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택용의 책과 마주치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와 한국의 시인 고은을 비롯한 30여 명이 대한문 앞 광장에서 손에 책 한 권씩을 들고 읽으며 서 있다. 바디우가 ‘2013 멈춰라, 생각하라! 공통적인 것과 무위의 공동체를 위한 철학 축제’라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 중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대한문에 도착하기 전 마석가구공단에서 이주노동자를 만났고 모란공원에서 민족민주열사들의 묘역을 둘러보고 왔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바디우가 영국에서 출간된 고은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고 고은 시인은 송경동 시인의 시집을, 누군가는 김소월의 시를 읽고 있다는 사실은 부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침묵 속에서 시집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고 그들 옆에는 쌍용자동차에서 일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분향소가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책 한 권씩을 들고 멈춰 서 있을 뿐인데 책은 내용과 상관없는 공감과 참여를 강제한다. 바디우조차 책 읽기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15분간의 침묵 ‘詩위, Protestry’가 끝난 뒤 각자의 손에 든 책은 또 물어볼 것이다. 15분 동안 책을 읽었는지, 공감했는지. 아니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을 힐끔거리기만 했는지.
대학에서 언어학을 배운 뒤 불성실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관뒀다. 사진이 가장 쉽겠거니 지레짐작하고 덤볐다가 여태껏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개인 사진집으로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1,895일 헌정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와 고공농성과 한뎃잠을 찍은 《외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