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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나면 섬뜩하게 다가오는 나와 당신의 '안녕'

글쓴이: 해밀의 포근한 서재 | 201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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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 쓰는 마지막 서평은, 한순간의 실수로 컨설턴트라는 소위 잘 나가는 직업을 잃고 추락한 주인공이 고급 애완견을 산책 시키는 일을 하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내용의 소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전민식의 새로운 소설『13월』이다. “사람 냄새가 나는 소설, 훈훈한 소설”이라는 심사평을 들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그가 이번에는 정반대의, 사람 냄새와는 거리가 먼 차가운 소설로 돌아왔다고 한다.


 


맞다. 차가운 소설이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통제하는 음모 가득한 비정한 사회를 그린 소설이고, 더 나아가 그런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소설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경계하지 않으면 제가 제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되는 끝없는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겠지요. 그게 가능해진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이런 일이 흔하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p.364 작가 후기 중)


 


‘안녕하십니까 대자보’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안녕과 각자의 안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연말이지만, 『13월』을 완독하고 난 뒤 읽는 작가 후기에서의 ‘안녕’은 사무치게 섬뜩했다. 어느 겨울, 정읍에서부터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동의할 일이 생겨서 동의한 적이 있고, 그로 인해 소름 돋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의가 떨어짐과 무섭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몇 초 만에 알 수 있고, 근처에 CCTV가 있다면 무엇을 하는지 또한 알 수 있으며, 내가 그 곳에 서 있기까지 돈을 쓰고 서비스를 이용한 내역 정보를 통해 내 취향이나 이동 경로, 성향, 심지어 철학이나 친구 관계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는 데까지 상상이 미치니 섬뜩했던 것이다. 그냥도 아니고 사무치게. 작가도 그러했고, 나 역시 그 ‘동의’를 통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고아로 자라 일찍이 비행과 범죄에 노출되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꿈꾸던 명문대 학생이 된 재황. 하지만 그에게는 결코 평탄한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필연적인 가난으로 인해 위험한 유혹에 휩쓸리고 급기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마수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으니, ‘관찰자’라는 이름으로 재황을 ‘밥’이라 칭하며 그의 모든 일상을 기록하는 수인이라는 여자다. 수인이 소속된 곳은 ‘목장’이라는 수상한 이름을 간판으로 내 건 비밀 정부 기관으로 '인류를 위한 숭고한 프로젝트'라는 미명 하에 개인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인종을 개량한다는 엄청난 음모를 가진 곳이다.


 


라는 이 책의 주된 설정에, 주인공 재황은 우수한 유전 인자를 가진 인간이 열악한 환경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키워진 인물이라는 설정이 얹어진다. 물론, 재황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계획된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살기 위해 24시간을 빈틈없이 살아간다. 때로는 소설을 쓰고, 때로는 승희를 그리워하며.


 


그런 재황을 관찰하는 수인은, 아버지의 불륜을 훔쳐보다 관음증과 조울증 등의 정신 질환을 앓았다. 누군가의 충분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노력했으나 병력으로 인해 4대 보험이 되는 회사에 취직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병을 능력으로 인정해주는 ‘목장’에 들어가게 되고, 그녀의 일상은 재황을 지켜보는 일로 가득 찬다. 그렇게, 그녀에게 재황은 점점, 전혀 모르지만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고 멀지만 가까운 존재가 된다. 벼랑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흔들리고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재황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인은 급기야 자신의 존재가 흔들릴 정도로 재황에게 깊이 빠져든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보다 재황에게서 큰 위로를 받는 수인은 깨닫는다. 자신은 결코 재황의 앞에 나설 수 없는 재황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이봐, 수인 씨. 난 말이야 마루치를 내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어.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버렸어. 왠 줄 알아? 매일 지켜보는데 한 마디도 건넬 수 없기 때문이었어. 무슨 소린 줄 알지? 그쪽은 아무 대답도 없는데 나의 애정은 무한히 가버리는 거야. 외사랑은 순수하면서도 고통스러워. 메아리가 없기 때문이야. 하지만 외사랑만큼은 영원할 수 있어.” (p.260-261)


 


재황은 아무 대답도 없는데, 수인의 애정은 무한히 가버리고 수인이 재황의 그림자가 되어 재황을 관찰하던 그 시간이 끝나고 수인이 재황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시간이 온다. 그 시간의 수인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소설의 제목 ‘13월’을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 오기를 바라지만, 영원히 오지 않는 시간.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통제하는 음모 가득한 비정한 감시 사회를 그린 이 소설 속에서라 그런지, 재황을 생각하는 수인의 마음이 애달팠다.


 


소설의 물음으로 되돌아가, 생각한다. 과연 나는 안녕할까? 답은 진즉에 나와 있었다. 안녕하지 못하다.


 


그 10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무섭게 변했습니다. 저는 이즈음에 이르러서야 그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선 내 몸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던 문명의 이기들을 하나 둘 버리고 싶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p.365)


 


라는 작가의 말처럼, 내 일거수일투족이 관찰되고 나아가 통제될 것을 알지만, 문명의 이기들을 버리지 못할 것을 안다. 그리하여, 앞으로 걸어갈 내 길이 한 층 더 불안하고 쓸쓸하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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