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이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은 차라리 불변하는 것뿐이다. 새롭게 발명될 미래의 매체들에게 변하지 않는 영감이 되어 줄 테니 말이다.
글 : 출판사 제공 사진 : 출판사 제공
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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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기록이 아니라 차라리 싸움이기 때문이다”

 

3년 전 보았던 『불새』 시놉시스에서 신종원은 이렇게 말했다. “불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생명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그 불을 쓰고 싶습니다. 불을 탐구해 보겠습니다.” 당시의 인물들과 배경은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때부터 그가 추구했던 주제(불과 생명에 관한), 방식(새롭게 감각하고 탐구探究하는!), 문체(이미 고안된)는 그의 새 소설 속 인물과 배경을 더 단단히 감싸고 우뚝하게 서 있다. 그의 문학관에 대해 그리고 3년 만의 신작 『불새』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현 시대에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반대로 문학이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전작인 『습지 장례법』(2022)을 집필하면서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할 일이 있었다. 소설가들이 소설을 완성해 가는 과정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학은 근래 발명된 현대적인 매체들에 자리를 내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 모두의 원본 혹은 기준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까닭에 해마다 정기 발간되는 <국민 독서 실태 조사> 류의 통계 자료들 때문에 내 직업이 사라질까 봐 지레 겁먹거나 불안에 떨지 않는다. 모든 매체의 뿌리에는 문학이 자리하고 있고, 그러므로 매체를 이용하고 경험하는 인구 전체가 결국에는 책 한 권씩 손에 들게 될 날이 틀림없기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학이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은 차라리 불변하는 것뿐이다. 영상 매체가 돈이 된다는 이유로, 어떤 담론이 유행한다는 이유로 어설프게 자리를 옮기거나 다른 매체를 흉내 내지 않도록 도리어 고집을 피우고 외골수로 남아 있어야 한다. 바로 이렇게 자신의 역사와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문학은 새롭게 발명될 미래의 매체들에게 변하지 않는 영감이 되어 줄 테니 말이다.

 

우주의 기본 요소인 4원소로 4부작 장편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리고 『불새』는 두 번째 책이다. 전작은 물에 대한 『습지 장례법』이고, 이번엔 불, 상반된 이미지와 감각이다. 작가로서의 화두가 무엇이기에, 이런 장편 시리즈를 기획했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의 목소리이자 문법, 말하자면 디지털 문화 자체가 쟁점이다. 디지털 문화의 대표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로 공감각을 꼽는다. 전자 기기와 웹 기반 매체를 이용할 때, 우리는 모든 감각이 뒤섞이고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일종의 생체 화학적 감전 현상을 느끼곤 한다. 그러니까 매체를 이용하지 않을 때조차도 모든 감각이 하이브리드 상태로 항시 설정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모든 매체의 원본이자 기준으로서 디지털 시대의 혼란스러운 감각들과 음성들 또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우리는 우리 바깥의 문화와 언어를 향해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고, 어디까지 바뀌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언어문화를 지배하는 휘발성 밈들은 왔다가 사라지고 말겠지만, 책들은 아니다. 2020년대에 출간된 책들이 2030년대의 언어를 규정한다. 2040년대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열리면 열릴수록 닫는 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나는 문학에 이 손을 맡겨 보려 한다. 문학은 시간 예술이다. 시대와 신체에 축적된 시간들을 책의 형태로 닫는다. 지금 다시 4원소를 일련의 소설로 재해석하려는 것은 단지 충동이나 미학 때문만은 아니다. 인류의 원형적 상상력과 결부되어 있는 이 고대의 물질들을 2020년대 한국어에 결속시켜, 내가 통과하고 있는 시간과 언어를 그대로 기록할 계획이다. 그렇게 나아가 미래의 화자들이 내 책을 지침 삼아 미래의 언어들과 대결할 수 있도록 일종의 무기로서 내 언어를 여기 남겨 두려 한다. 점점 더 경계 없이 열릴 세상의 언어들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거두고 모아 거꾸로 하나의 맥락으로서 종합하는 21세기 한국어의 형태를 목도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문학이 오래된 매체로만 남아 있기보다 시대와 동기화를 이루거나 때때로 앞서갈 수 있기를 바란다. 따라서 지난 작품집들은 문학 내부로 디지털 문화의 여러 특성을 옮겨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앞으로 선보일 장편 시리즈로 우리의 육신과 정신을 이루는 고대의 물질들이 어떤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을지 끈질기게 지켜보려 한다.

 

『불새』의 주인공은 바오로 신부, 페트리, 헬레나 그리고 불새이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들이 믿었던 성배가 가진 막강한 힘과 권력, 상징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당한 역사와 인물들 사이에서 스러진 하나의 생명을 <부활>시킨다. 인류사에서 생명과 삶과 죽음 안에서 근본적으로 고민해 왔던 방대한 주제이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화두이다. 이 이야기가 소설의 재료로서 처음 어떻게 다가왔는가?

4원소를 소재로, 저마다 맥락은 다르지만 하나의 세계 안에서 연결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습지 장례법』이 물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던 까닭에 다음 장편은 불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소설의 구체적인 장면과 국면 들이 뚜렷한 모양새로 만들어진 건 아주 나중의 일이다. 구상과 집필 사이에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책의 머리말에도 적어 두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예고 없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다. 물론 살다 보면 이따금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죽음들 앞에 매번 힘없이 승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죽음과 싸워 보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렇다면 생명을 어느 때보다도 열렬히 찬미하고 옹호해야 했다. 한 번도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소설을 준비하는 내내 난처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러다 두 달여 간 스페인 여행을 가게 되었고, 안달루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일종의 성당 투어를 다니다가 우연히 바오로 신부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신학 공부를 그만두지 않았고, 그래서 소설가 대신 가톨릭 사제가 된 또 다른 세계의 바오로 말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생명과 죽음이라는 오랜 전쟁 앞에서 두 바오로는 같은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뭘 써야 할지 저절로 정해져서, 최종적으로 부활에 다다르기 위해 목격하고 또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죽음 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생명의 무게를 절실히 실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다.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제한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원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까?) 

나무를 나무라고 쓰지 않고, 새를 새라고 쓰지 않기. 우리 곁의 자연물들이 다만 인간의 배경인 양 존엄을 여의지 않도록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 스스로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성과가 있다면 Olive-sided Flycatcher에게 한국어 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학명이 Contopus cooperi인 이 산적딱새과의 장거리 여행자는 서식 환경 탓인지 한국 조류학계로부터 공증된 이름을 선물 받지 못한 것 같았다. 이한수 한국환경생태연구소 박사께서 올리브딱새로 번역을 제안하신 사례가 있지만, 윗가슴에서 아랫배까지 망토처럼 펼쳐지는 장식깃의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아 못내 아쉬웠다. 비전공자가 임의로 만들어 낸 이름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새>라는 유형학적 울타리에서 이 멋진 생명을 풀어주었다는 생각에 남몰래 뿌듯했다. 소설가들, 시인들은 이름 자체가 곧 왜곡이며 변형임을 알면서도 이름 짓기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가 명명하는 이름들의 규모와 종류에 비례하여 세계 역시 넓어지고 밝혀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개체가 줄어서 자취를 감추는 생명들만이 멸종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 불리지 않아 기억에서 잊혀지고 추방당한 생명들도 같은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언어의 영향력을 허투루 사용하고 싶지 않다.

 

어떤 작품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시대적 감각을 갱신하는 작품들을 쓰고 싶다. 죽을 때까지 혹은 소설 쓰기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 멈추지 않고. 작가로서 나는 인간만을 찬양하고 싶지 않다. 어떤 개인의 불행이나 고통, 슬픔을 묘사하고 전시하려는 목적으로 문장을 쓰고 싶지 않다. 소설은 기록이 아니라 차라리 싸움이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어떤 도전 내지는 투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눈앞에 없음, 상상할 수 없음, 표현할 수 없음에 대한 저항. 심리적 과부하, 인지 부족, 신체 기관들의 협응력 저하, 지적 불가해성에 대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아니, 나는 쓰겠다. 써야만 하고, 반드시 쓰일 것이고, 마침내 쓰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글쓰기로 시대적 감각을 갱신하는 일이야말로 <지금은> 혹은 <아직은> 쓸 수 없음에 대한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완성한 모든 작품은 적어도 그 시점에 한해서는 <쓸 수 없다>고 판단되었던 것들에 대한 시도였다. 이미 그렇게 읽어 주신 분들이 있다면 멀리서나마 감사를 전하고 싶다. 

 

-『불새: 인터뷰와 서평들』,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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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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