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아야만 했다, 삶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에는 두 부류의 소설 애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을 끝까지 읽는 사람들과 읽다가 집어던지는 사람들.
200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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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부류의 소설 애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을 끝까지 읽는 사람들과 읽다가 집어던지는 사람들. 이건 내가 만들어낸 표현이 아니라, 1998년 우엘벡이 『소립자』를 펴냈을 때, 《뉴요커》 파리 특파원이 한 말을 살짝 바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세상에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은 이들이 절대 다수다. 그건 우엘벡이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엘벡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직 섹스, 그저 섹스밖에 얘기하지 않는 남근주의자라고 할까? DNA 기술을 통한 인간복제를 주장하는 황당한 몽상가라고 할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면 불행이 사라질까?
『소립자』를 읽을 때, 나는 어떤 고통 속에 있었다. 나는 고통이란 풍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가 있다. 그 풍경화 속에는 달도 있고, 빛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까지 포함해서 풍경화는 어떤 어두운 정서를 만들어낸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실낱같은 희망의 느낌이 존재한다고 해서 전체적인 고통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고통은 그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때, 내가 읽은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1974년 7월의 어느 날 밤, 아나벨은 바로 그런 정황에서 자신이 하나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위로받았다. 이 문장은 『소립자』의 세계, 더 나아가 우엘벡의 세계를 잘 설명한다. 『소립자』에서 주인공들은 모든 인간적인 가치가 몰락하는 세계의 한가운데 있다. 다 읽고 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도착적인 성행위와 인종차별적인 발언들은 다 사라지고, 기억에 남는 것은 오직 고통뿐이다. 풍경화 속의 빛이 전체적인 어두운 정서에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그걸 더욱 보강하듯이, 살아가면서 겪는 사랑이며 행복 같은 것들이 결국 인간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없애주기는커녕 그걸 더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그건 우리가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네가 아니고 나인 까닭은 이 고통을 고스란히 나만이 겪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 없다. 죽음은 오직 나의 일이다.
『소립자』와 마찬가지로 『어느 섬의 가능성』 역시 인간의 삶에 대한 절망이 가득하다. 『소립자』의 마지막 부분, 마침내 사랑하는 남자를 다시 만나 그의 아이를 가지려다가 자궁암으로 아나벨이 죽었을 때,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미셸은 주머니에 있던 작은 책을 꺼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는다.
동에 있는 모든 중생,
서에 있는 모든 중생,
남에 있는 모든 중생,
북에 있는 모든 중생,
모두가 행복하고 앞으로도 불행하지 않기를.
모두가 화목하고 적의 없이 살 수 있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이런 문장을 읊조리는 일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수없이 반복한 행위다. 하지만 생물학자인 미셸로서는 이 고통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있다. 그건 인간 복제 기술을 이용해서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즉 인류 대신 무성 생식을 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종, 개인성과 분리와 생성 변화를 극복한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어느 섬의 가능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과연 개별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느 섬의 가능성』은 이 급진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끝까지 밀고 가는 작품이다.
『어느 섬의 가능성』에는 인간의 육체를 “입자들의 멋진 배열, 매끄러운 표면, 개체성이 없는, 그래서 흔적 없이 사라지더라도 조금도 중요치 않는” 물질로 여기는 집단이 등장한다. 그들은 『소립자』의 미셸의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인간 복제를 꿈꾼다. 소설에는 세 명의 다니엘이 등장하는데, 다니엘1은 실제 존재했던 사람이고 다니엘24와 다니엘25는 다니엘1을 선조로 복제된 신인류다. 이 소설은 다니엘24와 다니엘25가 다니엘1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쓴 글을 논평하면서 들려준다. 그들에 따르면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지고한 누이』에 따르면, 질투, 욕망, 그리고 생식 욕구는 똑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고통이다. 우리로 하여금 미봉책으로 타인을 찾아다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존재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신인류는 먼저 섹스를 없애고, 그리하여 사랑을 없애고, 마지막으로 고통을 없앤다. 생식이 없으면 고통이 없다. 다니엘1이 인간복제를 추구하는 집단을 최초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사랑했던 여자들이 떠나거나 자살하는 순간에도 버텨오던 다니엘1은 자신이 키우던 개 폭스가 죽고 나자 좋아하던 플라스틱 오리를 무덤에 올려놓다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그러다가 폭스의 유전자가 보존돼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희망과 유사한 감동 같은 걸 느낀다. 이렇게 해서 고통은 신인류에게 사라진다.
사랑은 어디에서 오며 어디에 존재하다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음악애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슬란드 출신 밴드 시규어 로스의 음반을 끝까지 듣는 사람들과 듣다가 중간에서 꺼버리는 사람들. 물론 여기에도 세 번째 부류, 즉 한 번도 시규어 로스의 음반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시규어 로스의 음악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나는 사실 우엘벡의 소설이 코엘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더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무엇인가? 고통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마찬가지로 시규어 로스의 음악은 그 어떤 뉴에이지 음악보다 강하게 듣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시규어 로스의 앨범의 첫 곡 ‘Samskeyti’는 ‘집착’이란 뜻이다. 반복적인 피아노 음률은 『소립자』에서 미셸이 읽던 불교 명상록의 한 구절을, 혹은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다니엘1이 들어간 뱅상의 작품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뱅상은 인간복제를 주장하는 엘로힘의 예언자가 죽은 뒤, 그의 부활한 육신이 된 아티스트다. 뱅상이 만든 마지막 작품 ‘사랑’은 빛으로 가득한 방, 고통 없이 죽기에 더없이 좋은 방이다. 거기서 신도들은 죽은 뒤, DNA 복제를 통해서 다시 태어날 것이었다. 그 방에 들어간 다니엘1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공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우주였고 현상으로 나타난 존재였다. 공간 속에 나타나서 굳어졌다가 용해되는 그 반짝거리는 미시 구조들은 나 자신의 것이었다. 나는 내 몸 내부에서 생겨나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 하나하나를 느꼈다.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영원한 잠재성으로 진동하는 그 환한 무(無) 속으로 녹아들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이 부분은 정확하게 ‘Samskeyti’를 듣는 느낌과 일치한다. 이 곡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생성하는 순환의 논리에서 비롯하니까. 그 반복되는 고통의 아름다움, 영원히 순환하는 만다라의 아름다움이니까. 번번이 인간은 태어나고 다시 죽는다는 이 사실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죽음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지리라. 하지만 고통이 사라진다면, 사랑도 사라질 게 분명하다. 사랑은 이 개별적인 존재의 죽어가는 육신에서 비롯한다. ‘Samskeyti’는 영어로 ‘attachment’라고 번역되는데 이는 집착인 동시에 사랑이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가 무(無)로 사라질 때, 우리는 사랑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니까. 사랑과 고통은 한 몸인 것이다.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폭스의 죽음은 두 번 나온다. 신인류 다니엘25는 폭스가 죽었을 때, 인간의 고통을 경험한다. 고통은 그를 고독하게 만든다. 고독의 핵심은 폭스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개가 탄생한다고 해도 폭스는 이제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폭스가 개별적인 존재로 죽는 순간, 다니엘25역시 개별적인 존재가 됐다. 결국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죽게 만드는 건 고통이 아니라, 사랑인 셈이다. “폭스의 재롱, 내 무릎 위에 웅크릴 때 전해지던 따뜻한 온기, 멱을 감거나 신나게 달리던 모습, 특히 그의 눈길에서 읽혀지던 기쁨” 등이 그를 개별적인 존재로 만든 것이다.
삶이 가진 최고의 것은?
『소립자』의 미셸과 마찬가지로 『어느 섬의 가능성』의 다니엘1은 마지막 순간에 시를 남긴다. 『소립자』에 실린 시를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시를 읽고 나서 『어느 섬의 가능성』은 이 시대에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소설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엘벡의 소설을 끝까지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시규어 로스의 음반을 끝까지 들어야만 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다 읽고, 또 다 듣고 나면 그제서야 이 책과 음반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내 삶, 내 삶, 아주 오래된 내 삶이여
이루어지지 않은 내 첫 소원
파기되어 버린 내 첫 사랑,
네가 돌아와야만 했다.
나는 알아야만 했다.
삶이 가진 최고의 것을,
두 개의 몸이 그들의 행복을 연주할 때
끝없이 결합하고 다시 태어날 때.
전적인 의존에 들어간
나는 안다, 존재의 떨림을
사라지기 직전의 망설임을,
비스듬히 내리쬐는 태양을
그리고 사랑을, 모든 것이 쉬운,
모든 것이 순간에 주어지는;
시간 한가운데 존재한다
어느 섬의 가능성이.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면 불행이 사라질까?
『소립자』를 읽을 때, 나는 어떤 고통 속에 있었다. 나는 고통이란 풍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가 있다. 그 풍경화 속에는 달도 있고, 빛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까지 포함해서 풍경화는 어떤 어두운 정서를 만들어낸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실낱같은 희망의 느낌이 존재한다고 해서 전체적인 고통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고통은 그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때, 내가 읽은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1974년 7월의 어느 날 밤, 아나벨은 바로 그런 정황에서 자신이 하나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위로받았다. 이 문장은 『소립자』의 세계, 더 나아가 우엘벡의 세계를 잘 설명한다. 『소립자』에서 주인공들은 모든 인간적인 가치가 몰락하는 세계의 한가운데 있다. 다 읽고 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도착적인 성행위와 인종차별적인 발언들은 다 사라지고, 기억에 남는 것은 오직 고통뿐이다. 풍경화 속의 빛이 전체적인 어두운 정서에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그걸 더욱 보강하듯이, 살아가면서 겪는 사랑이며 행복 같은 것들이 결국 인간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없애주기는커녕 그걸 더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그건 우리가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네가 아니고 나인 까닭은 이 고통을 고스란히 나만이 겪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 없다. 죽음은 오직 나의 일이다.
『소립자』와 마찬가지로 『어느 섬의 가능성』 역시 인간의 삶에 대한 절망이 가득하다. 『소립자』의 마지막 부분, 마침내 사랑하는 남자를 다시 만나 그의 아이를 가지려다가 자궁암으로 아나벨이 죽었을 때,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미셸은 주머니에 있던 작은 책을 꺼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는다.
동에 있는 모든 중생,
서에 있는 모든 중생,
남에 있는 모든 중생,
북에 있는 모든 중생,
모두가 행복하고 앞으로도 불행하지 않기를.
모두가 화목하고 적의 없이 살 수 있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이런 문장을 읊조리는 일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수없이 반복한 행위다. 하지만 생물학자인 미셸로서는 이 고통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있다. 그건 인간 복제 기술을 이용해서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즉 인류 대신 무성 생식을 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종, 개인성과 분리와 생성 변화를 극복한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어느 섬의 가능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과연 개별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느 섬의 가능성』은 이 급진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끝까지 밀고 가는 작품이다.
『어느 섬의 가능성』에는 인간의 육체를 “입자들의 멋진 배열, 매끄러운 표면, 개체성이 없는, 그래서 흔적 없이 사라지더라도 조금도 중요치 않는” 물질로 여기는 집단이 등장한다. 그들은 『소립자』의 미셸의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인간 복제를 꿈꾼다. 소설에는 세 명의 다니엘이 등장하는데, 다니엘1은 실제 존재했던 사람이고 다니엘24와 다니엘25는 다니엘1을 선조로 복제된 신인류다. 이 소설은 다니엘24와 다니엘25가 다니엘1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쓴 글을 논평하면서 들려준다. 그들에 따르면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지고한 누이』에 따르면, 질투, 욕망, 그리고 생식 욕구는 똑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고통이다. 우리로 하여금 미봉책으로 타인을 찾아다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존재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신인류는 먼저 섹스를 없애고, 그리하여 사랑을 없애고, 마지막으로 고통을 없앤다. 생식이 없으면 고통이 없다. 다니엘1이 인간복제를 추구하는 집단을 최초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사랑했던 여자들이 떠나거나 자살하는 순간에도 버텨오던 다니엘1은 자신이 키우던 개 폭스가 죽고 나자 좋아하던 플라스틱 오리를 무덤에 올려놓다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그러다가 폭스의 유전자가 보존돼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희망과 유사한 감동 같은 걸 느낀다. 이렇게 해서 고통은 신인류에게 사라진다.
사랑은 어디에서 오며 어디에 존재하다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음악애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슬란드 출신 밴드 시규어 로스의 음반을 끝까지 듣는 사람들과 듣다가 중간에서 꺼버리는 사람들. 물론 여기에도 세 번째 부류, 즉 한 번도 시규어 로스의 음반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시규어 로스의 음악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나는 사실 우엘벡의 소설이 코엘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더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무엇인가? 고통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마찬가지로 시규어 로스의 음악은 그 어떤 뉴에이지 음악보다 강하게 듣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시규어 로스의
그때서야 나는 내가 공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우주였고 현상으로 나타난 존재였다. 공간 속에 나타나서 굳어졌다가 용해되는 그 반짝거리는 미시 구조들은 나 자신의 것이었다. 나는 내 몸 내부에서 생겨나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 하나하나를 느꼈다.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영원한 잠재성으로 진동하는 그 환한 무(無) 속으로 녹아들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이 부분은 정확하게 ‘Samskeyti’를 듣는 느낌과 일치한다. 이 곡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생성하는 순환의 논리에서 비롯하니까. 그 반복되는 고통의 아름다움, 영원히 순환하는 만다라의 아름다움이니까. 번번이 인간은 태어나고 다시 죽는다는 이 사실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죽음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지리라. 하지만 고통이 사라진다면, 사랑도 사라질 게 분명하다. 사랑은 이 개별적인 존재의 죽어가는 육신에서 비롯한다. ‘Samskeyti’는 영어로 ‘attachment’라고 번역되는데 이는 집착인 동시에 사랑이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가 무(無)로 사라질 때, 우리는 사랑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니까. 사랑과 고통은 한 몸인 것이다.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폭스의 죽음은 두 번 나온다. 신인류 다니엘25는 폭스가 죽었을 때, 인간의 고통을 경험한다. 고통은 그를 고독하게 만든다. 고독의 핵심은 폭스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개가 탄생한다고 해도 폭스는 이제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폭스가 개별적인 존재로 죽는 순간, 다니엘25역시 개별적인 존재가 됐다. 결국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죽게 만드는 건 고통이 아니라, 사랑인 셈이다. “폭스의 재롱, 내 무릎 위에 웅크릴 때 전해지던 따뜻한 온기, 멱을 감거나 신나게 달리던 모습, 특히 그의 눈길에서 읽혀지던 기쁨” 등이 그를 개별적인 존재로 만든 것이다.
삶이 가진 최고의 것은?
『소립자』의 미셸과 마찬가지로 『어느 섬의 가능성』의 다니엘1은 마지막 순간에 시를 남긴다. 『소립자』에 실린 시를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시를 읽고 나서 『어느 섬의 가능성』은 이 시대에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소설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엘벡의 소설을 끝까지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시규어 로스의 음반을 끝까지 들어야만 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다 읽고, 또 다 듣고 나면 그제서야 이 책과 음반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내 삶, 내 삶, 아주 오래된 내 삶이여
이루어지지 않은 내 첫 소원
파기되어 버린 내 첫 사랑,
네가 돌아와야만 했다.
나는 알아야만 했다.
삶이 가진 최고의 것을,
두 개의 몸이 그들의 행복을 연주할 때
끝없이 결합하고 다시 태어날 때.
전적인 의존에 들어간
나는 안다, 존재의 떨림을
사라지기 직전의 망설임을,
비스듬히 내리쬐는 태양을
그리고 사랑을, 모든 것이 쉬운,
모든 것이 순간에 주어지는;
시간 한가운데 존재한다
어느 섬의 가능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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