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듣는 연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기가 말하고 싶어하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모두 얘기하지만, 역설적으로 잘 들어주지 못 하기 때문에 강조한 거 아닌가? 꾸역꾸역 듣는다 해도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있는 그대로 듣기가 힘들다. <두 개의 문>을 본다는 건 그런 듣는 연습, 블럭버스터의 재미남도, 멜로의 아기자기함도, 화려한 스타도 없지만, 그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이야기지만, 있는 그대로를 들으려는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개의 문>은 2009년 1월 20일 아침에 벌어진 이른바 '용산 참사'를 말하고 있다.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고 철거에 저항했던 세입자 5명과 철거민 진압 작전에 투입된 경찰 특공대 1명이 망루 안 화재로 숨진 사건이다. 영화는 망루에서 충돌했던 양쪽 모두 피해자임을 시종일관 말한다. 가해자는 망루 안에 있지 않았다. 망루 안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건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 하는 것이다. 재개발이라는 탐욕에 눈 먼 천민자본주의의 폭력적 과잉, 공권력을 소유한 기득권 세력의 권력 과잉이 귀를 닫은 채 폭주한 것이다. 그냥 내몰고 다그쳐 부조리의 유증기로 가득 찬 망루에 불을 질렀다.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쌍용차 사태에서 용산으로, 다시 강정으로-요즘은 이들을 일컬어 SKY라고 한다.- 끝나기는 커녕 비극의 전선마저 넓어지고 있다. 무료하게 보낸 하루하루 나의 일상 저편에선 누군가 목숨을 끊고, 누군가 죄인 취급을 받고, 누군가는 절규하고 있다. 들으려 애쓰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듣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아니 듣지 않으면 즐겁게 살 수 있다. 그게 진짜 무서운 거다.
'두 개의 문'은 어떤 의미일까? 잘 모르겠다. 내용 중에 언급되는 건 남일당 건물 맨 위층에서 옥상으로 나가는 문이 두 개다. 두 개의 문 중에서 하나는 망루로 이어지고 하나는 아니다. 경찰은 어느 문이 망루로 이어지는지조차 모르고 진압에 투입됐다는 거였다. 그냥 그런 소재를 제목으로 뽑은 걸까? 아니면 어떤 상징을 내포한 걸까? 진실로 향하는 두 개의 문? 법은 세입자들을 죄인으로 몰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잘 모르겠다. 용산참사 자체가 두 개의 문일 수도 있겠다. 하나는 메트릭스로 가는 문. 행복하게 산다고 착각하고 사는 길이고 하나는 불편한 진실로 가득찬 실재의 사막. 나는 매트릭스를 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