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고통과 상처 한글 사랑을 노래한「홀로 아리랑」한돌
한돌 인터뷰
불후의 명곡 프로를 통해 재조명된 곡 「홀로 아리랑」은 1980-90년대 음악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바로 작곡자 한돌을 떠올린다. 1970년대 말부터 그의 노래가 대학가에서 유통되었으니 그의 활동도 어느덧 35년을 넘겼다. 1989년부터 한돌타래라는 제목으로, 직접 노래한 앨범을 내고 있는 그가 올해 초 앨범 < 한돌타래 571 가면 갈수록 >을 가지고 돌아왔다.
불후의 명곡 프로를 통해 재조명된 곡 「홀로 아리랑」은 1980-90년대 음악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바로 작곡자 한돌을 떠올린다. 이 곡은 1990년 서유석의 노래로 알려졌고 지난 2005년 조용필이 평양공연에서 부르기도 하는 등 명작의 위상에 올라 있다. 그는 신형원에 의해 대중화된 「유리벽」, 「개똥벌레」, 「터」, 한영애의 걸작 「여울목」과 「조율」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1970년대 말부터 그의 노래가 대학가에서 유통되었으니 그의 활동도 어느덧 35년을 넘겼다. 1989년부터 한돌타래라는 제목으로, 직접 노래한 앨범을 내고 있는 그가 올해 초 앨범 < 한돌타래 571 가면 갈수록 >을 가지고 돌아왔다. 15년 만에 내놓은 2009년 앨범 < 그냥 가는 길 >로부터 근 5년만이다. ‘가면 갈수록’이라는 제목은 “음악을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그를 일산 고양아람누리 극장 근처의 카페에서 만났다.
한돌의 음악은 크게 독도를 노래한 「홀로 아리랑」이 말해주듯 이 땅에 대한 애정, 우리네 삶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우리말 한글 사랑이란 3가지 코드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가운데 한글 사랑은 단순한 애정을 넘는 신념이 묻어납니다. 앨범 타이틀의 571도 한글 창제 이후 571년 후에 발표되었다는 의미라면서요. 주된 테마로 사용하는 독도에 대한 태도는 이 땅에 대한 애정의 표현일 텐데 왜 독도인지 궁금합니다.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있다면 이렇게 편히 노래를 못했을 것 같아요. 한글은 우리말이니까 당연히 하는 것이고, 독도는 우리 동네니까 자연스레 이야기의 소재로 드러나는 것이죠. 특히 독도는 백두산과 제주도 사이의 한 중간, 남북이 만나는 접점이잖아요. 통일에 대한 염원도 독도에 관한 노래들에 같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나오는 것들이지, 특별한 사유는 없죠.
「홀로아리랑」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외롭다는 느낌을 주려고 홀로라는 말을 쓴 게 아닙니다. 독도가 홀로, 혼자서 노래를 부르면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도로 붙인 거죠. 굳이 여기에 일본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지요. 넣지도 않았고. 우리 얘기만 한참 해도 모자라잖아요. 그런데 독도 얘기를 시작하면 일본부터 꺼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안 그래도 되는데. 지금도 방송 매체에서 독도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전 도망가요. 쑥스러워서 막 굳어지거든요. 뭐 독도지킴이, 독도사랑꾼 막 이런 식으로들 붙이잖아요. 하지만 그런 개념하고는 전 거리가 멀죠. 전 그냥 우리 동네 이야기를 했던 거니까요.
2005년에 조용필 씨가 「홀로아리랑」을 평양콘서트에서도 불렀죠.
들어봤죠. 자랑스럽지요. 다른 가수 노래는 거의 안 부르는 사람이잖아요. 굉장히 고맙고, 그 노래를 택할지 몰라서 또 놀랬고요. 평양콘서트 때문에 생긴 웃기는 일도 있어요. 언젠가 북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자기네 노래인 줄 알더라고요. “선생께선 모르십니까. 조용필 씨가 평양에 와 특별히 부른 우리 노랜데.”하면서요 이것 참... (웃음)
이번 음반 < 가면 갈수록 >을 얘기하지요. 발표하고 들었던 기분은.
좋았죠. 숙제를 하나 했구나. 물론 숙제는 또 생기지만.
그럼, 앨범을 만들 때의 마음 상태는 어땠습니까. 전작 < 그냥 가는 길 >을 낸 2009년으로부터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요.
큰 차이는 없었고요... 다만, 눈에 보일 정도로 두려움이 커지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창작에 있어) 더욱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갈수록 고민만 커지네요. '아 이거 발표해도 괜찮나' 하는 갈등이 갈수록 커집니다.
한편으로는 그 두려움을 벗고 앨범을 낼 수 있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지난 앨범 < 그냥 가는 길>이랑 이번 앨범 < 가면 갈수록 >을 동시에 놓고 보면 걸음이 쭉 이어지고 있잖아요. 먼 길을 걷긴 해도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노래도 결국 안고 가야하고요. 여기서 주저 앉아버리면 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테죠. 그런 마음에 기대서 해나갑니다. 다음에 나오는 음반의 제목은 < 머나먼 길 >이 될 예정이에요.
수록곡 「노래는 떠나가고」에는 과거에 만든 노래에 사과하는 대목이 들어가 있죠. “욕망에 눈이 멀어 노래를 아프게 했네”라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를 담은 곡인가요.
검열이란 게 있던 예전의 이야기예요. 그 때 많은 곡들이 고난을 겪었잖아요. 사실 검열망에 들었다고 해서 굳이 노래를 고치거나 덧칠할 필요는 없었어요. 제가 안 하면 그만이죠. 하지만 그 때의 전 무명신세에 있었고, 딱히 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때의 제 욕망에 노래가 더렵혀진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썼던 노래예요.
그럼 한돌을 널리 알려줬던 신형원의 「유리벽」이나 「불씨」 같은 노래들도 욕망에서 비롯된 작품입니까.
그 곡들은 애초에 검열에서 무사히 지나갔기에 욕망을 더하고 빼고 할 이유가 없었어요. 제가 아프게 했다는 노래들은 통과되지 못해서 고쳤던 결과물들을 가리키는 겁니다. 발표 안 한 곡들도 많아요. 어떻게 보면 살아남은 것들이죠.
그럼 훼손되지 않은 노래를 모을 수 있는 기회도 올 수 있겠군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전처럼 자주 녹음을 못 하는 게 걸리긴 합니다만, 여건이 될 때마다 할 수 있도록 해야죠. 좋은 가수를 만나야지요. 이게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임진모 씨가 제 노래를 잘해줄 가수를 찾아주세요. (웃음)
수록곡 「소벌따오기」에서의 트럼펫 연주는 인상적입니다. 트럼펫 소리가 곡에 꽤나 잘 들어갔더라고요.
'이 곡에는 이 소리가 딱이다' 싶은 그런 느낌 있잖아요. 「소벌따오기」가 딱 그랬죠. 여기엔 무조건 트럼펫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에서의 하모니카 연주는 어떤가요. 근래 듣기 어려운 거칠고 이지러진 소리지만 너무 조화로운 음색이었어요. 초창기 밥 딜런의 음반에서 만나봤던 사운드라고 할까요. 연주도 직접 했나요.
직접 했어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모니카가 거부감이 올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네요. 조금 우려했던 저로서는 의외의 반응인지라.
「까레이스키 살랏」에서는 러시아 음악과 우리 뽕짝의 느낌이 공존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했어요. 까레이스키(고려인)라는 개념 때문에 러시아의 분위기를 많이 가져가야했죠.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풍만을 전하는 것은 또 아니고, 우리 것의 느낌을 분명히 담을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런 풍의 노래는 의외의 접근, 非한돌적인 접근이라고 하자) 그렇죠. 맞아요.
「도라지 꽃」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다룬 곡이죠. 슬픈 분위기가 러닝 타임을 지배합니다.
보컬 해준 '모두나' 씨도 부르고나서는 슬퍼서 한참동안 울었다고 해요. 사실 17년 전 곡입니다. 원래 만들면서는 일본 가서 발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다른 사람 목소리를 싣고 싶은데 곡 배경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다보니 주위에서 선뜻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꽤 두고 있던 와중에 어느 날 기획사 대표가 여기에 잘 어울린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며 곡을 두고 가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성악을 전공한데다 노래 부르면서는 기타도 직접 쳤다고 하네요. 실은 모두나 씨를 아직도 못 봤어요.
마지막 곡 「내 꿈이 걷는다」는 앨범 마무리와 아이들 합창이 잘 어우러졌습니다.
1999년에 제가 목포에서 임진강까지 쭉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굉장히 보람찬 일이었어요. 「내 꿈이 걷는다」는 당시에 같이 걸었던 대안학교 아이들을 보면서 만든 노래에요. 그 걷기 활동이 학생들 입학식 행사였는데, 아무래도 고되기도 한 일이니 애들 걸음에서 기운 빠지고 힘든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그 때 조금이라도 밝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착안했죠. 사실 제대로 완성되는 데까지는 2년이 걸려서, 노래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제 때 못 지킨 셈이 됐어요. (웃음) 결국은 학생 친구들이 불렀지만 어른들에게도, 이 나라에도 희망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가사가 먼저 나온 곡입니까, 곡이 먼저 나온 노랩니까.
가사가 먼저 나왔죠. 걸었던 그 때부터 갖고 있었어요.
한돌 음악의 중심축은 가사입니다. 이번 음반에서 보여준 노랫말들을 자평하신다면.
아무래도 예전보다 노래를 쓰는 속도가 줄었어요. 자꾸 아쉬워하게 되고 곱씹어보게 되요. 이거 괜찮은가 하면서 시간을 두고 계속 생각하는 결벽증 비슷한 습관까지 생겼습니다. 늙어서 그런가요. (웃음) 그런데 막상 오래 들여 써보면 제일 처음 했던 생각과 결국 똑같거든요. 살아오며 매번 느끼는 건데도 계속 이러네요.
그간 많은 곡을 써왔습니다. 직접 불렀던 노래들은 물론 신형원의 「불씨」, 「유리벽」, 「터」, 「개똥벌레」, 한영애의 「여울목」, 「조율」 등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탔던 작품들까지 더하면 그 수가 상당한데요, 그 중에서 가장 아끼는 곡은 어떤 것인지요.
가장 아끼는 곡은 잘 모르겠고요. 한영애 씨가 불렀던 「갈증」이 애착이 많이 갑니다. 한편으로는 아쉽기까지도 하죠. 그래도 한영애 씨한테 갔던 노래 중에서는 「여울목」이 최고죠.
「갈증」은 (한돌씨가) 직접 부르기에는 힘든 곡인 거죠?
어유, 그건 일단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 불러야 해요.
신형원의 노래 중에서는 뭐를 꼽으시나요?
「터」로 하겠습니다. 대청봉에서 완성했던 노랜데, 그거 만들고 나서 좋다고 뛰어 내려오다가 넘어졌죠. (웃음) 군대에서 쓰기 시작하다 안 써지는 상태로 1년을 내버려뒀던 터라 더 신나했던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대청봉에 올랐다가 구름바다를 앞에 두고서 '설악산을 휘휘 돌아 / 동해로 접어드니' 요 대목이 그냥 쫙 풀리더라구요. 그때부터는 함부로 '노래를 만든다'고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이건 내가 만든 건가, 산신령이 던져준 건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요.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한돌 음악은 포크입니까.
제가 언급을 여러 번 한 것 같은데 정확히 전달이 안 된 모양입니다. 주위에서 자주 물어봐요. 한돌 노래는 어떤 장르의 음악이냐. 사실 대답할 말이 없더라고요. 크게 묶어서 포크라는 범주에 많이들 넣기는 하는데 저는 제 노래들이 포크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그럼 이렇게 된 거, 내가 내 노래에 이름을 지어줘야겠다'하는 결론에 닿았죠. '타래'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 거예요.
앨범에 늘 붙는 '한돌타래'라는 말은 결국 '한돌의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겠군요.
그렇죠.
그렇다면 '타래'는 어떤 경로를 거쳐 나오게 된 말인가요.
타래라는 우리말 단어에는 '느끼다'라는 뜻이 있대요. 예를 들면 '소름을 타다'라고 흔히들 말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노래를 다 같이 느껴보자, 타자는 생각을 담고 싶었어요. 그리고 아래 아(ㅌㆍ래)로 표기해줘야 하고요.
음악을 꿈꾸기로 결심했을 때 주로 영향을 준 아티스트는 누구였습니까.
지금 돌아보면 피터, 폴 앤 메리가 가장 컸어요. 집 앞에 커다란 전파상이 하나 있었거든요. 「500 miles」가 나왔는데 무슨 이런 노래가 다 있나 하면서 들었던 거 같아요. 노래도 그쯤서부터 찾게 됐고요. 심지어 이 사람들이 무슨 마음으로 이런 노랠 썼을까 하고 상상도 했어요.
오랫동안 세상에 대해 노래해오셨죠. 평소 이 세상과 세상살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뭐... 하루라도 빨리 산속에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웃음) 사실 산에 들어가고 싶다고는 했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등지고 살기도 쉽지 않죠. 글쎄요, 나를 지키지 않고 사는 게 도리어 편한 것 같기도 합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 일들을 이리저리 더 복잡하게 만들기보다는,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 주변을 정리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렇게 사는 게 더 낫겠다 싶기도 해요. 물론 절대 쉽지 않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게 단련이 돼서, 우스운 말로 포기하자고 얘기하는 데에 적응이 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마음이 복잡할 때 꺼내드는 해결책이 있나요.
전 산에 종종 올라갑니다. 산에 올라가면 내가 보이고, 산에서 내려오면 날 두고 온다는 마음이 들어서 좋아요.
2012년에는 독도사랑 음악회 <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도 열었습니다.
보람이 컸죠. 독도 노래만 갖고 하는 첫 공연이었고, 오랜 생각 끝에 개최했던 공연이라 큰 보람을 느꼈던 것 같아요. 기획 단계에서 마찰도 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말 잘 된 음악회였죠. 저 말고도 성악가가 나와 노래도 부르고, 저는 저 나름대로 곡마다 설명을 붙이는 내용까지 채우기도 했죠.
40년 가까운 음악 인생 가운데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궁금합니다.
크게 기억나는 것은 없어요. 즐거웠을까요. 글쎄요, 크게 즐겁진 않았던 것 같아요. 하늘에서 던져준 내 일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해왔으니까요. 그 일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오고 외부와 연결되는 지점서부터는 큰 즐거움은 못 느꼈던 것 같아요. 다만 일 안에서 벌어지는 즐거움은 정말 많았죠. 이걸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요. 그렇게 계속 해왔네요.
인터뷰, 정리: 임진모 이수호
사진: 이한수
2015/03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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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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