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김수정 "여성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스스로를 구원하면서도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자신을 바쳐 싸워온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함께 읽고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여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남녀 모두의 이야기로요.
글ㆍ사진 김윤주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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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포스트코리아

디지털 성범죄, 낙태죄 폐지 및 개정 논의 등 여성 인권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운 요즘, 중요한 참조점이 될 책이 나왔다. 바로 20여 년 간, 여성 및 아동 인권 관련 변론을 적극적으로 맡아온 김수정 변호사의 『아주 오래된 유죄』다. 그가 기록하는 ‘대한민국 여성의 법적 투쟁사’는 낙태죄, 호주제 폐지, 이주 여성, 미혼모 등 다양한 이슈를 포괄한다. 그만큼 성차별의 문제가 사회 곳곳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다. 안타깝게도 여성들이 짊어진 ‘아주 오래된 유죄’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말한다. “같은 싸움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같은 싸움은 없다. 포기하지 않은 싸움에는 늘 한발 전진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이 여성을 외면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김수정 변호사를 서면으로 만났다.




세상을 바꿔온 여성들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작가님. 20여 년간 여성의 인권 관련 사건을 많이 맡아 오셨는데요. 여성, 아동 인권분야의 변호사가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사실 여성 아동인권 분야의 변호사라고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해온 건 맞지만, 일상적으로는 작은 로펌에서 일반적인 변호사 업무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20년 동안 여성, 아동 인권 분야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해왔거나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분야의 변호사라고 한다면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여성으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엄마나 주변의 여성들의 삶을 보면서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 생각이 이어져 ‘잘못된 뭔가’를 바로 잡고 싶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습니다. 

변호사 활동을 막 시작하신 2001년과 2020년 현재를 비교하면, 어떤 차이를 느끼시나요? 그동안 호주제 폐지부터 최근의 미투 운동까지 여성운동사에 남을 많은 일들이 지나갔고, 현재 진행형입니다. 체감하시는 변화가 있다면요.

너무 비관적으로 말하고 싶진 않은데 실은 솔직히 체감하는 변화를 잘 모르겠어요. 소소한 제도 변화로 분명 나아진 부분이 많이 있죠. 호주제 폐지 이후 호적 개편으로 호적의 기록으로 인한 불이익이 많이 해소된 것처럼요. 그런데 어쩐지 더 힘들어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많이 들려요. 왜일까요.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는 것,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일까요. 과거에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여성의 사회 진출, 대학 진학률 등 양적 변화는 일어난 것 같은데 성차별해소에서 질적인 변화가 받쳐주질 못하니 여성의 삶이 더욱 힘들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프롤로그에서, 책을 쓰는 데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고 집필에도 2년이 걸렸다고 하셨어요. 어떤 마음에서 기록을 시작하셨나요? 

프롤로그에 썼다시피, 처음에는 글쓰기를 거절했습니다. 법정 서면 쓰기에 익숙한 사람이 책을 쓴다는 것도 자신 없었지만, 하나하나 사건에 담긴 여성들의 서사를 제대로 담아낼 자신은 더더욱 없었거든요. 결국 그들을 변호한 변호사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공유하는 것이 저의 마지막 변론이라는 생각에 집필을 수락하게 되었죠.

책을 읽으며, 많은 여성들이 왜 당연히 보장 받아야 할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지 분노할 것 같아요. 당연히 지켜져야 할 일들이 그동안 법정에서는 왜 외면받아왔을까요?

제가 보기엔 너무나 당연한 권리보장이고 구제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결국 그만큼 여전히 세상이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남성의 시각으로 여성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면 전혀 문제가 없거나 미비할 뿐이거든요. 성희롱 좀 당했다고 죽냐고 할 수 있어요. 근데, 당하는 여성 입장에서는 일회적인 성희롱 하나가 아니라 일상이고 당면한 문화적 환경이거든요. 그런걸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젠더적 관점이 아직 부족한 거죠.

현재의 ‘페미니즘 리부트’가 가능하기까지, 과거의 많은 여성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과거의 장면 하나를 꼽아주신다면요? 

하나를 뽑기는 너무 어렵고 뽑을 수가 없어요. 장면 장면 하나가 너무 소중하고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꼭 뽑아야 한다면, 가장 최근 진행되고 있는 장면을 뽑겠습니다. 56년 만에 재심청구를 하신 최말자 할머니께서 재심청구를 하던 장면입니다. 56년 전에 성폭행을 피하려다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는데,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고 중상해로 처벌된 사건이에요. 

당시 판결문을 보면 처녀가 낯선 남자를 따라간 것을 탓하는 대목도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이었죠. 18세 소녀가 70대 노인이 되어 평생 한으로 안고 사시다가 미투 운동을 보시고 재심으로 본인의 억울함을 이제라도 풀어보겠다고 나선 거에요. 지금 열심히 싸우고 있는 중인데요. 이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내는 분들이 있어 오늘이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재심 개시가 되고 승소까지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엄청난 사건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늘 승리할 수는 없어도 ‘연대’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사실 ‘여성’ 개개인은 각자 다른 상황에 서 있지만, 다름아닌 여성이라는 사실이 또 다른 여성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데 큰 힘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변론을 해오시면서 기억에 남는 연대의 장면을 소개해주신다면요?

제 책에는 성폭력 관련 사건만 나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건들이 나와요. 그 다양한 내용들이 다 성차별이라는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죠. 고속도로 요금수납원 노동자들의 상의 탈의 투쟁을 보면서 수지 김을 떠올릴 수 있는 이유죠. 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연대에 대한 믿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연대에 대한 많은 기억이 있지만, 하나를 이야기하라면, 낙태죄 위헌 소송을 할 때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하였지만 실은 그것을 이끌어 낸 것은 법정 바깥에서 연대하여 싸운 여성들과 연대자들의 힘이었거든요. 엄청났습니다. 호주제 위헌 소송 때도 그랬고요. 특히 제가 법률 전문가이다 보니 전문직 여성간의 연대가 기억에 남아요. 낙태죄 위헌 소송 시 의사선생님들께서 연대를 많이 해주셨어요. 의료 현장에서 임신, 임신중지, 출산을 둘러싸고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몸소 체험해오신 여성 의료인들의 생생한 증언과 의학적 지식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고요. 연대의 힘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허프포스트코리아 

여성의 투쟁이 남녀 모두에게 전해지길

n번방 사건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합니다. 최근 n번방 조주빈이 징역 40년을 선고받았는데요. 이 판결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고, 디지털 성범죄를 줄여나갈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이라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책에서도 좀 언급한 내용이 있는데요. 저는 원래 강한 처벌을 대책으로 내세우는 걸 좀 싫어하는 입장입니다. 성범죄나 성차별 문제에서 가장 손쉽게 돈 안들이고 여론도 무마시킬 수 있는 것이 처벌위주 대책이거든요. 그런데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는 심해도 너무 심해요 피해자들은 죽어나갈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처벌은 정말 솜방망이 보다도 못한 수준이었죠. 

그래서 책에서 제가 그랬어요. 안되겠다, 이건 강한 처벌이라도 먼저하자 강한 처벌로 응보하고 위하(겁주기)효과라도 주자고. 그 시작으로 조주빈이 과거와 달리 강한 처벌을 받았죠. 무기징역을 받아야 한다는 분들도 있지만, 선례를 생각해보면 이것도 참 많이 나간 것이죠. 많은 피해자들의 피눈물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강한 처벌이 제일 쉬운 대책이에요. 성차별, 성폭력을 없앨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해요. 사회를 뒤집어 놓을 정도로요. 어릴 때부터 교육이 중요한데, 지금 보세요. 2016년도에 엄청난 비판을 받은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 이후 아직도 못 만들고 있어요. 돈도 안쓰고, 능력 있는 사람을 쓰지도 못하고 있는 거죠. 아니 안 하고 있는 거죠.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 뭘까 참 어려운데요. 교육이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되고요. 교육 정치 등 모든 영역에서 주요한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사람들의 다양성이 매우 중요해요. 40대 이상의 남성들이 독점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한 혁명적인 제도 변화가 필요하죠.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사람 모두가 한 성별의 일정 연령대에 집중되어 있어 따르는 폐해는 이미 오래 지켜봐 왔으므로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테고요. 교육이든 뭐든 위와 같은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시행될 수 있지 않을까요?

낙태죄 위헌소송 대리인단의 일원으로 ‘낙태죄 위헌’을 이끌어내신 변호사로서, 현재 낙태죄 개정안 이슈에 대한 입장이 궁금합니다

우선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하고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새로운 입법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에 대해 엄청나게 실망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외국의 입법례를 들면서 2020년 대한민국의 입법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너무 낡았습니다.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 구도라는 아주 낡은 대립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낙태죄 유지로 여성을 통제하고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여성으로 폄하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제가 책에서도 경고(?)했듯이 이렇게 여성을 푸대접하면 ‘인구절멸’의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사유리 씨의 비혼 출산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비혼 출산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용하기 위해, 법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이미 현실에서 가족 형태는 많이 변하고 있어요. 일인가족이 크게 증가하고, 법률혼 없이 동거하는 가정, 동성 가정. 한부모 가정, 무자녀 가정 증가 등등 혈연기반 없는 다양한 생활동반자 가정이 있어요. 혈연을 기반으로 한, 법률혼을 기반으로 한 소위 정상가정 위주의 현행법만으로는 현실을 따라 갈 수 없어요. 혈연과 법률혼을 중심으로만 인정되어온 ‘가족구성’의 권리는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법이 인정하고, 이들에게도 다양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질 수 있는 법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법에서 소외된 사람이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책의 사례들처럼, 여성들의 투쟁은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지기도 합니다. 아직도 남성중심적인 구조는 견고한데요, 어떤 마음가짐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변론을 해나가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특별한 게 없어요. 그저 제게 맡겨진 일, 해야 할 역할을 피하지 말자는 단순한 생각입니다. 가끔은 타인의 삶의 무게, 사회적 책임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하는 이 일이 힘들어서 피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저 단순한 생각을 유지하면서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프롤로그에서 “계속 글을 써달라고 했던 젊은 남성 독자”를 언급하셨지요. 앞으로 이 책을 집어들 남성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남녀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건 불변의 진리잖아요. 그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 싸워온 여성들의 기록이 아니고요, 스스로를 구원하면서도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자신을 바쳐 싸워온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함께 읽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여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남녀 모두의 이야기로요. 



*김수정

법무법인 지향 구성원 변호사. 두 딸의 모자란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월급쟁이. 호주제 및 낙태죄 위헌 소송의 대리인,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이주여성인권센터 법률지원단으로 20여 년간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 이주여성 등에 대한 법률 지원을 꾸준히 해왔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 곁에서 손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했고, 앞으로도 되고 싶은 열혈 변호사. 지은 책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공저)가 있다. 



아주 오래된 유죄
아주 오래된 유죄
김수정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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