리지? 나는 왜 이 장면이 갑자기 생각난 거지?’ 하면서 이 생각에만 붙들려 있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데요. 아마도 이 장면을 재가공해 제 머릿속에 재생시킨 단서가 있다면, 영화 〈캡틴 마블〉이겠다는 거예요. 그 영화에 지금 이 장면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장면이 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제스처도 겹치는 건 없고,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측면만 비슷한데요. 그 장면은 바로 캡틴 마블이 각성하는 장면이에요.
영화는 캡틴 마블이라는 사람이 넘어져도 계속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릴 때부터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장면을 연달아 보여줘요. 그가 얼마나 호기로운 태도로 다시 일어나는지 멋지게 그려내죠. 그렇다면 대체 반복해서 때리는 장면과의 유사점은 무엇인지 의문이 생기실 텐데요. 그러니까 제게는 그 호기로운 태도가 주인공 친구가 쓰러진 친구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이유와 맞닿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토록 줄기차게 때리는 건 단순한 구타가 아니라 대단히 납득할 만한 사연이 있다는 것에서 각기 다른 인물이 닮았다고 여긴 것이죠.
여자아이가 여자아이를 때리는 장면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됐다는 말씀이죠?
맞아요. 때리는 사람이 오히려 자기가 맞는 것처럼 괴로워 보이는 장면으로 출발한 거예요.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히 사연이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요.
왜 여쭤봤냐하면, 작가님께서 먼저 상정해두신 사연으로부터 이 장면이 시작되었겠다고 독자인 저는 생각했던 거예요.
원래 이 소설은 긴 단편소설 형태로 습작하던 작품을 뼈대로 해요. 인물들의 구체적인 이름은 없지만, 지금의 주인공들로 이뤄진 이야기였죠. 완전히 다른 두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엄마가 등장하고, 그중 한 명이 누군가의 엄마를 보는 장면 같은 것들이 구체적인 묘사로 쓰여 있어요. 하지만 이런 건 사건이 아니라 이미지니까 분명한 사건을 통해 이야기의 힘을 만들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이 첫 장면이 오기 전까지 이미지들이 파편처럼 자리한 덩어리 이야기들을 써두며 분량을 만들어두었고, 그동안 모아둔 장면들을 재배치하면서 이야기의 얼개를 새로이 직조했어요.
이 소설은 정말로 제 이야기들이 파편처럼 산재해 있지만, 그렇다고 제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적절하게 제가 겪었던 경험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거였고, 첫 장면에 부여한 사연은 이야기 구조의 전략 측면에서 덧붙인 장치가 된 것이에요.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하는 것이 저어되지만, ‘이 장면은 곧 시작이자 마지막’이라는 설명을 빼고는 그 미덕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보통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인데요. 물론 소설에서도 쓰이지만, 대부분 3인칭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과 달리 저는 1인칭으로 썼어요. 그렇게 쓰고 싶었거든요. 만약 3인칭으로 쓰게 된다면, 우선 이야기 맥락을 다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고, 그런 이유로 “이 이야기는 회고록이자 반성문이다”(7쪽)라는 설명이 필요해졌어요.
무엇보다 사실 그 장면에서 제일 명확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바는 제니가 발악하는 모습이에요. 그렇게 발악하는 순간엔 자연스레 모어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자리에 같이 있는 사람들이 “영어로 말해 줄래?”라고 하잖아요. 그 장면을 꼭 쓰고 싶었어요. 무슨 말인지 몰라도 이 애가 무슨 감정인지 다들 알 텐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논리로 영어 사용을 요구하는 거잖아요. 그 사람들은 정말 선의로 이 상황을 도우려 했겠지만, 제니에게는 잔인할 뿐인 거고요.
이토록 감정의 밀도가 높고, 무거운 사건으로 흐르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한번은 대학원 수업 때 한 교수님께서 “시를 쓰려면 그 순간으로 완전히 들어가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로 완벽히 이입해야 한다며, 그게 정말 힘든 작업이라고 하셨죠. 이번 소설을 쓰면서 그 말씀이 뭔지 너무 잘 알겠더라고요. 제 자아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로 제니나 한나가 되거나 제니 엄마가 되어버려서 정말 힘들었어요. 그 인물이 되어 이야기를 쓰려니 감정적으로 버거운 순간이 많았는데, 한편으로 재밌는 부분도 있었어요. 우연히 발견한 쓰기 스킬(?)인데요.
어느 날부터 글을 쓰는 책상 앞에 거울을 갖다 두었는데, 각 인물에 대해 쓸 때마다 우연히 거울로 제 표정이 바뀌는 걸 확인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이 인물이 이런 대사를 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를 생각하며 연기하듯 해보게 됐는데요. 정말 도움이 되는 방법이었어요. 예를 들면, 인물이 화가 났다는 걸 묘사할 때 더 정확한 표현을 쓸 수 있게 되는데요. 아마도 ‘턱 근육이 당겨졌다’와 같은 문장은 직접 화내는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쓰기 어려운 문장일 것 같아요. 거울 보며 쓰기는 이런 정확한 발견을 얻게 해줘요.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성장’이라는 진통
제니의 미국 이민 시간 배경은 IMF입니다. 작가님께서 직접 겪은 시대는 아닐 텐데요. 특별히 이 시기를 택하신 이유가 있으시다면요.
제니와 저의 시차가 좀 있긴 하죠. 그렇지만 제가 태어나서 자라는 시기 역시 IMF의 분위기 속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겪지 않았다고 해도 무척 익숙했어요. 특히 미국에서 체류 중일 때, 제 친구들 가정은 대부분 IMF로 큰 타격을 입어서 그런지 집마다 부모님들이 “우리가 없는 형편에 너 이렇게까지 학교 보내주는데…”라는 말이 떠나질 않았다고 해요.
또 이렇게 시간 배경을 정하고 나서 친구들에게 직접 설문조사를 하기도 했어요. 이민 가정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그렇게 모으고, 당시 기사들도 많이 찾아보면서 이야기 배경이 될 수 있는 재료들을 준비했죠. 이 모든 과정 끝에, 제니의 시점에서 제니가 보는 그 시대는 어떤 느낌이었을까에 초점을 맞춰 써내려갔어요.
우리는 모두 제니와 같은 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습니다. 때로 그 기억 때문에 괴로운 날들이 있기도 해요. 그래서 작가님께서 “이 이야기는 회고록이자 반성문이다”라고 쓰신 그 문장에, 책장을 넘기면서도 자꾸만 맨 앞으로 돌아가 붙들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과거와 화해할 수 있을지, 작가님은 그것을 이뤄내셨는지 궁금했어요.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일을 반성하고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그 잘못이 드러나는 순간 “넌 낙인찍혔어. 끝이야”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강하다 보니 정작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사실 대부분 사안에 있어 어떤 한 사람이 피해자이기만 한 건 아니잖아요. 누구든 양면성이 있죠. 심지어 본인이 피해자인 사건에서조차 가해자성을 지닐 수도 있는데, ‘나는 가해자가 아니야. 완전 깨끗해’를 강조하는 건 그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인 거잖아요. 제니의 모습이 복합적인 건 이런 이유 때문일 거예요. 제니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굉장히 힘들게 만든 적이 있고, 더불어 자신이 싫어하는 자신의 일면을 마주하게 돼요. 제니가 가해자인 면이 부각되는 한편, 그 아이만큼이나 정말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데 말이죠.
게다가 같은 처지의 이민자 셰리에게 거절당하는 경험까지 해요. 경멸받으면서요.
제니는 선택한 거잖아요. 제니로 살기로요. 셰리처럼 줏대 있게 살아가는 걸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 자기 선택에 잘못된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결국 어떤 문제가 일어났기 때문에 제니 스스로가 너무 괴로워진 거예요. 이를 타개할 방법은 자신의 가해자성을 직면하는 것밖에는 없어요. 그렇게 제니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마음을 따라 한나를 아끼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 거죠.
그렇다고 제니가 과거와 화해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늘 이렇게 나아지는 방향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이전의 나보다 좋아질 수 있다고 믿어요. 사실 과거의 일을 반성하기 시작하면, 그것말고도 훨씬 더 많은 잘못을 깨닫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고, 희열도 있다고 생각해요. 내 삶의 지경이 그만큼 넓어진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냥 괴롭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이 소설엔 크리스마스가 중요한 날로 등장해요. 한나와 제니의 관계가 보다 포근한 상태를 맞이하게 되니까요. 이날 이후 한나가 제니를 위한 귀여운 선물을 마련하는 장면이 또 한 차례 등장하는데, 이 선물들이 모두 애처로운 처지에 놓여요. 한나의 온전한 애정이 제니에게 완전히 스미지만, 제니는 한나를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이런 엇갈림이 안타깝지만, 제니는 한나의 사랑으로 성인이 되는 힘을 쌓았으리라 여겨지고요. 작가님께 한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한나를 처음에 구상할 때는 저를 모델로 삼은 측면이 있어요.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영어를 잘 못 하는 저를 통역으로 엄청 도와준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에게 제가 천진난만하게 “너는 여기 몇 년 동안 살았어? 너처럼 영어 잘하려면 몇 년 있어야 해?” 하고 물은 적이 있거든요. 소설 속 한나처럼요. 그 친구는 제니랑은 다르게 너무 상냥하고 모든 걸 진짜 착하게 알려주는 친구였는데, 그 질문을 받자마자 잠깐 정색하더라고요. 그게 너무 기억에 남아요. 순식간에 차가워졌던 그 얼굴이요.
왜 정색했다고 생각하셔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추측하기로는 제 말이 그 애에게 너무 건방지게 들린 것 같아요. 그 친구 입장에서는 ‘네가 얼마 동안 여기서 살든 실력은 늘지 않아. 난 내가 열심히 해서 이렇게 된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미국에서 산다고 영어를 잘하게 될 거라는 믿음이 말이 되느냐는 식으로요. 그리고 이 모습을 제니에게 투영시켰죠.
한나는 선을 넘나드는 인물이에요. 제니에게 한나는 그저 내 영역을 침범하는 존재처럼 느껴져 피곤했을 텐데, 덕분에 제니는 놀랍도록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죠. 그동안 한나에게 스며들었고 그렇게 키운 마음이 한나를 상실하는 것을 통해, 부쩍 성숙해져버리니까요. 쓰면서는 제니의 성장을 위해 한나를 너무 쉽게 앗아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나는 오히려 저이기 때문에 기꺼이 사라지게 할 수 있었어요.
제니에게 한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림자예요. 책에 묘사된 걸 그대로 말씀드리면 “한나는 언젠가 먼 미래에 부스러기가 될 것이다. (중략) 내가 오래전에 입은 화상, 지지 않는 흉, 나를 개조한 신, 내가 절대로 잊지 않을 소중한 그림자”(338쪽)이죠. 둘은 되게 비슷하기도 하고, 떼려야 뗄 수 없기도 하고, 그럼에도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림자라고 할 수 있어요. 한나에서 제니가 되는 과정 역시 그림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렇게 남은 제니는 잘 살아갈까요?
그럼요. 제니는 정말 잘 살아 있을 거예요. 어떤 독자분이 “제니는 작가가 됐을 거예요. 돌잡이로 연필도 잡았잖아요”라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좋았어요. 제니에게 진로가 있다니!(웃음) 저로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제니의 진로를 찾아주셔서 감사했고, 제니는 잘 살아가겠다는 믿음이 다시 솟았어요.
이 소설이 누군가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분들께 가닿기를 소망하시는지요.
이 소설을 쓸 때는 제게 이렇게 많은 독자분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못 했기 때문에, 그저 제게 도움을 준 수많은 친구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해왔어요. 그 친구들뿐 아니라 예전에 저를 알았던 친구들도 이 소설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고, 그 감상을 나누는 기회도 있기를 소망하고요. 무엇보다 이 소설이 정말로 누군가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수 있다면, 모든 분께 가닿기를 바랍니다.(웃음)
작가님의 새로운 작품은 언제 만나볼 수 있나요? 많은 분께서 그 재회를 재촉하고 계시리라 믿어집니다. 소개해주셔요.
문예지 『릿터』와 『주간 문학동네』에 각 한 편씩 발표해요. 『릿터』에는 플래시 픽션 지면에 참여했는데, 행운을 주제로 한 짧은 소설을 싣게 됐고요. 『주간 문학동네』에 발표하는 단편소설은 겨울 소설이에요. 겨울에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주인공이 집에서 쫓겨나 새집을 보러 다니는 이야기예요.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겨울은 고작 계절 (『여름은 고작 계절』 윈터 에디션)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염은영
읽고 쓰고, 엮고 매만집니다. 만든 책으로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가 있습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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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잉보리
202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