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친일파, 어쩌면 당신이 될 수도 있다 - 원종우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역사를 공부한 이유는 한국 사회가 촌스러워서
인류가 좌절하고 실패했을 때, 이에 대한 이유와 과정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슬픔까지 느끼는 게 중요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도 제국주의자, 인종주의자가 될지 모른다. 히틀러, 친일파를 나쁜 놈으로 몰아버리면 끝일까? 그들 중 일부는 확신범이었다.
예스24와 한겨레, 위즈덤하우스가 주최한 ‘아름다운 책 이야기’에서 원종우 씨를 만났다.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유럽편』을 쓴 그는 현재 딴지일보 논설위원으로, 책의 내용도 원래는 딴지관광청(현 노매드 21)의 ‘파토의 유럽 이야기’에 기고했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근대성을 고민했다는 저자의 고백답게, 이 책은 절반 이상을 근대에 할애했다.
록 뮤지션, 인디레이블 개척자 등 다양한 이력으로 활동한 원종우 씨인 만큼 책의 내용도 ‘믿거나 말거나’ 식, 가십 위주일 것이라는 추측은 금물. 이 책이 서술하는 유럽 역사는 상식 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스 사상과 로마법 체계로 흥하던 유럽이 교조화된 기독교를 만나 암흑시대인 중세로 접어든다. 중세는 이전 시대보다 발전한 면도 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퇴보한 시기였다. 그러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독립을 지향한 근대가 시작된다. 근대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 인종주의 등 어두운 역사도 근대 이면에 존재했다는 게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유럽편』의 내용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책이 꽤 딱딱해 보이지만, 중간 중간에 저자만의 시선과 재미있는 이야기(어떤 교황은 여성으로 추정된다, 마녀 사냥에서 죽은 사람 중 많은 수가 남자다 등)를 추가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512쪽이라는 두꺼운 책임에도 역사와문화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책 출간을 기념하여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열린 이날 강연에서 원종우 씨는 크게 2가지 주제로 나누어 강의를 진행했다. 자신이 역사를 공부한 이유,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역사를 공부한 이유는 한국 사회가 촌스러워서
록 뮤지션으로도 활동했던 저자는 학창 시절부터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가 좋아했던 노래 중에 영국 밴드 퀸(Quuen)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있다. 당시 세계적으로 명곡으로 인정받고,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 곡은 한국에서 1989년까지 금지곡이었다. 가사 중에 ‘just killed a man’이라는 구절 때문이다.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주제는 고려하지 않고, 가사 중 일부가 살인을 표현한다는 점만으로 금지곡으로 정한 것이다. 퀸의 노래 외에도 당시에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금지곡이 된 노래가 많았다. 원종우 씨는 이런 모습을 보고 한국 사회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회가 촌스러우니 학교도 촌스러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반장 모임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자유롭게 말하라고 했다. 당시 반장이었던 그는 교복 착용과 두발 단속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나갔다. 학생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하라고 했지만, 자유롭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자리였다. 저자는 이런 촌스러움이 한국사회가 전근대적이라서 생겼다고 믿었다.
캐나다에서 2년, 영국에서 4년 살기 전까지 저자는 백인사회를 막연하게 동경했다. 선진국이니 우리 사회에 있는 촌스러움보다는 세련되었을 거라는 기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곳에도 전근대성은 있었다. 천국이라 생각하던 벤쿠버에서 저자는 인종차별 발언을 듣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전근대성의 다른 말은 맹목성이고, 다름에서 오는 공포를 맹목적인 증오로 표출하는 게 인종차별이다. 보통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은 몽매한 상태에서 앎을 거부한다.
근대성은 독립이다
‘전근대성’이라는 말의 대립항은 ‘근대성’이다. 저자가 유럽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성은 서구 유럽에서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학자에 따라 근대성을 다르게 정의하지만 원종우 씨는 근대성을 ‘독립’으로 이해한다.
“근대성이란 인간의 독립이다. 여기서 독립은 신, 자연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한다. 독립이 정복, 부정은 아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독립할 때를 생각해보자. 부모님을 정복하거나, 부정하는 게 아니지 않나. 마찬가지다. 신, 자연으로부터 독립이라고 해서 이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권위를 빌리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는 게 독립이다.”
인간이 홀로 설 수 있기를 지향한 게 근대성이고, 근대성은 유럽이 만들었다. 그렇다면 유럽의 역사는 근대성을 확립한 역사일까. 여기서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유럽이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를 추구했지만 역사는 근대성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잘 이해가 안 가는 말일지 모르나,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양차 세계대전, 식민지에 가해진 백인제국의 폭력 등 근대에 이루어진 비이성적인 사건을 떠올린다면, 원종우 씨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우리도 히틀러처럼 될 수 있다
이어서 저자는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역사를 공부하면 인류사가 저절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 탄생했다. 삼황오제 시기를 동경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관이나, 역사는 발전이 아니라 순환이라 생각한 고대 인도의 역사관이 이를 증명한다. 핵으로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는 현대는 역사의 쇠퇴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고할 수 있는 시대다.
“역사를 보면 3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둘째,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셋째, 인간이 만든 모든 사상은 훌륭하지 않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좌절과 실패를 수없이 목격한다. 인류가 좌절하고 실패했을 때, 이에 대한 이유와 과정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슬픔까지 느끼는 게 중요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도 제국주의자, 인종주의자가 될지 모른다. 히틀러, 친일파를 나쁜 놈으로 몰아버리면 끝일까? 그들 중 일부는 확신범이었다.”
저자는 12월에 치러진 대선을 경험하며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지난 대선은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양쪽으로 진영이 갈린 선거였다. 각자 주장이 다르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데, 두 진영 간 벌어진 틈이 너무 길고 깊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역사를 공부한다고 해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상대방이 왜 저런 주장을 하는지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역사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딴지관광청(현 노매드21)에 〈파토의 유럽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약 5년 동안 연재된 내용을 보완하고 정리한 이 책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유럽(인류)의 역사는 시간순으로 발전하고 진화했는가?’ ‘나폴레옹은 위대한 영웅이고 히틀러는 독재자였나?’ ‘영국의 명예혁명은 정말 명예로웠는가?’ ‘우리는 근대를 지나 현대에 살고 있는가?’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 미국의 자유와 평화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는 유효한가?’ 등 우리의 역사적 상식에 물음표를 던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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