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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시간들 델핀 드 비강 저/권지현 역 | 문예중앙 |
거대한 도시의 그림자, 그 속을 채운 타인의 시간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는 사람들.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채색의 감정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결코 내뱉을 수 없는 마음 속의 외침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길 위의 소녀(No et moi)』로 프랑스서점대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은 작가 델핀 드 비강은 이 책에서 파리에서 살아가는 두 남녀의 하루를 그리고, 그들의 독백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해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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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교차로들의 땅.
‘어항 속 삶’에 익숙해져 버린 도시인들의 쓸쓸한 현.매일 같은 길을 같은 방법으로 지나 일터로 향하고, 반복되는 업무를 처리하고, 다시 그 길을 건너 돌아온다. 별 다를 것 없이 흘러가던 일상은 우연한, 혹은 필연적인 사건을 계기로 ‘달라지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는’ 생활로 돌변한다.
『지하의 시간들』의 두 주인공은 그런 전환점을 맞는다. 정확하게는, 그 시점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 소설은 두 사람이 자신을 찾아온 혼란 속에서 새 길을 찾는, 모퉁이를 돌기 직전의 시간을 그린다.
도시라는 거대한 ‘존재’가 집어삼킨, 무채색의 풍경 속에 잠식당한 인물들의 이야기. 도시의 고독과 그 속에 외딴 섬처럼 홀로 서 있는 우리의 초상. 간단하게 말하면, 숨막히는 도시와 일상에서 자아 찾기.
도시 속 현대인의 모습, 나를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교차로 풀어낸 남녀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식상하고 진부하지만 분명 시선을 잡아 끄는 힘이 있다. 나의 이야기이기에, 그들을 통해 공감하고 이해 받고 교감하고 싶기에. 델핀 드 비강은 평범한 것을 넘어 자칫 감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그들의 하루를 과장하거나 억지스럽지 않게, 담백하게 써 내려간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의 모습.정상적인 것은 그 무엇도 시간의 흐름을 바꿀 수 없는 지점. 무엇도 전체를 위협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수 없는 지점. 무슨 일이든 일어나야만 한다. 뭔가 특별한 일. 여기서 벗어나려면, 모든 게 멈추려면. (p.11)그 여자, 마틸드는 다국적 식품 그룹에서 마케팅 차장으로 일하는 유능한 인재다. 인재였다. 직속 상사인 자크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마틸드는 회사에서 설 곳을 잃었다.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알고 마음이 통했던 자크는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인 단 한번의 의견차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유치하기까지 한 그의 ‘따돌림’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던 마틸드는 이제 그 무겁고 버거운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마틸드는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크가 그녀에게 행하는 무형의 폭력이 특별한 증거를 댈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점은 마틸드 자신이 상황을 견디는 편을 택했다는 것. 그녀는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며 일이 어긋난 시작점을 찾고, 지난 시간들 되새김질 한다.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 악화되기만 하는 관계에 절망한 그녀는 악몽 같은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물론, 그러면서도 쉽게 행동하지 못하는 마틸드는 우리와 닮아있다. 큰 마음을 먹고 시도하는 저항은 별다른 효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생각은 더 복잡해진다. 점쟁이가 예언한 운명의 날 5월 20일,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이 끔찍한 시간 속에서 꺼내주기를 기도한다. 점쟁이의 말을 믿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진 지금, 오늘은 운명의 날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매일.그 남자, 티보는 파리 응급의료팀에서 일한다. 교환원이 알려주는 주소로 찾아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본다. 그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방문객이 되어주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필요한 이에게 위로 받거나 사랑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의 사랑은 처음부터 일방적이었고, 상대는 단 한번도 그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도시의 삶, 뜨거운 사랑을 꿈꿨던 그는 자신을 품어주기에는 너무나 초췌하고 노화한 도시의 얼굴, 시종 그의 기대를 져버리는 차가운 사랑의 손을 붙잡고 있다.
그가 내뱉은 말들은 견딜 수 없을 만치 평범했다. 상투적인 표현들은 그의 고통을 욕보였다.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p.55)
그녀는 웃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양. 항상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리도 상대방의 절망을 못 볼 수 있지? (p.58)그는 결국 질척대는 자신의 사랑에 이별을 고한다. “그래. 고마웠어.” 상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와의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는 릴라를 떠났다. 해냈다.’ 담담한 상대와 달리, 그의 에피소드 곳곳에 새겨진 이 문구는 오히려 그의 사랑이 여전히 진행중임을 보여준다. 그는 지금도 사랑,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집착이라 부를 수 있을 그 시간들과 이별하고 있다.
때로는 ‘고장 난 인간’일 필요도 있다.
거대한 도시의 시간은 움직이지 않지만 티끌 같은 나의 일상에는 ‘계기’가 되는 것.약간은 예민해 보이는 얼굴,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하고 만원 지하철의 바를 잡고 버티고 선 여자. 조금만 돌아서면 감정이 터져나올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체념한 듯 보이는 표정을 한 남자.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려진 두 주인공의 모습은 이렇다. 인상적이었던,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속 출근 장면. 잿빛 중절모와 정장을 걸친 채 회색 도시 안으로 쓸려 들어가는 영화 속 인파처럼 그들은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일상 속에 박제되어 있다.
두 사람의 ‘운명의 날’ 5월 20일, 각자의 시간을 살던 그들은 지하철에서 서로를 스쳐간다. 마틸드는 티보를, 티보는 마틸드를 인지하지만 작가는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그 이상의 장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마틸드와 티보가 그들 인생에서 하나의 갈림길과 마주한 순간, 평소와는 다른 길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에도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지하의 시간들’은 그대로 흘러간다. 그렇게 마지막 장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책 또한 마침표를 찍지만 이후에도 그들의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임을,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인연이든 아니든 그들이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것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시간은 흐른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일상의 폭력도, 고독도, 사랑의 아픔도 그저 우리가 기대어 가는 시간의 한 부분일 뿐이다.
『지하의 시간들』은 그 일부를 섬세하게 포착해내 우리 내면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포장하지 않고 내보일 수 있게 하며, 이는 결국 우리 삶에 대한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