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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의 글 쓰는 식탁] 나의 나무들 - 마지막 회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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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사람과 사람의 뿌리와 가지가 뒤엉키는 것이 고통이나 불편이 아니라, 어느 날 도끼 같은 불행이 우리를 내리쳐도 쉽게 잘려 나가지 않을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장의 할머니들, 이모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2022.12.02)

언스플래쉬

'글 쓰는 식탁' 연재를 시작할 무렵에는 아침마다 호수를 걸었다. 그곳에서는 키가 큰 나무들이 자랐고, 나는 목을 힘껏 젖혀서 우듬지에 걸린 계절을 가늠하곤 했다. 요즘은 아침이면 일터(카페)에 가기 위해 시장을 걷는다. 예전보다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고, 시선은 아래로, 땅으로, 낮게 자란 나의 나무들을 향한다.

정수리 나무들이다. 자다 일어나 머리카락이 눌린 반찬 파는 이모의 정수리, 탱글탱글한 파마머리가 동서남북으로 뻗은 과일 파는 이모의 정수리. 나는 나무만큼 한자리를 오래 지킨 그 정수리 미인들의 옷차림을 보며 계절을 알아챈다. 솜이 들어간 바지, 목에 감은 스카프, 털실로 촘촘하게 짠 조끼... 오늘은 입동인가 보다. 땅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오는 계절이 왔다. 지금 내 나무들의 손등과 볼과 입술이 허옇게 트고 있다.

길에서 채소 장수 할머니를 만나 상추를 샀다. 할머니는 소쿠리에 담긴 상추를 한 움큼 집어 검은 봉지에 담더니 다시 한 줌을 보태 넣는다. 시장에서 저울보다 정확한 것은 상인들의 눈대중이다. 나는 검은 봉지를 건네는 할머니의 '기역' 자로 휘어진 몸이 내 카페 앞에서 자라는 나무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동네 사람들이 삭막한 길이 보기 싫다며 이십 년 전에 콘크리트 바닥에 흙을 퍼다 날라서 심은 등나무. 그때 함께 심은 다른 것들은 다 죽고 그 나무만 살았는데... 올여름 리모델링 공사는 무리였을까? 나무는 시름시름 앓다가 잎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다 죽어가는 나무를 살린 것은 동네 이모들(동네 아주머니들은 모두 이모다)이다. 돌아가면서 물도 주고 약도 주고, "못쓰것다" 혀도 차고, "불쌍하다" 달래기도 했더랬다. 그러다 며칠 전, 카페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이모들이 나를 불렀다.

"유진아, 살았다!"

그 주어 없는 문장은 얼마나 힘이 세던지! 무슨 일인가 문을 활짝 열고 나가 보니 이모들이 몸이 구부러진 그 나무의 푸른 잎을 가리키고 있었다.

"봐라, 이제 덩굴처럼 바닥으로 가지를 뻗으면서 살아남을 테니까. 내년 봄이면 무성한 잎들이 유진이네 가게 앞을 다 뒤덮겠네, 얼마나 예쁠까!"

얼마나 예쁜가, 바닥에서 자라는 것들은! 몸을 낮추고 가지와 줄기를 낮게 뻗어 다른 식물들과 잎과 가지와 뿌리를 엮고 사는 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그 나무만큼 어여쁜 채소 할머니가 있다. 시장의 차가운 바닥을 온몸으로 데운 사람, 먹고사는 일에 성심을 다하는 사람, 그가 기지개를 켜듯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내게 상추를 건넨다.

"장사 잘혀!"

"그럼요. 할머니도 오늘 대박 나세요."

좌판에 소쿠리 다섯 개, 거기 담긴 상추를 모조리 팔면 얼마나 남을까, 그걸 다 팔고 고구마도 팔면 얼마를 벌까. 대박이란 말이 그에게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으나 언젠가 할머니가 "상추랑 고구마를 다 팔면 발 뻗고 자지"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엄지손가락을 들어본다. 어울리지 않는 애교라고 해도 좋고 아부라고 해도 좋다. 이렇게 해서라도 내 가는 뿌리를 그의 굵고 튼튼한 뿌리에 엮어보고 싶으니까. 시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사람과 사람의 뿌리와 가지가 뒤엉키는 것이 고통이나 불편이 아니라, 어느 날 도끼 같은 불행이 우리를 내리쳐도 쉽게 잘려 나가지 않을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장의 할머니들, 이모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 여자들의 호탕한 언어와 거침없는 몸짓과 번뜩이는 눈빛이 가르친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는 이 시장에서 낮은 나무로 사는 법을 배우는 중이 아닐까. 아니, 내가 나무인 것을, 뿌리가 있고, 나의 뿌리가 다른 뿌리와 단단히 엉켜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아닐까.

전북 익산시 중앙동 중앙 시장. 이곳에는 꽃 같은 여자들 말고, 나무 같은 여자들이 산다. 장미처럼 입술을 빨갛게 칠해도, 철쭉처럼 진분홍 스카프를 둘러도 그들은 누군가의 기분에 쉽게 꺾이는 꽃이 아닌, 아무도 흔들지 못하는, 뽑히지 않는 나무다.

나를 키웠던 이 시장으로 다시 돌아와 매일 이 길을 걸으며 나무가 된 사람들의 삶을 책처럼 펼쳐 본다. 더듬더듬 읽다 보면 그 삶을 글로 옮기는 날도 오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내가 아는 이 나무들을 증언하고 싶다. 가지가 꺾이는 아픔을 겪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그 굽은 삶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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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유진(작가, 번역가)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웠다. 산문집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몽 카페』를 썼고, 아니 에르노의 소설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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