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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에서 못 다한 이야기

글쓴이: Over the Book | 201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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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철학자는 무의식을 지배하는 타자의 이데올로기를 얘기 했다. 결혼 제도 안에 몸 담고 있으면서 제도의 불합리와 부당함을 얘기하는 것은 절절한 체험의 소산이다. 마찬가지로 대학 생활을 경험해 본 이가 대학의 쓸모없음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다만 제도의 부당함을 주장할 때, 비판을 위한 비판을 넘어 개인적인 견해라도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불평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고민으로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떠했나 반성해 본다.


 


가부장제도가 우리의 무의식, 언어구조까지 지배하는 것에 대해 더 깊이 얘기하고 싶었지만, 자리를 털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개인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했지만, 나는 (결혼제도 안에 있는 여자, 아내이면서 주부이고, 엄마이다.)  한 순간도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없었다. 엄마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매 순간 나 혹은 우리(여성)는 딸, 주부,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산다. 특히, <엄마>라는 역할과 이름으로 불릴 때, 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단지 엄마일 뿐이다.


 


개인의 욕망과 꿈은 언제나 <엄마>라는 이름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우리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아우성, 그것은 타자의 이데올로기와 싸움이다. 늘 갈등 상황 속에 선택의 기로에서 선택지가 너무 뻔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게 강요하는> 제도가 몸서리치게 싫다. 자유부인처럼 늦은 시간까지 모임에 참석하고 뒷풀이 자리에 남아있지만, 그렇게 개인으로 시간을 갖기 위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을 설득하고 갈등하면서 나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2.


90년대 이후 여성 작가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작가적 역량의 증가도 있지만 구매력있는 독자의 다수가 여성이다 보니 아무래도 시장성 면에서 동성 작가의 글이 여성 독자에게 편하게 읽혔을 것이다. 다른 측면에선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남성으로 대변되는 거대담론에 대한 문학판의 변화도 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 전에 주변의 문학이었던 여성문학은 다양한 주변의 중심화 혹은 다양한 중심의 공존을 지향하는 시대성과 맞아 떨어지면서 중심으로 자리 이동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90년대 초반 일군의 여성작가의 작품을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기 소설에서 손을 떼었다. 문학이 전시대처럼 항상 리얼리즘을 지향할 순 없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감동이 전해지지 않으니 손을 놓게 되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무리의 여성 작가의 소설에는 철학적 사유가 빈곤하다는 남성 평론가 혹은 남성 독자의 의견에 나 역시 동조했다. 그렇다면 혹시 나 또한 문학에 대한 혹은 여성에 대한 근대적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문학은 언제나 시대성과 역사성,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정의 말이다. 미시 담론에 대한 거부감 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여성의 글쓰기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남성 작가에 비해 섬세하다. 감정의 결과 시선이 고루고루 미친다. 우리가 이전까지 거대한 숲에 매몰되었다면, 여성적 시선으로 숲에서 놓친 미세한 부분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의 다양성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분명히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듯한 여성적 글쓰기에 있어 간과해서 안될 것이 있다. 부분이 전체를 수용하듯 미세함 속에 전체를 조망하는 큰 사유의 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의 글쓰기는 무지하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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