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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소셜 맥거핀]음모론적 주체와 ‘등가교환의 쾌락원리’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꿈꾸면 혁명은 현실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반동을 꿈꾸면 반동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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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진보진영의 아름다운 격언은, 분명히 어떤 무거운, 혹은 무서운 진리를 누설하고 있다. 허구적 관념에 대한 다수의 믿음 또는 환상이 물적 토대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진리 말이다. 그 진리는 또한 언제든 우파 혹은 파시스트에 의해서도 구현될 수 있다.

*소셜 맥거핀?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은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은폐?왜곡하는 사이비 적대를 의미한다. 사이비 적대는 무지한 대중을 향한 여론조작이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단순히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계몽된 대중’이 즉각적으로 체험하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심지어 스스로 재구성하는 ‘과잉의 현실(hyper reality)’이다.

지배 이데올로기 이론의 낡은 판본들은 지배계급이나 구조가 만들어낸 갖가지 이데올로기를 환상이나 착시로 치부한다. 그래서 피지배계급이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진실’을 깨닫는 순간 그 환상이 산산조각날 거라 확신한다.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 민족주의는 허구적 민족 개념을 마치 영원불멸의 실체로 생각한 데서 비롯한 환상일 수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역저 『상상의 공동체』는 바로 그런 주술적 믿음을 논파하는 이성적 사유를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라 하겠다. 그러나 그 ‘상상의 공동체’에서 비롯한 민족주의는 실제로 민족 간 분쟁이나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앞으로는?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민족’을 객관적 실체로 착각하는 것은 그렇게 만드는 객관적 제도, 역사적 사물, 문화적 전승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제도와 사물과 전승들은 단지 민족이란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그 자체로 다양한 사회적 의미를 표상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국가장치들이 그렇게 존재한다.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조차 일소하지 못했던 걸 보더라도 민족이란 관념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설령 크리스천의 신과 무슬렘의 신이 설령 ‘뇌의 착각’에서 나온 순전한 허구일지라도 두 진영의 천 년 가까운 반목이, 그리고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공격이, 『만들어진 신』과 같은 몇몇 오지랖 넓은 과학자들의 ‘신(神) 존재증명’ 등을 통해 사라질 수 있을 거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도리어 신에 대한 믿음이 그런 과학적 계몽으로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소셜 맥거핀 론의 주된 분석대상이라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진보진영의 아름다운 격언은, 분명히 어떤 무거운, 혹은 무서운 진리를 누설하고 있다. 허구적 관념에 대한 다수의 믿음 또는 환상이 물적 토대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진리 말이다. 그 진리는 또한 언제든 우파 혹은 파시스트에 의해서도 구현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혁명을 꿈꾸면 혁명은 현실이 되고, 많은 사람이 반동을 꿈꾸면 반동이 현실이 된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사회적 실재의 차원에 올라선 음모론, 소셜 맥거핀은 이른바 ‘카더라 통신’의 차원을 넘어서 ‘물화한 음모론’이며 실재의 틈새를 찢고 올라온 에일리언이다. 그 에일리언의 숙주가 바로 음모론적 주체다.


한국형 평등주의와 등가교환의 쾌락원리

한국사회에 음모론이 창궐한다는 것은 곧, 구성원이 음모론적 주체라는 뜻이다. 한국의 음모론적 주체를 크게 세 가지 특징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것을 각각 ‘등가교환의 쾌락원리’ ‘진정성 넘치는 냉소주의’ ‘역동적 중립주의’로 형상화하기로 한다.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라는 것이다. 반면 한국형 평등주의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으로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 삼는 데 비해,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 삼는다. 전자의 처지에 서면 필연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처지에 서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 박권일, 부자에게 유리한 한국형 평등주의, <시사IN> 56호 2008.10.06.

‘한국형 평등주의’는 결국 자기 자신(“내 새끼들”)과 남(“남의 새끼들”)과의 차별 또는 차등, 타자를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이다. 그래서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 삼지 않고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 삼는 자신의 모습에서 어떤 모순도 느끼지 못한다. 이 말은 사회가 너무나 불평등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평등’이 공허하고 현실감 없는 단어가 되어버린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 한국형 평등주의의 이면에 그것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원칙, ‘등가교환의 쾌락원리’가 도사리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핵심교리가 있다. 이를 ‘공리’라 표현해볼 수도 있겠다.

제1공리는 ‘고통은 피할 수 없고, 쾌락과 교환된다’는 명제다. 군대나 학교에서 오랜 세월 대물림되어온 억압과 폭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전형적인 논리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겪는 고통만큼 나중에 쾌락을 얻을 수 있고 또 얻어야 한다는 보상심리, 그리고 내가 겪었던 불합리한 고통을 너 역시도 겪어야 한다는 일종의 ‘물귀신’ 심리이다. 전자는 “공짜점심은 없다”는 자기계발서의 싸구려 아포리즘으로, 후자는 “나도 겪은 일이니 너도 참아”라고 말하는 군대 고참이나 직장 선임의 원한감정으로 끝없이 재생산되어왔다.

그렇다면 불합리한 고통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가능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이다. 그것은 경제자본만이 아니라 사회자본과 타고난 외모나 능력까지 포함한 자본, 어떤 형태로든 교환 가능한 총체적 자본을 가리킨다. ‘등가교환의 쾌락원리’의 제2공리는 그래서 ‘자본이 고통을 대체할 수 있다’는 공리이다. 부와 능력을 소유한 개인은 어떤 사회적 의무나 하기 싫은 작업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고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믿음이다.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한국사회에서는 일부 종목의 세계대회 성적 우수자가 군 면제를 받는 것이 관행처럼 당연시되어왔다. ‘등가교환의 쾌락원리’가 보여주는 바는 명확하다. 자본(능력)에 따른 차별을 생래화/자연화 시키는 것.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일상화되고 내면화된 신자유주의 그 자체가 아닌가.

‘한국형 평등주의’와 ‘등가교환의 쾌락원리’가 몸에 밴 사람들은 사회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걸 선호한다. 그들은 사회에 문제가 많다고 여기지만, 원하는 건 ‘내가 부자 되는 것’이지 ‘부자의 부를 빈자에게 재분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 소위 ‘예비 부자’‘예비 CEO’들에게 음모론은 결코 계급의 문제로 인식되지 못한다. 이것은 계급 간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의 파이를 독점할 수 있는 극소수의 자리를 둘러싼 개별자들의 배틀로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그 독점좌석에 앉을 수 있느냐 여부이다. 그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드는 사회적 변화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음모가 된다. 이들에게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두 가지 버전의 악몽이 있을 수 있다. 상위 1%가 진입장벽을 갑자기 확 높여버리는 것, 그리고 기존의 진입장벽들 모두가 일시에 무너지는 카오스 상태(혁명). 많은 음모론이 이 세상의 모든 음모를 밥그릇 싸움으로 환원시킨다. 당연한 말이지만 ‘밥그릇 싸움’이란 기제만큼 인간의 행동을 잘 설명해주는 것도 드물다. 하지만 그 맥락에 놓인 멘탈리티는 계급적인 게 아니라 ‘한국형 평등주의’-‘등가교환의 쾌락원리’이다. 유물론에서 계급과 계급의식을 완전히 탈색시키고 나면, 음모론은 그렇게 ‘신자유주의자의 음모론’이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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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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