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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검사 J의 무탈한 나날] 나의 사무실 변천사

시골검사 J의 무탈한 나날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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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우면서, 최대한 무섭지 않은 척하며 애써 걸음을 늦추던 그 복도, 내 발걸음 소리에 오직 나만이 귀를 기울이던 시간은 어쩐지 이후에 펼쳐질 검사 생활의 은유 같았다. (2023.05.31)


격주 수요일, <채널예스>에서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언스플래쉬

처음 검사가 되었을 때 나는 내 사무실이 따로 없었다. '지도 검사'라고 하는 선배 검사의 방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했다. 어쩐지 셋방살이 같았던 시절을 끝내고 마침내 독립하여 내 사무실이라는 것을 가진 때는 6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날은 마침 광복절이어서 나는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해방을 맞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떡을 해서 돌렸다. 나의 지도 검사는 식민지 잃은 제국의 인사처럼 떨떠름하게 떡을 씹으며 나의 안녕을 기원해줬다.

나의 첫 사무실은 1층 민원실 옆에 있었다. 보통 검사실은 1층에 잘 두지 않는데, 청사 사정에 여유가 없어서 기존에 압수물 창고로 사용하던 공간을 개조해 나에게 준 것이다. 일반적인 사무실보다 층고가 훌쩍 높고 창문도 내 머리 위에 있어서 1층이라기보다는 어쩐지 반지하 같은 느낌이 강한 곳이었다. 어쨌든 좋았다. 처음으로 독립해서 내 직원과 내 방이 생겼다는 것이, 정말이지 어엿한 검사가 되었구나 싶어 신이 났다.

신이 난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왜 전국의 검찰청들이 좁아터지더라도 1층에는, 그것도 민원실 옆에다가는 검사실을 설치하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보통 검사실은 엄격한 출입 통제선 뒤에 있으면서 출입 등록이 된 사람들만 드나드는 공간이었지만 민원실은 달랐다. 분기탱천한 민원인들이 민원실 옆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다행인 것은 당시의 내가 20대의 앳되고 미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다짜고짜 "검사 어디갔냐"고 찾는 사람들에게 컴퓨터 뒤에 있다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지금 검사님 안 계시네요" 하면 쉽게 수긍들을 했다.

반지하 스타일의 사무실에는 1년 열두 달 습기인지 한기인지가 돌았다. 그 음습한 곳에서 날것의 기록을 뒤지며 범죄의 조각들을 맞춰 나가는 일은 약간 괴기스러우면서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강간·살인·사기·폭력...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갖가지 인간 군상들과 그들이 벌이는 범죄의 원형들을 그 공간에서 배웠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록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많고 많은 기록 사이를 헤집다 보면 어느새 한밤중, 열정 충만한 민원인들도, 그들을 온몸으로 응대하던 직원들도 모두 퇴근하고 민원실 셔터가 무겁게 내려진 시간이 되었다. 혼자서 야근을 하다가 퇴근하려면 2층으로 다시 올라가 뒷문을 통해 나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불 꺼진 캄캄한 복도를 오래 통과해야 하는 코스였다. 그 뒤로 나는 핸드백에 들어가는 사이즈의 손전등을 하나 샀다. 지금 같으면 휴대폰 손전등 기능을 사용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던가? 손전등을 켜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울리며 걷던 그 시간을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무서우면서, 최대한 무섭지 않은 척하며 애써 걸음을 늦추던 그 복도, 내 발걸음 소리에 오직 나만이 귀를 기울이던 시간은 어쩐지 이후에 펼쳐질 검사 생활의 은유 같았다.

손전등을 핸드백에 품고 다니던 꼬꼬마 검사 시절 이후로는 그래도 제법 변변한 사무실들에서 일했다. 반지하가 아닐 뿐 전국의 어느 검찰청이나 검사실은 비좁았다. 보통 검사 한 명에 수사관 한두 명, 실무관 한 명으로 팀이 구성되어 한 사무실을 쓰는데 각자의 책상을 벽을 따라 배치하고 나면 중간에 조사받는 사람이 앉기에도 빠듯한 공간이 겨우 나왔다. 어떤 때는 그 간격이 너무 좁아서 누군가 사람을 불러 조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나갈 길이 없었다. 조사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 그들의 휴식 시간이 오도록 화장실도 못 가고 참아야 했다.

여러 명의 사람과 이들이 각자 쓰는 컴퓨터가 내뿜는 열기로 검사실은 언제나 뜨거웠다. 특히 에너지 절약 정책이 엄격히 시행되던 해의 여름에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덥다는 도시의 검찰청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면 지장을 찍기 위해 비치해둔 인주가 질퍽하게 녹아내렸다. 한번은 저녁 식사 배달을 온 인근 도시락집 아저씨가 후끈한 사무실 문을 열다 주춤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와 여긴 우리 주방보다 더운데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고 범죄를 부인했고, 나는 자주 공소장에 오탈자를 냈다.

대부분의 사무실에서 검사의 자리는 거의 창문 쪽에 있었다. 거기가 나름 상석이라는 이유로 구성된 자리 배치이겠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줄곧 창문을 등지고 앉아 일했다. 창을 등지고 하루 종일 기록을 파고 있으면 창밖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등진 창 너머로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것을 못 보고 내 앞에 쌓여 있는 인간 군상들의 범죄 기록에만 머리를 박고 일하는 것이 어쩐지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내 책상 앞 컴퓨터 모니터 너머에는 조사받는 사람이 앉는 의자가 있었다. 내가 등지고 앉은 세상 어딘가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주로 그 자리에 앉아 나의 질문에 대답하고 갔다. 조사가 끝나고 그들이 돌아간 다음 나는 가끔 그 의자에 앉아 봤다. 들척지근하게 열기가 남아있는 의자에 등을 기대면 그의 각도로 내 자리가 보인다. 내가 쓰는 컴퓨터 모니터의 뒷면 너머로 내가 등지던 창이 보인다. 피의자들이 이미 저질러버린 일에 대하여 검사와 답도 없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왜 어느 순간 먼 곳으로 눈길을 던지는지 그 의자에 앉으면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내 등 너머로 그들이 떠나 온, 그리고 다시 살아갈 세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피조사자 자리에 앉아 공소장에 서명을 했다. 반대쪽에 앉아서 네임펜으로 사각사각 서명을 하다 보면 더러 그간 안 보이던 오류도 보이고, 창문 너머로 멀리, 세상의 계절이 흐르고 있는 것도 보였다.

시간이 훌쩍 흘렀고 지금의 내 사무실은 제법 넓다. 다양한 용도의 의자와 책상들이 있다. 더이상 누구도 내 방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지 않는다. 반지하 스타일의 압수물 창고에서 시작해 18년 만에 엄청난 변화다. 사무실이, 자리가 변한 만큼 조직 내 위치도, 해야 할 역할도 변한 것이다. 이 넓은 사무실에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결재판들이 썰물 같이 물러나간 오후의 사무실에서 나는 자주 서성인다. 이 자리 저 자리에 앉아 보고 이 창가 저 창가에 서본다. 앉는 위치에 따라 바라보는 창의 방향에 따라 다른 시선과 다른 마음이 되던 시간들을 생각한다. 아직 어느 한 자리 딱 내 자리다 싶은 곳을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서성이는 것이 내 자리인 듯, 좀 더 서성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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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명원(대구지방검찰청 상주지청 검사(지청장))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썼다.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가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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