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부각 하나 달랑 놓인 밥상은 ‘조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죽부각 하나 놓으면 확실히 다른 반찬 생각 자체가 안 났다. 찹쌀풀이나 밀가루풀을 쑤어 고춧가루 좀 넣고, 조선간장 좀 넣고, 마늘 좀 깨어 넣고 훌훌 저어서 적당히 마른 가죽 잎에 풀비로 바르는 것도 대충 훌훌 발라서 채반이나 빨랫줄에 널어 말린 가죽부각. 그것은 적당히 마른 빨래처럼 꼬득꼬득, 쫀득쫀득했다. 그리고 좀 짭짤했다.
보기만 해도 몸이 간지러워지는 연두색
또 일철이 돌아왔다. 우리가 학교 가고 나면 엄마는 하루 종일 들에 나가 있을 것이고 우리 집을 지키는 건, 아니 우리 집과 우리 집 짐승들을 지키는 건, 벅구. 벅구조차 집을 나가면 마당 가득 내려앉은 참새, 그 참새들이 포르르 날아오를 대나무밭, 감나무, 텃밭의 피마자나무. 그리고 무엇보다 키 큰 가죽나무. 나는 언제나 우리가 없을 때 우리 집을 지키는 건 우리 집 뒤에 우뚝 서 있는 가죽나무인 것만 같았다.
가죽나무는 뒷문 바로 앞 텃밭에 있었다. 가죽나무 밑 땅은 딱딱하고 돌이 많다. 겨울에 가죽나무 밑에는 항가꾸(*엉컹퀴의 전라도 방언.) 뿌리가 많다. 항가꾸 뿌리 달인 물이 무릎 관절에 좋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우리 엄마한테 달여주고파서 얼어서 피가 나는 손등의 쓰라림을 호호 달래가며 항가꾸 뿌리를 캤다. 이파리가 없으면 무슨 막대기같이, 꼭 죽은 나무같이 뭉툭하게 서 있는 가죽나무 밑에서.
봄이 되면 그런 거름기 없는 땅에다는 호미로 깔짝깔짝해서 돈부를 심는다. 돈부 싹이 돋아날 때쯤 가죽나무에서도 새잎이 나온다. 그러면 죽어 있던 나무가 ‘나, 사실은 살아 있었어.’라는 것 같다. 돈부 새싹이 떡잎을 활짝 벌릴 때쯤 가죽나무 이파리는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연둣빛 중 가장 이쁜 연둣빛이 된다. 정말 얇고 연하고 순하게 반짝이는 연둣빛이다. 그 얇고 연하고 순한 연둣빛 잎이 팔랑거릴 때면, 나는 공연히 몸 어딘가가 간지러워진다(어쩐지 적막한 우리 집에도 어디선가 좋은 소식 하나가 날아올 것만 같은 느낌!). 사월 말에서 오월 초의 세상은 그렇게 온통 간지러운 연둣빛의 세상이다. 그 연둣빛 중에 가죽나무의 연둣빛이야말로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연둣빛이다.
베개가 젖는다, 저 무심한 팔랑거림이란
햇빛 바른 일요일 오후에 방 앞뒷문을 열어놓고 방 안에 누워 있으면, 앞마당에서는 오전에 해 널어놓은 하얀 빨래가 너울거리고 뒷문 밖에서는 갈잎이 아니라 가죽나무 이파리가 너울거린다.
봄날의 한가운데 있는 일요일 오후, 아무 데도 갈 곳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어 외롭지만, 꼬득꼬득 말라가는 빨래의 깨끗함이 나를 위로해준다. 그리고 가죽나무. 나는 가만가만 가죽나무에게 말을 붙여본다. 가죽나무야, 가죽나무야. 가죽나무는 푸른 하늘 밑에서 무심히 팔랑거릴 뿐이다. 그저 팔랑거릴 뿐이어도 가죽나무가 팔랑거려서 나는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밤에 가죽나무는 창호지 문에 달라붙어서 팔랑거렸다. 불을 끄고 누워서 가죽나무 그림자가 그려내는 팔랑거림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한쪽 귀가 먹먹해지도록 눈물이 났다. 귀밑 베개가 축축해져도 나는 얼굴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봄밤, 문에 어리는 가죽나무 그림자가 그려내는 팔랑거림을 보며 우는 것이 나는 좋았다. 그렇지만 가죽나무의 팔랑거림이 좋아서 운다고 하면 왠지 좀 창피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누가 왜 우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리라고. 내가 지금 우는 것은 가죽나무의 팔랑거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소쩍새가 하도 ‘울어싸서’ 그런 것이라고. 그렇지만 내가 말 안 해도 엄마가 먼저 말하곤 하였다.
“소쪽새 운다고 너도 운다이. 너도 사람 새끼라 넘이 우는 소리 들으면 나도 울고 자파서…….”
엄마는 축축하게 헝클어진 내 머리를 등 뒤에서 쓰다듬어주었다. 고향 마을에는 어느 집이나 가죽나무가 있었다. 가죽나무는 그리고 어느 집에나 다 뒷문 밖에 있었다. 어떤 집엔 담벼락 사이에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또 어느 집에도 나처럼 가죽나무의 팔랑거림을 보고 밤이 되면 우는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외롭기는 저나 나나 한가지인 촌아이들 중에는.
슬쩍 말린 가죽나무 이파리 그 그리운 향내
봄이 깊어 여름이 오는 기미를 맨 처음 알아채게 해주는 것도 가죽나무였다. 어느 날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내가 코끝에 슬쩍 느껴진다 싶을 때쯤, 바람에서 조금씩 조금씩 습기 내가 맡아질 때쯤, 가죽나무 밑 돈부 잎사귀 속에서 하얗거나 노란 돈부꽃이 보일락 말락 할 때쯤, 가죽나무 이파리의 팔랑거림이 어쩐지 둔해졌다 싶을 때쯤, 그래서 이제는 가죽나무가 팔랑거려도 더는 울지 않게 될 때쯤, 엄마는 가죽나무 이파리를, 아니 가죽나무 이파리가 주르란히 붙은 줄기를 똑똑 따냈다. 높은 데 있는 줄기는 장대에 낫을 동여매서 따냈다.
가죽나무는 이제 맨 꼭대기에만 이파리가 고깔처럼 얹혀 있게 되었다. 낫이 닿지 않아서 남겨뒀는지, 아니면 이파리를 모두 따버리면 나무 보기가 왠지 민망해질까봐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연하지도 너무 질기지도 않게, 적당히 푸르러진 가죽나무 잎과 줄기를 엮어서 뜨거운 물에 슬쩍 데친다. 데친 가죽나무 줄기를 채반에 혹은 담벼락에, 빨랫줄에 슬쩍 말린다. 슬쩍 말린 가죽나무 이파리에서 나는 향내는 이 세상에서 쉽게 맡을 수 없는 향내다. 지금도 나는 마음이 헝클어지거나 속상한 일이 생길 때면, 말라가는 가죽나무 이파리에서 나는 향내가 몹시도 맡고 싶어진다. 그 향내를 맡으면 헝클어진 마음이 다시 단정해지고 진실해질 것만 같다. 내 마음이 진실해져서 그 진실된 마음의 힘으로 다시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낼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가죽나무 이파리는 내 눈물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에. 눈물의 뒤끝에 내가 얼마나 평안해졌던가를 낱낱이 기억할 것이기 때문에.
부각 조금 먹고 물 먹고, 부각 조금 먹고 또
지금까지 내가 본 밥상 중에 가장 마음이 정갈해지는 밥상은 단연 가죽나무 잎 부각이 놓인 밥상이다. 가죽부각 하나 달랑 놓인 밥상은 ‘조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무슨 반찬을 놓고자 해도 뭐가 없었던 탓이 가장 클 것이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가죽부각 하나 놓으면 확실히 다른 반찬 생각 자체가 안 났다.
찹쌀풀이나 밀가루풀을 쑤어 고춧가루 좀 넣고, 조선간장 좀 넣고, 마늘 좀 깨어 넣고 훌훌 저어서 적당히 마른 가죽 잎에 풀비로 바르는 것도 대충 훌훌 발라서 채반이나 빨랫줄에 널어 말린 가죽부각. 그것은 적당히 마른 빨래처럼 꼬득꼬득, 쫀득쫀득했다. 그리고 좀 짭짤했다. 가죽부각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조금씩 찢어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는 부각 조금 먹고 물 먹고, 부각 조금 먹고 또 물 먹고를 하루 종일 반복하기 십상이었다.
가죽부각 한 장 놓인 소반, 거기에 물에 만 보리밥 한 그릇. 그 조촐한 밥상은 깐깐한 청상과부의 밥상으로 제격이었다. 청상과부였던 내 고모할머니 집에 가면 댓돌 위에 언제나 하얀 고무신이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아마 씻어서 말리느라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씻어서 세워놓은 고무신처럼 꼿꼿했던 고모할머니는 대발이 드리워진 방 안에서 홀로 가죽부각 한 가지에 물에 만 밥을 자셨다. 먼 산에서 뻐꾸기 소리가 막 나기 시작한 초여름 한낮의 고요한 식사. 그 모습은 식사를 하고 있다기보다 거의 수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그렇게 밥 자시고 있는 방에 나는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 부각은 부끄럽지 않으나, 할머니가 부각 한 가지에 밥 먹는 것을 민망해 할까봐 나는 조용히 돌아나오곤 했던 것이다.
“뭘 드세요?” 하고 물으면 화들짝!
부각에는 가죽부각 말고도 해우부각도 있었다. 고향에서는 김을 ‘해우’라 했다. 해우는 찬바람 부는 철에 나는 것이라 해를 넘겨 봄까지만 먹고 여름 되기 전에 서둘러 부각을 만들었다. 겨울 김도 절대로 굽지 않고 그냥 간장 쌈을 싸서 먹었다. 김은 눅눅해지면 먹기가 곤란한 것이라 부각을 만드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해우부각 또한 가죽부각과 마찬가지로 만들었다. 요즘처럼 기름에 튀기는 법 없이 그저 찹쌀풀 양념 발라 꾸득꾸득 말려 역시나 물에 만 밥에 먹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각은 늘 혼자 먹는 밥상에 올라왔던 것 같다. 혹은 부부(노부부) 단둘이거나 형제 둘이서. 손님상에는 차마 올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나마도 장마철이 되면 바닥이 났다. 장마철에 어쩌다 부각 조각이 발견되면, 눅눅해진 그것을 오래도록 입 안에서 굴려가며 껌처럼 씹어 먹었다. 어쩌다 남아 있는 부각 조각을 조금씩 나누어 씹어 먹으며 식구들은 눅눅한 마루에 앉아 비 구경을 했다. 그래서 누군가 문득 들어서며 뭘 먹느냐 물으면 식구들은 부각 조각을 황급히 감추었던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부끄러워서는 더욱 아니다. 다만 그때, 부각 먹는 사람들은 순박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