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떠나는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 『깊은 여행』
더 긴 ‘지금’과 더 큰 ‘여기’ 흔들의자에 앉아 세상을 만나는 즐거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여행에 관한 책이 아니다. 굳이 여행과 연결 지어 보자면, 이 책의 원어 제목을 직역한, ‘움직임’ 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어떨지.
나는 여행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명소에서 관광객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은 도리어 내가 구경거리가 되는 것 같아서 싫었고, 그렇다고 남들은 가지 않는 미개척지를 발굴할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런 성향은 환경적인 요인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아버지는 늘 여름마다 한 번쯤 일간지 1면을 장식하는 해운대 인파를 보면서 “어디 바다에 발은 적시고 오겠냐” 며 혀를 차시는 분으로, 자고로 남들 움직일 때는 집에서 쉬는 것이 최고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다며 산으로 놀러 가자며 때를 쓰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은, 어린 마음에도 내리 쬐는 태양을 맞으며 타인과 부대끼는 것보다 시원한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엄마가 주시는 수박을 먹는 것이 더 득 될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그러면 이건 환경이 아니라 천성인건가?
아버지마저 대학생일 때 한 번쯤은 멀리 여행을 해야겠지 않느냐며 등을 떠미셨던 이십 대 초반에도 결국은 떠나지 않았던 건, 이미 이런 생각이 굳어졌고, 무수히 여행이며 연수를 다녀오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대체 신통한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동하는 수고로움, 비용, 환상적인 안내 책자(or 여행 후기)와 현지의 갭 등등. 그 정도 노력을 들인 일상에서의 탈피라면 대단히 마음의 안식이 되어주던가, 몸의 휴식이 되던가, 아니면 한 사람의 무언가를 변화시킬 만큼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여행은 들이는 노력에 비해 남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그래서-상대적으로 휴가 기간이 짧은 대한민국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입사하고 첫 여름 휴가를 맞았을 때, ‘휴가=여행’인 주변 분위기가 상당히 낯설기도 했다. “**씨는 이번에 어디 가?” 라고 묻는 물음에 “네… 저는 그냥 집에서 쉬려구요”라고 대답 하는 일이 어쩐지 오답인걸 아는데 뭐라도 적어 내야 하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던 내가 여행에 재미를 느낀 건 입사 후 두 번째 맞는 여름 휴가 때였다. 제법 마음이 맞는 동기들과 2박 3일의 여행 계획을 짤 때만 하더라도, ‘친구랑 여행 갔다가 완전히 틀어지는 경우도 있다던데’하는 걱정이 마음 한 켠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그 2박 3일은…정말 즐거웠다.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기웃기웃 유명한 관광지며 맛집을 찾아 다니는 것도, 낯선 곳에서 긴장과 여유를 적당히 조화시켜 마음을 풀어 놓는 것도, 심지어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것 까지도 새로운 경험이 주는 설렘과 흥분이었다. (동행인들이 심히 괜찮았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기는 하다) 여행을 하지 않는 것은 삶이라는 책의 한 페이지만 읽는 것과 같다, 고 지나치듯 읽었던 구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었달까. 나에겐 여행지이지만, 그곳을 생활의 반경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전에는 거북했다면 이제는 적당한 관심과 동경을 가질 여유가 생긴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여름의 열기가 끝날 무렵, 나는 또 무작정 일본 여행을 결정해 버렸다.
태어날 때부터 역마살이라도 품고 있던 것처럼, 그 후부터 나는 늘 어딘가 가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 안달을 못 참고 무작정 떠나 본 곳도, 아직 열심히 꿈꾸고 있는 곳도, 나에게는 모두 ‘여행’이라는 환상의 이름으로 같은 목록에 묶였다. 저 땅끝 남해와 붙어 있다는 어느 이국적인 도시, 쇄빙선을 탈 수 있다는 섬부터 모래 언덕이 있는 사막까지. 여행지에 대한 정보는 찾으면 찾을수록, 죽기 전에 내가 이걸 다 가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끝이 없었다. 그런데 30년 이상을 기자로 활동한, 세계 지도를 펼치면 안 가본 곳을 꼽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은 이 아저씨는 ‘흔들 의자에 앉아서 마음으로’ 여행을 하라니. 그래, 당신은 가볼 만큼 가봤다 이거지, 하는 마음으로 『깊은 여행』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여행에 관한 책이 아니다. 굳이 여행과 연결 지어 보자면, 이 책의 원어 제목을 직역한, ‘움직임’ 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어떨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심지어는 너무 당연하게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임무를 여행에게 맡긴다. 새로운 볼거리, 먹거리, 사람들, 자극이 되는 모든 것들은 분명 여행이 주는 즐거운 요소들이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어긋난 일정, ‘새롭다’는 말로는 커버하기 힘든 현지의 불편함, 인파, 바가지 등도 마찬가지로 여행에 포함된다. 전자를 더 크게 보는 긍정적인 이들도 분명 많겠지만, 그런 그들 마저도 ‘집떠나면 고생이지’ ‘역시 집이 최고야’라고 느끼는 순간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불평하더라도, 또 다음 휴가가 오면 어김없이 여행지를 찾아 표를 끊고야 만다. 이렇게 습관적인(거의 의무적이기까지 한) 여행의 반복이, 과연 일상에 ‘활력’을 줄까?
여행의 본질은 ‘변화’에 있다고 옮기는 토니 히스는, 그저 ‘떠남’을 위한 여행에 젖어가던 나를 멈추게 한다. 낯선 풍경, 낯선 시간, 익숙한 이곳이 아닌 그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움직임 속에서 내 마음과 몸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이 책은, 문득 여행을 시시한 것으로 생각했던 내 시절과 그 이유를 떠오르게도 했다.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여행의 진짜 모습은 반의 반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반드시 낯선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되는, 지금 당장 여기서도 할 수 있는 토니 히스의 『깊은 여행』에는 ‘그곳’ 이나 ‘그 때’가 아닌 ‘내가 머무는 지금, 여기’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토니 히스> 저/<김양희> 역13,500원(10% + 5%)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업무나 공부에 지친 우리는 늘 어딘가로 떠나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휴가철이 되면 푸르게 빛나는 바다, 깜깜한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 이국적인 음식과 분위기를 기대하며 여행을 계획하기 바쁘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면 빠듯한 일정과 기대하지 않았던 돌발 상황, 인파와 바가지 요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