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인 오스틴 첫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
해외 문학 편집자 심하은이 소개하는 매달 한 편의 고전 소설. 거장의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을 함께 읽는다면, 고전 문학의 매력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제인 오스틴 저/임옥희 역 | 펭귄클래식코리아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이 출간을 위해 완성한 첫 소설이자, 작가 사후 우여곡절 끝에 『설득』과 함께 마지막으로 출간된 소설 『노생거 수도원』은 대표작 『오만과 편견』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오스틴의 그 어떤 소설보다도 『오만과 편견』에 가깝다는 평을 듣습니다. 또 기이하리만큼 실험적이고 훨씬 도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도 있지요. 저는 첫 소설다운 재기발랄함과 쿡쿡 웃음 짓게 하는 유머러스함 때문에 이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해서 한 번쯤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부자 이웃인 앨런 씨 부부의 초대로 온천 휴양지 바스에서 신나는 휴가를 즐기게 된, 17세의 어리고 순진한 캐서린 몰런드는 경박하고 이기적인 이자벨라와 존 소프 남매, 예의 바르고 우아한 헨리와 엘러너 틸니 남매 등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난생처음 사교계 생활을 경험합니다. 바스에서의 꿈같은 휴가가 끝나갈 무렵, 틸니 남매는 아버지인 틸니 장군의 저택 ‘노생거 수도원’으로 캐서린을 초대하지요. 이자벨라가 소개해준 고딕소설들, 특히 래드클리프 부인의 『우돌포 성의 비밀』에 영향을 받은 캐서린은 그곳에서 틸니 장군이 저질렀을지 모를 끔찍한 범죄를 상상하여 황당한 소동을 벌임으로써 헨리의 애정을 잃을 위험에 처합니다. 그런 가운데 캐서린은 상상과 현실, 거짓된 친구와 진실된 친구 사이의 차이를 배우며 성장해 갑니다.
그럼 이 책의 첫 문장을 먼저 살펴볼게요. “어린 시절 캐서린 몰런드를 한 번이라도 보았던 사람이라면 그녀가 소설의 여주인공이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꽤 독특하고 흥미로운 첫 문장이지 않나요. 그런 거죠, 무릇 소설의 여주인공이란 응당 눈부신 미모와 지성, 비범한 재능을 자랑해야 하거늘 우리의 주인공 캐서린은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았다. (…) 그녀는 여주인공다운 감정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혔다”는 겁니다. 한데 “자연스러운 감정”이란 오히려 현대소설의 여주인공다운 감정이 아닐까요? 이 작품의 매력은 이전 소설의 관습을 해체하고 새로운 소설 양식을 만들어 나갔다는 데 있습니다. 실험적 소설이라는 평가는 여기에서 나온 거겠지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다음 세 가지 점을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주인공 캐서린의 성장소설이라는 점. 초반에 “사랑의 책략이나 친구 사이의 의무와 같은 것을 충분히 알기에는 너무 경험이 부족했”던 캐서린은 “터무니없는 주장과 뻔뻔한 거짓말, 과도한 허영” 덩어리 이자벨라와 “당신 자신의 이성에 의지하여 있음 직한 일인지 고려해 보고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스스로 잘 살펴봐요”라고 충고하는 지적인 헨리―아무래도 작가의 분신 같아요―와의 만남을 통해 성숙한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둘째 소설에 대한 예찬으로서의 메타소설이라는 점. 캐서린과 헨리의 대화(“소설은 남자들의 지적 능력에 적합한 것이 아니니까요. 신사들은 보다 나은 책들을 읽잖아요.” “신사든 숙녀든 훌륭한 소설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이 멍청한 사람이겠죠.”)에서처럼 여자들이 심심풀이로 읽는 하찮은 장르로 폄하되던 소설을 옹호합니다. “우리 소설가들은 서로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상처받은 존재들 아닌가”라고 외치기도 하지요. 또한 집필 당시 유행했던 고딕소설―소설 속에서는 공포소설이라 부릅니다만―에 대한 풍자로서의 메타소설이라는 점도 있습니다. 고딕소설에 나올 법한 낡은 캐비닛 속 비밀 서류를 가지고 잔뜩 분위기를 잡지만 그 서류는 하인들이 버려둔 세탁 전표에 불과했다는 일화 등을 보면 고딕소설의 낡은 문법을 비판하고 새롭게 다시 쓰기를 한 소설로서 읽힙니다.
셋째 반어적이고 유머러스한 문체, 기지와 재치 넘치는 서술 등으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점. “밀섬 거리에서 이자벨라의 기분을 거슬렀던 두 젊은 남자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끌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세 번 뒤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이런 식의 일화와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웃음을 자아낸다는 게 이 밝고 명랑한 소설의 큰 장점입니다.
“《우돌포》를 읽어보신 적 있어요, 소프 씨?” “《우돌포》요! 저런, 맙소사! 아니요. 난 소설 같은 건 절대 읽지 않습니다. 그런 걸 읽지 않아도 할 일이 많거든요. (…) 행여 소설을 읽는다 치면 래드클리프 부인의 소설은 읽겠지만요. 그녀의 소설은 상당히 재밌거든요. 읽을 만해요. 그녀의 소설에는 재미와 현실성이 있거든요.” “그녀가 쓴 소설이 바로 《우돌포》인데요.” 캐서린은 그에게 망신을 주는 거면 어쩌나 싶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딘가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연상케 하지 않나요? 위에서 엉뚱한 대답을 하는 존 소프와 그의 여동생 이자벨라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최대 빌런들이기도 한데요. 존 소프를 보면 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라고 소리치고 싶고요. 이자벨라를 보면 금방 들통 날 거짓말 좀 그만해, 라고 애원하고 싶어집니다. 혹 비슷한 세계관의 빌런을 원하신다면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을, 좀 더 영리한 빌런을 원하신다면 루이자 메이 올컷의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을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필자 | 심하은
은행나무 해외 문학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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