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은희경의 물건들] 스타킹의 계절

<은희경의 물건들> 18화 - 작은 규모의 자아실현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말하자면 스타킹이 나에게는 그런 물건이다. 옷을 입을 때에 대체로 어떤 보편적인 기준에 따르지만, 조그마한 파격으로 재미를 느끼는 것. (2022.11.16)


<채널예스>에서 매주 수요일,
은희경 소설가의 사물에 얽힌 이야기 '은희경의 물건들'을 연재합니다.



"패션에 관심이 많으신 편으로 알고 있는데, 스타킹 이야기도 써주세요."

얼마전 이런 제안을 받았다.

이 연재를 시작할 때 나는 35개 정도의 목록을 미리 만들어놓았다. 소설을 쓸때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면 글을 시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계획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쓰다보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데 어쩌면 그것이 어깨에 힘이 들어간 상태, 즉 나의 상투성 뒤에 숨어 있던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경우에는 거의 그 생각들을 발견하는 탄력에 의지해 쓴다고도 할 수 있다. 매번 처음 하는 일처럼 낯설고 어려운데 지겹지는 않은 이유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계획을 세울 때의 나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리 만들어놓은 나의 산문 아이템이 좀 뻔하다고 느껴질 무렵에 저 제안을 받고 반가웠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인 동시에 그 계획을 바꿔 실행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 그래서, MBTI가 뭐냐고요?

사실 나는 사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분류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사람은 저마다 고유하며 복잡한 존재라는 내용을 꾸준히 소설에 쓰고 있습니다만) 

'자신이 어떤 틀에 박힌 유형으로 살아왔다는 걸 깨달으면서 씁쓸해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을 쓴 적도 있다. 또, 성격이나 심리 테스트를 하다보면, 먼저 그걸 만든 사람의 판단 기준과 메커니즘을 유추하게 되는 분석병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하며 운명을 점치고 싶어한다는 사실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다. 사상 체질, 혈액형, 별자리, 음양오행설을 잘도 소설 속에 인용했으며, 애니어그램 책도 열심히 읽었고, 별자리 공부를 하던 H의 추천대로 팟캐스트도 따라 들었으니까. 나의 MBTI가 궁금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그 패턴에 의해 내가 누구로 판명될지 알 것 같았고 아니면 아닌 대로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H가 트렌드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그녀와 조계사 템플스테이에 간 적이 있었는데, 새벽 예불과 정갈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하산(?)해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였다. 속세로 돌아온 기념으로 그녀가 그 테스트를 권했던 것이다. 나는 지난밤 108배를 했던 불심에 의해 순순히 그녀를 따랐고 그 결과 계획성 있는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내 예상대로였다.(각 항목에서 '내가 보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골랐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남이 보는 나보다는 상대적으로 정확하지 않을까) 그런데 거기에 대한 내 반응은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으니... 나는 그날로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 모두의 MBTI를 물었고, 아직 테스트를 해보지 않은 친구에게는 압력을 넣는 의미에서 설문 링크를 보냈다. 친구 다섯 명이 모두 나와 같다는 걸 알고는 진심으로 신기해하며 단톡방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여섯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같은 성격으로 판정받았다는 사실이 왠지 즐거웠다.

내가 계획을 세우는 유형인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 더. 나는 앞서 말했듯 계획을 바꾸는 일을 더 좋아한다. 지난 주말만 해도, 수목원으로 단풍을 보러 가다가 비가 떨어지자 곧바로 소속 야구팀의 우승 기념으로 할인 행사를 한다는 주류 아울렛으로 급히 네비게이션 주소를 변경하며 신이 났었다.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리 계획을 세워놓지만, 그 합리적이고 안전한 계획이 깨지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 것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타고난 조건일지도 모르나, 그걸 바꾸는 것은 나의 선택이자 의지이다. 소규모의 자아실현이라고 말하는 건 좀 무리일까.

말하자면 스타킹이 나에게는 그런 물건이다. 옷을 입을 때에 대체로 어떤 보편적인 기준에 따르지만, 조그마한 파격으로 재미를 느끼는 것.

패션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이 말은 여러 번 들었다. 차림새에 신경을 쓴다는 뜻이다. 하지만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멋지게 보인다면 물론 좋지만) 초라하거나 뒤쳐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나의 엄마가 원했던 바이기도 하다. 일찍이 나의 백일 사진을 찍을 때부터 줄곧 엄마는 남의 눈을 의식하며 옷을 입혔는데, 돋보이기보다는 꿀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사춘기 이후부터 나는 또 체형의 결점을 가리기 위해 옷을 골랐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그다지 주장이 없는 것과 달리 나는 옷은 쉽게 고르지 못해서 같이 쇼핑하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곤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게는 특정 음식에 대한 알러지도 없고, 알콜에 거부 반응도 없고, 커피를 마시다가 잠들 정도로 카페인에 예민하지도 않으며, 채식을 하려다 포기했고, 하루에 세 번씩 기회가 있는만큼, 이번 끼니에 반드시 맛있는 것을 먹지 않아도 괜찮다는 대범함(?)까지 갖추고 있다. 즉, 먹는 일에는 그다지 결점이 없다. 하지만 신체에 관한 한 꽤 많은 결점이 있는 것이다. 결점이라니, 잘못 훈련된 미적 편견이다. 그럼에도 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어떤 종류의 옷은 피하게 된다. 스타킹만은 예외이다. 모든 선택이 자유롭다.

젊은 시절의 나에게 스타킹은 하나의 족쇄였다. 질이 좋지 않은 나일론 스타킹은 민감한 피부를 조여왔고, 오래 신고 있으면 가렵고 따끔거려 견디기 힘들었다. 습한 여름에는 더했다. 여성이 맨 다리를 내놓으면 안 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여름에도 반드시 스타킹을 신어야 했다.(회식 자리에서 직장 동료였던 남자들이 어느 지방 술집에 가면 여종업원들이 맨 다리로 옆에 앉는다는 정보 교환을 하며 은밀히 눈짓을 주고받는 걸 보면서도 아무 대꾸 하지 못했던 걸 반성합니다) 또한, 스타킹에 줄이 나가면 단정하지 못하게 여겨졌고 지적을 받기 일쑤였으므로 시시때때로 신경을 써야 했다. 옷장에 스커트가 아예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회사 화장실에서 다급하게 팬티스타킹을 갈아 신어보지 않은 여성 직장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젊은 날을 보낸 나로서는 해방감을 표현하는 구멍난 검은 망사 스타킹 패션조차 이미 클리셰가 돼버린 지금 세상의 패션이 흥미로울 수밖에.

장마철에 무릎 위까지 푹 젖은 나일론 스타킹을 신고 족쇄를 끌듯이 걸어야 했던 여성 이야기를 소설에 쓴 적도 있는 내가, 여름 거리를 맨 다리로 다니면서 얼마나 해방감을 느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에게 스타킹은 추워지면 신는 실용적 물건이자 패션이 되었다. 나의 스타킹은 지금 서랍 두 개를 차지하고 있다.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탓도 있지만 족쇄가 아니라 패션이 된 이후 커피색과 검은색의 팬티스타킹이 전부였던 나의 스타킹이 다양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하찮은 규모의 '자아실현'은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한때, 나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넓은 가로줄이 있는 모직 스타킹을 즐겨 신었다. 일본의 작가 교류 행사에 갔을 때 한 중학교를 방문했을 때에도 신고 갔다. 교장 선생님이 한국 홍보를 위한 색동 스타킹이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10년 전쯤 장편 소설을 냈을 때는 공식 인터뷰 자리에 자주색 오버 니 삭스를 신고 나가서 내가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인 척했다. 망사 스타킹으로 나의 자유분방함을 표현해 보려 시도했으며, 스팽클이 붙은 다소 유치한 스타킹을 신고서 여행 기분을 냈다. 친구가 외국에서 사다준 진한 파랑색 스타킹을 신고 송년회에 가면서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패션에 신경쓰던 내가 이런 파격까지 감당할 수 있나. 언젠가 송년회에서 건배 제의 때의 의례적인 분위기를 깨기 위해 월드컵 응원에서 썼던 붉은 악마 머리띠를 했을 때에도 반응이 좋지는 않았는데... MBTI에 따르면 나는 계획한 대로의 동선 안에서만 움직이는 소심한 사람이라는데...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났다. 대학원에 다닐 무렵, 한때 나는 12간지의 궤를 외워 남의 사주를 봐준다며 그럴 듯한 말 지어내기를 좋아했다. 그때 동아리방에 앉아 선무당 사주를 봐주었던 것도 인기를 좀 얻어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심하게 사주가 나쁜 사람(전문 용어를 쓰자면 '파'가 세 개나 되었다)을 만나 그에게 궁색하나마 덕담을 해준답시고 '당신은 남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자신의 팔자는 탐탁치 않으므로)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 '그렇다면 당신이 도와주면 어떻겠냐'고 느닷없는 반전을 시도하는 바람에, 그만 그 후로 오랫동안 내가 그 사람을 돕고 있다고 한다.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어쩐지 내 사주에 일복이 많더라니. 사주팔자, 별자리, 그리고 MBTI, 그거 다 믿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 분석에 따르면, 나는 냉철한 사고형이 아니라 기분파이자 감정형이라고 하네요.

다음 이야기는 '메달을 걸어본 적이 있나요'이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ㆍ사진 | 은희경(소설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이중주」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상속』,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이너리그』, 『그것은 꿈이었을까』 등을 썼다.

오늘의 책

넘치는 시대, 새로운 트렌드

넷플릭스를 필두로 대중화된 OTT 서비스와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지금 시대의 변화상을 다룬다. 시간 가성비를 중시하고 예습을 위한 감상 등 다양한 이유로 콘텐츠를 빠르게 소비하는 습관을 사회 전반의 트렌드 변화로 읽어내 날카롭게 분석한다.

아홉 작가의 시선이 통과한 한 단어

정세랑 기획, 아시아 9개 도시, 9명의 젊은 작가들의 소설집.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이 ‘절연’이라는 한 단어로 모인 이 프로젝트는 아시아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연결되어 있음을. 문학으로 새로운 연결을 맺어줄 한 단어, 아홉 개의 이야기.

일도 삶도 즐겁게!

회사 동료로 만나 친구가 된 김규림, 이승희 마케터가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터와 일상에서 자주 쓰는 25개의 주제로 두 저자의 생각을 그림과 글로 표현했다. 하루에 깨어있는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일하며 보내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이다.

위화가 복원해낸 근대 대격변기의 중국

190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23년에 걸쳐 집필한 위화의 신작 장편소설. 시대의 격변은 평범한 시민의 운명을 어디까지 뒤흔들까. 미지의 도시 ‘원청’을 찾아 헤매는 린샹푸처럼, 모두가 가슴 속 ‘원청’을 품고 산다면 수많은 다짐들이 현실이 될 것만 같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