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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 김열규의 마지막 사색

글쓴이: 처음처럼님의 블로그 | 201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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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즈음에>의 출간소식에 김열규교수님께서 지난해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이 곁들여져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아흔 즈음에>가 유고집이 된 셈입니다. 노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에세이 <메멘토 모리; http://blog.yes24.com/document/4410199>, <노년의 즐거움; http://blog.yes24.com/document/5108486> 등을 통하여 그를 만나면서 많은 배움을 얻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남는 것 같습니다. ‘더 오래 사셔서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어야 하는데’ 하는...


 


유고집이 되고 말았지만, 저자는 혈액암으로 투병하는 와중에도 나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농익는 목숨 기운’이라는 제목의 여는글에 “새벽녘 해돋이에 맞겨룰 저녁노을 같은 마무리로 아흔이 내일모레인 여든 넘은 나이를 가다듬고 싶다. 아니, 싶은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13쪽)”라는 희망을 담으셨던 것이겠지요. 이렇게 시작한 글은 ‘나이가 든다는 것’을 시작으로, ‘죽음을 생각하며’, ‘글쓰기에 기대어’, ‘그리운 시절’, ‘함께 산다는 것’, ‘자연의 품에서’로 이어지면서 아흔을 목표로 한 인생살이를 잘 마무리하는 방법을 정리해내신 것 같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이야말로, 나이 든 사람들 누구나 인생살이에 유종의 미를 꽃피우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13쪽)”라고 여는글을 마무리하신 것을 보면, 이 책을 읽는 이들의 마음에 묵직한 무엇을 남겨주시려고 말입니다. 그것도 타계하시기 하루 전까지도 말입니다. 어쩌면 타계하시기 하루 전에는 “내일, 모레, 글피쯤이면 아흔이 될 이 나이에 마음만은 어김없이 나무로 살고 싶다. 그리하여 소슬하되 다소곳하고, 우람하되 고즈넉하게 노년의 삶을 다듬고 싶다.(225쪽)”라고 마무리하신 닫는글을 쓰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유족들이 고인의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원고가 바로 이 유고집이라고 합니다. 생전에는 미처 몰랐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선친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글들을 묶어 <소운집(嘯雲集)>이라는 제목으로 488쪽이나 되는 두툼한 책으로 낸 적이 있습니다. 소운은 선친께서 쓰시던 호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자식이 넷이나 되다보니 걱정하실 일이 끊임없이 생기곤 한 삶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남기신 글들은 대부분 평소에 자식들이 바른 생각과 행동을 가지도록 당부하시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제가 술을 많이 줄였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다는 점은 인정을 하시면서도 술을 이기지 못하는 저를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49재를 지내는 동안 속죄하는 마음으로 금주하면서 선친께서 남기신 유고를 정리하였고, 49재를 올리는 날에는 유고집을 영전에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일찍 별도로 써두셨던 것으로 보이는 사세(辭世)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당신께서 살아오신 날들을 정리하시면서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1. 우리 가문(家門)에 대한 긍지(矜持)를 가져라, 2. 근면역행(勤勉力行)하여 질소검약(質素儉約)하게 살아달라, 3. 부모에 효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4. 제가제일주의(齊家第一主義)로 하라, 등입니다. 이 리뷰를 쓰면서 다시 읽어보면서 눈물이 앞을 가리기에 조만간 따로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열규교수님의 영애께서는 추모의 글에서 병중에 계신 어머니의 병구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평소에는 냉정하다고 느껴온 선친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적었습니다. “엄마에게 헌신하고 몸을 낮추는 아버지는 내게는 작은 경이감의 대상이 되었다. (…) 여든이 넘은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 엄마 수발을 드셨다.(235쪽)” 김열규교수님의 모습과 제 선친 모습이 꼭 겹쳐 보이는 것을  보면 옛날 분들은 마음속에는 뜨거운 사랑을 품고 계시면서도 정작 밖으로는 내보이는 것을 꺼려하셨던 것 같습니다. 선친께서도 어머니를 당부하시는 대목을 이렇게 남기셨습니다. “애비 기세(棄世) 후에 홀로 남을 너희 모친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온다. 어떠한 전생의 인연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만나 (…) 오늘날 이만큼 우리 가정이 성장한 것도 너희들 어머니의 피나는 내조의 공이라 생각한다. (…)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은 마음 편하고 복되게 조금이라도 신경을 더 써 달라.”


 


평소 따님께 “우리 각자 열심히 일하자”라는 교수님 말씀은 릴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로댕이 비서로 일하는 릴케에게 “언제나 오직 일하라!”고 당부했다는 부분을 읽고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체코출신인 릴케가 로댕을 만난 것은 27세 때였고, 당시 로댕은 62세로 명성의 절정에 올라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릴케는 프라하에서 전시 중이던 로댕의 제안으로 1905년 9월15일부터 1906년 5월12일까지 로댕의 비서로 일했다고 하는데, 당시 릴케는 영감이 떠올라야 글을 쓸 수 있었던 자신과는 달리 로댕은 작업을 통하여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릴케는 로뎅을 통하여 “값싼 감정에서 벗어나 화가나 조각가처럼 자연 앞에서 일하며 대상을 엄격하게 파악하고 묘사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미술평론가 유경희님은 전하고 있습니다.(경향신문 2013년 9월 16일자 기사, ‘[유경희의 아트살롱] 릴케와 로댕의 섬세한 인연’) 그리고 보면 저 역시 잡문 한 줄을 쓸 때도 머리 속에 무언가 퍼뜩 떠오를 때까지 뭉기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생각을 구슬려 가다듬다보면 좋은 글이 써진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저자가 남긴 말씀들을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즈음이야 주변에서 예순 넘은 분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저자는 “예로부터 예순 살 이상은 특별한 나이로 쳐왔다. 살 만큼 산, 아니 그러기를 넘어선 나이로 치부해왔다.(21쪽)”라고 적어 예순 나이를 특별하다고 하였습니다. 금년에 예순을 맞는 제 입장에서는 저자의 말씀대로 특별한 나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그 이유는 팔순을 갓 넘긴 저자가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친 이유가 “마침내 하늘을 찌르는 태산준령의 꼭대기에 올라선 기분이다. 아흔, 곧 구순을 당당하세 들먹일 수 있는 나이에 다다랐다. 으쓱대고 싶다.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다. 우쭐대고 싶기도 하다.(17쪽)”고 적은 것처럼 예순을 넘어야 칠순, 팔순, 그리고 구순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나이들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순이 넘으면 그동안 해오던 일을 정리하고 한 걸음 물러서 여생이나 즐기라는 은근한 강요가 느껴지는 나이입니다만, 여생(餘生)이 마치 쓰다 말고 남은 생애처럼 천덕꾸러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완전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본 영화 <노트북; http://blog.joins.com/yang412/3857206>은 시작부분에서 아름다운 황혼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강 위로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석양과 붉게 물든 저녁놀을 향해 말없이 노 젓는 남자. 미끄러지듯이 좌우로 갈라지는 물결. 소용돌이를 지는 잔물결을 밀어내는 노.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머리 위를 비상하듯 날갯짓하며 따르는 하얀 백조. 이 배가 도착하는 곳은 강변에 우뚝 서있는 새하얀 집. 그 집의 창가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백발의 할머니..... 어둠이 내리는 황혼을 향하여 나아가는 보트는, 치매환자가 결코 피할 수 없는 파국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할아버지의 심정을 그리는 것으로 보인다.” 여생을 굳이 여광(餘光)과 비교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생각처럼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 제일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여유가 있는 여생이 더 아름답고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일에서 물러나게 되면 시간을 주체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만, 바로 그 시간을 소중하게 쓰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하겠습니다.


 


두 번째 화두는 ‘죽음’입니다. 저자는 이미 <메멘토 모리>를 통하여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을 “사람의 목숨 그 자체에 관련되어서 직설적으로 쓰이는 죽음이란 낱말은 기피하면서도,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직접적으로는 없는 사물이나 현상에 관련되어서는 은유법 도는 과장법의 테두리 속에서 죽음이란 낱말을 심하게 과용하고 또 남용하고 있음을 위의 보기 등을 통해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목숨에 관련된 죽음의 낱말이 극단적으로 기피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데 대한 역설적인 사례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김열규지음, 메멘토 모리, 72쪽, 궁리, 2001년)”라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저자는 <아흔 즈음에>에서는 “죽음이 마지막 결의이고 도전이게 해야 한다. 머지않아 구순을 내다보는 나로서는 더한층 그래야 할 것이다.(79쪽)”라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화두는 글쓰기입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고 하면 흔히 책읽기도 어려운데 글쓰기까지 해야 하느냐고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든 그것을 ‘일’, 즉 ‘노동’으로 생각하면 괴로운 법입니다. 세상만사를 ‘일’이 아닌 ‘재미’로 하게 되면 괴로운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자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까지도 글을 쓰셨던 것처럼 글쓰기를 ‘괴로운 일’이 아니라 ‘재미있는 일’이라고 여기셨다고 합니다. “글쓰기와 짓기는 잘만 되면 창작이 될 것이다. 잘만 하면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 남다른 생각을 비로소 지어내는 경지에 올라설 것이다.(85쪽)”라고 적었습니다. 책을 읽고 느낀 무엇을 그냥 나열하다보면 생각이 생기고 그렇게 생긴 생각을 정리해가다 보면 글짓기가 점점 쉬워진다는 느낌이 생길 것입니다. 요즈음 나이 드신 남자 분들이 아내의 치맛자락에 껌처럼 붙어 다니려고 해서 눈칫밥을 먹는다고 합니다. 아내가 외출할 때는 쿨하게 다녀오라 하십시오. 그 시간에 책을 읽고, 혹은 영화를 보고 그 느낌을 글로 표현하다보면 벌써 아내가 누르는 초인종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는 어떻게 했느냐는 조금은 미안함이 배어있는 인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바로 ‘따로 또 같이 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함께 산다는 것’에서는 작가께서 터득하신 비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고유의 정(情)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1959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로 가수 박재홍이 부른 <유정천리>의 2절의 마지막 대목, ‘유정 천리 꽃이 피네, 무정 천리 눈이 오네’를 인용하여 “유정도 그렇고 무정도 그렇듯이, 우리의 정은 끝이 없을 것이다. 캐고 또 캐고 풀고 또 풀어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157~8쪽)”고 적었습니다. 노래 <유정천리>는 그때 당시에 학교도 다니지 않는 꼬맹이였던 제가 배워 회식자리에서 부르실 노래가 마땅치 않으시다는 선친께 가르쳐드렸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묘한 것은 미운정도 정이라고 하는데, 요즈음은 황혼에 이르러 그 정을 단칼에 잘라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들 합니다. 저자는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 쌓는 정에 더하여 나이가 들수록 이웃이 소중해지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단어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남들과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사람다워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사람됨이 제대로 갖추어지는 것(168쪽)”임을 깨닫게 합니다. 층간소음 문제로 이웃과 극한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른 요즈음 세태에 꼭 새겨들어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 화두는 ‘자연’을 꼽았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변과의 관계를 넘어 자연에까지 이르렀으니 저자는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되살펴 본 셈입니다. 어려서부터 자연과 함께 성장해온 저자가 은퇴하고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살아내셨다고 하는데, 그 점에 대하여 “바다며 산, 자연을 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보다 더한 삶의 축복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188쪽)”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바닷가를 거닐고, 또 다른 하루는 산길을 걸을 수 있는 저자의 고향은 천혜의 고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 물로 멱을 감고 그리고 산에서는 바람에 멱을 감을 수 있으니 구순에 드실 수 있었을 터인데 혈액암이라고 하는 병마에 붙잡히신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이신 곽진석교수님께서도 추모의 글에 적은 것처럼 아직도 받아야 할 가르침이 남아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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