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희경의 물건들] 발레를 위한 해피 엔딩
<은희경의 물건들> 14화 - 방한화가 된 발레 슈즈
그 시절 우리 참 치졸하고 나이브했지. 그래도 과거의 나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없다면 현재의 내 삶에 어떤 새로움이 있겠어. (2022.10.19)
<채널예스>에서 매주 수요일, 은희경 소설가의 사물에 얽힌 이야기 '은희경의 물건들'을 연재합니다. |
몇 년 전 아프리카의 '별의 동굴'에서 인간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동굴 입구가 25cm도 안 돼서 몸이 작은 여성 과학자가 기어 들어가야 했는데, 그 안에는 1천5백여 개의 유골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학계에서는 장례의식으로 추정했다. 죽음 이후를 상상한 최초의 인류. 그들에게는 동굴의 이름을 따서 '호모 날레리', 즉 별의 인간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해서 소설 속에 '누군가의 애도에 의해 그들이 살았던 생의 내용과 질서를 전해주었을 화석'이라는 문장을 써 넣기도 했다.
'애도'란 과거에 대한 상상의 영역이기도 하다. 우리는 루틴에 이끌려 하루하루 현재를 살아가지만, 때때로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내 삶을 목적지가 아닌 경로로, 루틴이 아닌 지도로 그려보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서른다섯 살에 소설가를 꿈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을 쓰다보면 내가 살아온 과거가 현재의 내 안에서 함께 작동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의 기대에 의해 영특한 아이로 '개발'되었다. 제 이름도 쓰지 못한 채 만 5세에 학교에 들어갔고(운동장을 뛰고 있는 아이들 무리에 끼어들어 같이 뛰는 방법으로. 물론 짧은 다리가 꼬여 곧바로 넘어졌다) 산수를 잘하기 위해 주산을, 교양을 갖추기 위해 피아노를 배웠다. 그 당시 시골에 학원이 있을 리 없으니 모든 사교육은 골방 과외 형식이었다. 나는 또 7세 때부터 짙은 화장을 하고 목걸이며 귀걸이며 각종 장신구를 잔뜩 매달고 무용대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엄마가 특별히 극성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 당시 '치맛바람'이라고 불리던 교육열이, 엄마들끼리 동창이었던 작은 공동체에서 더욱 과열되었던 것 같다. 내 소설에 등장하는 '흥부전'을 주제로 한 무용대회라든지, 인간문화재가 판소리의 고장에 가서 무용 잘하는 소녀를 발굴하는 에피소드는 나의 경험담에서 나왔다.
내가 무용 꿈나무에서 작가를 꿈꾸는 지적인 어린이로 바뀐 것은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영향이었다. 교대를 갓 졸업하고 부임한 그 남자 선생님은 큰 키에 서울말을 썼고, 시골 학교로 발령을 받아 조금 시니컬해져 있는 문학 청년이기까지 했다. 나는 당장 무용 꿈나무를 집어치우고 그 선생님의 지시대로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 열심히 글을 썼다. '나무는 나무는 요술쟁이야, 바람은 바람은 심술쟁이야' 이런 글을 써서 야단을 맞아가며...(그 결과 6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친구에게 보내는 사과 편지에 '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라는 셰익스피어의 말도 잊고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거야'고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의 등장으로 기꺼이 전향을 하긴 했지만 나는 무용인 시절을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춤추는 사람들을 꾸준히 좋아해왔으니까. 아이돌의 세련되고 현란한 춤은 물론이고,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절제된 춘앵무도 좋아한다. 발레단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해서 동영상을 챙겨 보기도 하고. 뉴욕에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백조의 호수> 공연을 보면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연애 감정에 몰입할 수 있었다. 멋진 춤을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머릿속에는 '노구를 이끌고?', '이 나이에 내가 하랴?' 같은 이성의 소리가 울려퍼지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대 중반의 어느 봄날, 마침내 성인 발레 학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 학원이 3개월 뒤 문을 닫는 바람에 춤을 향한 나의 오랜 꿈은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나의 엄마는 지원 자격이 60세까지인 노인 대학의 고전 무용 강좌에 나이를 여섯 살이나 속이고 들어가 '나비'라는 애칭까지 얻어냈건만, 나는 그런 '집안의 기예'를 이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학원을 찾아보지 않은 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신도시에 성인 발레학원이 많지 않아서 50분 가까이 차를 운전해 서울까지 나가야 했다. 학원에 등록은 했지만, 한 달쯤 다니다가 시간을 내기 어려워 결국 포기해야 했다. 그 시절의 기억으로는 주차할 자리가 없어 애를 먹던 것, 그리고 차를 잃어버렸던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내 친구들이 나를 비웃고 싶을 때에 꺼내곤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오는 날이었다. 학원에 도착했지만 그날 역시 차를 세울 곳이 없었다. 골목을 빙글빙글 도는 중에 수업 시작 시간이 지나버려, 초조했던 나는 어떤 건물 앞의 빈 자리가 눈에 띄자, 무턱대고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문을 잠근 뒤, 한 손에는 신발과 무용복이 든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우산을 펼쳐들고는 곧바로 학원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차문을 열려 하니 차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젖은 시멘트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샅샅이 뒤졌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CSI 요원 못지 않은 매서운 눈으로 나의 동선을 한 발 한 발 되짚어 가본 것은 물론이고,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수강생들 사이에 잠입해 학원 바닥에 엎드린 채로 철저한 현장 감식을 했으며, 선생님과 수강생들을 붙잡고 "혹시 어디서 굴러다니는 차 열쇠 못 보셨어요?"라고 날카로운 탐문 수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정확히 나의 성격과 정반대되는 행위였다. 질문은 커녕 남에게 말을 걸기도 어려워해서 『타인에게 말걸기』라는 소설까지 쓴 적 있는 내향인인 나는, 창피하다는 이유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분실물이 남의 건물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의 열쇠인데야... 어쨌든 그 소동에도 불구하고, 그날 나는 결국 열쇠를 찾지 못했다. 보험회사도 도움이 안 됐고, 비오는 저녁에 전화를 받은 카센터 직원도 와주지 않았으므로, 비오는 밤 낯선 곳에 차를 그대로 둔 채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다음날 일찍 다시 가보니 차가 없었다.
맑은 날 맑은 정신이 돌아와서인지, 차를 세워놓았던 건물의 간판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목욕탕이었다. 안에 들어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기 혹시, 저기 있던 차..."까지 말하자마자 목욕탕 주인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라갔다.
"그 차 주인이에요?"
"네."
"아니, 차를 어떻게 그렇게 세워놓고 가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차는 어디로, 도대체 어떻게 간 것일까요. 주인에게 야단을 맞으면서 파악하기로, 내 차가 거기에 없는 것은 아침 목욕을 오는 손님들이 주차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다른 골목 안에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차를 어떻게 옮긴 것일까요?
래커나 차력이 동원된 건 아니었다. 전날 차에서 내린 내가 가방을 챙기고 우산을 펴는 데 바빠서 차 열쇠를 차 지붕 위에 올려놓은 채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게 사건의 진실이었다. 언젠가 뉴스에서 이삿날 잔금으로 받은 돈다발을 차 지붕 위에 그대로 올려놓고 차를 출발시켜서 거리에 지폐 바람을 일으켰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그날 내 친구 하나는 어쩐지 내 생각이 나더라며 안부 전화를 걸어왔었다.
그때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우리 동네에도 성인 발레학원이 생겨서 종종 인스타그램을 통해 구경을 하곤 한다. 언젠가 내가 다시 무용학원의 문을 두드리게 될까. 아니기가 쉽겠지만, 미래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모르는 일이고... 왜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떠올렸는가 하면, 요즘 내가 발레 슈즈를 끼고 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겨울철 발레리나의 발을 보호하기 위한 발레 방한화. 나의 악명 높은 수족냉증을 망치러 온 구원자이다.
가을이 시작되면 나는 수면양말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런데 한편, 갑갑함을 못 견디는 터라 신고 벗기를 반복해야 한다. 전기 발 온열기도 사용하는데 발에 땀나는 것이 싫으므로 그 역시 껐다 켰다를 반복하곤 한다.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발레 방한화이다. 가볍지만 온기를 잘 보전해주고 통풍이 좋아서 발이 답답하지 않다. 내가 발레에 열정과 끈기를 가졌다면, 지금쯤 학원에서 토슈즈 위에 겹쳐 신고 있었을지도 모를 신발. 어린 시절 무용인으로서 꿈꾸었던 발레 슈즈는 지금 수족냉증인을 치료하는 방한화로 귀결되어 내 곁에 놓인 게 현실이다. 그 나름의 해피엔딩 아닐까.
어린 시절의 앨범을 꺼내서 무용 꿈나무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내게 K가 말한다. 자신은 어린 시절 앨범은 부끄러워서 못 보겠다나.
'왜 어린 시절 모습이 부끄럽지?', '힘든 일이 있었나?', '아니면 미숙한 모습이 싫은 건가?'
아니라고 한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그러고 보니 한 친구가 과거 사진으로 나를 협박(?)했던 일이 떠올랐다. 무슨 일로였던지 내가 장난을 치느라 그녀를 놀리자 그 친구가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의 그 사진을 공개해 버리겠다"라며 마치 비밀스러운 사생활이나 약점을 손에 쥐고 있다는 듯이 협박을 했는데, 그 사진이 바로 나의 어린시절 무용복 사진이다. 그 요란하고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내가 부끄러워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아닌데. K도 그렇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각이 각자 다른 것일까.
어쩌면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 우리 참 치졸하고 나이브했지. 그래도 과거의 나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없다면 현재의 내 삶에 어떤 새로움이 있겠어.'
이것은 내가 책에 쓴 문장이다. 아마 나는 우리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과거는 현재 속에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미래의 나에 대한 상상이 현재의 나를 바꾸는 것이라고, 그리고 과거를 장례지내는 것은 현재의 삶에 보내는 간곡한 기원이라고. 그러니까 별의 인간, 호모 날레디가 그랬듯이 말이다.
다음 이야기는 '칵테일과 마작, 뒤라스와 탕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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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이중주」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상속』,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이너리그』, 『그것은 꿈이었을까』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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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우리 시대의 소통 불능의 인간관계를 때로는 외로움의 고통이 묻어나는 정감어린 서술로 때로는 사랑의 미혹을 날카롭게 투시하는 희극적 화법으로 다채롭게 드러낸다. 그러면서 또한 경쾌함과 발랄함의 극치를 보여주며 유목민적 자유를 실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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