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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신 대신 나막신을 선물한 이유
유신환, <어린 자식의 나막신에 새긴 글>
가죽신을 신으면 편안하고, 나막신을 신으면 위험하다. 그렇지만 편안하여 방심하기보다는 위험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낫다.
유신환, <어린 자식의 나막신에 새긴 글>
가난한 선비를 예전에는 ‘딸깍발이’라고 불렀다. 딸깍발이는 나막신과 관련이 있다. 나막신은 비 오는 날 신을 수 있도록 굽을 높게 만든 신발이다. 대개 소나무와 오리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든다.
나막신은 굽이 높기 때문에 비가 올 때는 좋지만 무거우므로 먼 길을 가기엔 적당하지가 않다. 부자 양반들은 비싸고 질 좋은 가죽신을 신고 다녔지만 일반 서민과 가난한 선비들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 나막신을 신으면 딸깍딸깍 소리가 난다 하여 딸깍발이란 말이 생겨났다.
봉서 유신환(1801~1859)은 나막신에 각별한 사연을 담았다. 그는 조선 후기 오희상의 학통을 이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학자이다. 시무에도 밝아 적서차별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한인물이다.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고을의 현감이 되어 선정을 펼쳤다. 하지만 평소 원한을 품고 있던 사람의 모함에 빠져 2년 동안 억울한 귀양살이를 했다. 이후로 그는 벼슬길에 미련을 접고 제자들을 길러 내는 일에 여생을 보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자식에게 나막신을 사주었다. 그러곤 옆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써 주었다.
“가죽신을 신으면 편안하고, 나막신을 신으면 위험하다. 그렇지만 편안하여 방심하기보다는 위험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낫다.”
기록에 의하면 유신환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고 하니 어린 딸에게 준 문구일 것이다. 가죽신은 부드러워서 신고 다니기 편안하다. 반면 나막신은 굽이 높은 데다가 딱딱하다. 어린아이가 신으면 살갗이 벗겨지고, 넘어져 다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왜 그는 굳이 위험한 나막신을 사주었을까?
나막신은 신고 다니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쉬우므로 넘어지지 않으려면 늘 조심조심 다녀야 한다. 반면 가죽신은 편안함만 믿고 함부로 뛰놀다가 크게 넘어질 수 있다. 진짜 위험은 위험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함을 모르는 데 있다. 인생길에는 크고 작은 돌부리들이 도처에 있어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당장의 편안함에 방심하다가는 자칫 걸려 넘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곧 나막신에는 약간의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식이 신중하고 지혜롭게 커가길 바라는 아버지의 속정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이서구는 동료인 이만수가 임금에게 나막신을 하사받은 것을 기념하여 목극명을 써 주면서, “나막신은 굽이 높은 신발이므로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나무를 모으듯, 살얼음을 밟는 듯 조심조심 살아가라.”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상황은 다르지만 유신환의 마음과 하나로 통한다.
인간의 진실과 순수가 가장 잘 드러나는 때는 시련과 위기 앞에 섰을 때다. 그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깊어지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한다. 앞날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시련을 끌어안고 견디어 가는 가운데 인생은 더욱 깊고 풍부해진다.
도자기는 수천의 고온을 견딤으로써 질 좋은 물건으로 빚어진다. 강하고 날카로운 칼은 수많은 풀무질과 두드림을 견뎌 낸 결과이다. 온실보다 야생에서 자란 화초가 더 강인하고 생명력이 질긴 법이다. 나막신에 새긴 아버지의 당부에는 고달픈 인생살이를 통해 삶의 이치를 체험했던 한 아버지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옛 공부벌레들의 좌우명 박수밀,강병인 저 | 샘터
옛 지식인들의 삶을 이끈 한마디와 그 문장을 오롯이 드러내 주는 인생의 한 국면을 담은 책이다. 아침저녁으로 눈과 귀로 접하는 해와 달, 바람과 구름, 새와 짐승의 변화하는 모습에서부터 손님과 하인이 주고받는 자질구레한 말들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공부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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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연암 박지원의 문예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옛사람들의 문학에 나타난 심미적이고 실천적인 문제 의식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음미하고, 인문적 관점으로 재사유하는 데 천착해 왔다.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새기고 싶은 명문장》,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연암 산문집》, 《살아 있는 한자교과서》(공저) 등의 책을 썼다.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