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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아 "푸른 그림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에세이 『여름의 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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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은 닿을 수 없는 색이에요. 바다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지만 손에 쥘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더 갈망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2022.09.13)


글을 쓰며 살고 싶지만 무슨 글을 써야 할지는 몰랐던 시절, 이현아 작가는 두툼한 노트를 사서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저 좋아하는 그림을 골라서 붙였을 뿐인데, 노트가 절반쯤 채워졌을 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마음을 사로잡힌 그림마다 '푸름'이 물들어 있었다. 

인터뷰 자리에서 그는 지금껏 써온 그림일기 노트를 건넸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푸른빛이 쏟아지듯 눈에 들어왔다. 이현아 작가의 말에 따르면 '푸름'은 닿을 수 없어서 아름다운 색, 다가가지 않고 바라볼 때 비로소 가까워지는 색이다. 그는 푸른 그림에 비추어 삶을 반추한다. 말하기 어려운 상처, 우울, 불안, 슬픔 같은 것들은 그림을 통과하며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닿을 수 없어 갈망하는 색, 푸름

2017년부터 노트에 쓰기 시작한 그림일기가 모티브가 된 책이에요. 어떻게 쓰기 시작한 일기였나요? 

처음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어라운드> 매거진 퇴사를 앞두었을 때였어요. 퇴사 후 무엇을 하면 좋을지 막막했고, 에디터로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였죠. 에디터들은 잡지의 페이지를 구상할 때 디자인 레퍼런스를 찾잖아요. 저는 그림이나 영화 스틸컷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컴퓨터 바탕 화면에 늘 좋아하는 그림을 모아둔 폴더가 있었죠. 일하다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어느 날, 그 폴더를 열어서 보았는데요. 문득 '그림에 대한 글을 써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짧은 글을 적기 시작했는데, 쓰고 나니 그림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어떻게 달리 보이던가요? 

새로운 언어에 통달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오래 전부터 보았던 그림인데도 느낌을 글로 정리하니 보이지 않던 면면들이 보이더라고요.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눈이 트이는 느낌을 받잖아요. 그와 비슷했어요. <어라운드> 매거진을 퇴사하고 곧장 미국 여행을 갔는데, 미술관을 다녀오면 그날 본 작품 중 하나를 골라서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렸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강박이 생기고, 텅 빈 워드 화면을 보는 게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종이에 손글씨로 일기를 적기 시작했어요. 한쪽에는 그림을 인쇄해서 붙이고, 다른 한 쪽에는 메모를 남기는 식으로요. 이렇게 하니 글을 쓴다는 부담감이 줄어들고, 과정 자체를 즐기게 되더라고요. 

"나를 낚아챈 그림 속에는 공통된 색이 있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하나의 색이라기 보다는 '푸른 기운'에 가까운 어떤 것(14쪽)"이었다고요. 

일기를 쓸 때마다 새로운 그림을 붙인 게 아니라, 좋아하는 그림을 먼저 노트의 군데군데 붙여 놓고 마음 가는대로 펼쳐서 글을 썼거든요. 어느 날 책처럼 노트를 펼쳐보는데 신기하게도 푸른 느낌의 그림이 많았어요. 여기에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곧장 노트 뒷장에 그동안 쓴 글을 분류해 목차를 적어봤죠. '유년', '여름', '우울' 등의 키워드로 글이 묶였는데, 그때 쓴 목차가 거의 그대로 출간되었어요. 

왜 푸른 그림에 마음이 갔을까요? 

아직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글을 쓰면서 알아보니 파랑은 오묘한 구석이 많은 색이더라고요. 먼 옛날에는 사람들이 파란색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고대 문헌에는 파란색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요. 실제로 자연에서 파란색을 가진 생물은 지구상에 5%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안료 중에 제일 구하기 힘든 색은 파란색이었고, 푸른 빛의 광석 '라피스 라줄리'는 금보다 더 비쌌다고 하죠. 또, '푸름'은 닿을 수 없는 색이에요. 바다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지만 손에 쥘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더 갈망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여름의 피부'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어요. 제목만 보고 "소설인 줄 알았다"는 독자 리뷰가 많더라고요. 

푸른 그림을 주제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뒤, 곧바로 정한 제목이었어요. 책에 실린 그림들은 사실 '파란색으로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푸른 색이 물든 듯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그림들이잖아요. 이 느낌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하다 보니 문득 '여름'과 '피부'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원래 모순되거나 서로 이질적인 두 단어가 붙은 제목을 좋아해요. 

가장 좋아하는 계절도 여름인가요? 

네, 한겨울에 태어났는데 여름을 제일 좋아해요. 여름의 저녁과 새벽녘에 볼 수 있는 푸르스름한 빛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인 것 같아요. 여름은 정반대의 것들이 공존하는 계절이기도 하죠. 무척 덥다가도 땀이 식으면 서늘함이 느껴지고, 잘 익은 과일이 하루아침에 썩어버리곤 하잖아요. 또 다른 계절은 서서히 왔다가, 서서히 가는 것 같은데 여름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기는 느낌이에요. 그런 모순적인 면이 좋아요.



하나의 그림이 또 다른 그림을 부르고  

첫 번째 실린 글의 제목이 '전봇대 켜는 아이'였어요.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이더라고요. 

충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거든요. 지금도 동네에 슈퍼 하나 없는 깡시골인데요. 당시에는 전봇대가 자동으로 켜지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나가서 불을 켜야 했어요. 그런데 저희 집 바로 앞에 전봇대가 있었거든요. 제가 매일 당번처럼 전봇대 켜는 일을 맡았죠.(웃음)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한번씩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다들 정말 특이한 경험을 했다고 깜짝 놀라곤 해요. 

'새파랗게 어린' 유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해요. 어린 시절에는 어떤 아이였어요? 

시골에 살면서도 자연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였어요.(웃음) 식물이나 벌레 이름도 잘 몰랐고요. 매일 방에 앉아서 책만 읽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는 아빠가 매주 충주 시내에 있는 '문학사'라는 책방에 데리고 가서 원하는 만큼 책을 사주셨던 기억이 나요. 저는 <세일러문>도 만화 영화보다 책으로 보는 게 훨씬 더 좋았어요. 

푸른 기운을 가진 또 다른 카테고리 중 '우울'도 있죠. 불안할 때마다 잼을 끓인다는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생각이 끊어지지 않을 때 더 불안하잖아요. 잼을 끓이는 건 생각을 안 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어요. 조리 과정이 단순하고 명료해서, 잼을 만들다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머릿속이 텅 빈 상태가 되더라고요.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대한 고백도 기억에 남아요. 그림을 보고 글을 쓰는 게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나요? 

전혀요.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죠(웃음). 글을 계속 쓰고 싶고, 더 잘 쓰고 싶어서 불안해질 때가 많으니까요. 저는 불안하고 우울할 때, 주짓수나 복싱처럼 정말 힘든 운동을 일부러 찾아서 해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도록요. 잠깐이나마 그 생각을 잊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처음 보는 그림이 많아서 인터넷에 작품명을 쳐봤는데요. 『여름의 피부』에 실렸다는 것만 검색되는 작품이 여러 점 있더라고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림을 실어야겠다고 의도한 건 아니에요. 다만 제 취향이 그런가 봐요. 고전적인 명화보다 21세기 화가들의 작품을 좋아하거든요. 저와 동시대를 함께 살았거나, 공유할 수 있을 만한 삶의 궤적이 있는 화가들에게 끌려요. 또, 유명한 그림은 분명히 누군가 그에 대한 글을 썼을 테니까요. '이미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했는데, 나까지 해야 하나'라는 마음도 있어요.(웃음) 

미술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궁금할 것 같아요. '이런 그림들을 어떻게 찾았지?'라고요. 

파도 타듯 연결되며 알게 된 화가들이 많았어요. 어떤 그림이 좋아서 그에 대해 계속 찾다가 새로운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 식이었죠. 어느 화가든 그가 영향을 받은 다른 예술가가 또 있으니까요. 한 그림이 다른 그림을 소개해준 셈이에요. 또, 저는 해외여행을 가면 미술관밖에 안 다니거든요. 전시를 보다가 우연히 만난 작품들도 있었어요. 

책에 넣지 못해 아쉬운 그림도 있나요? 

'조지아 오키프'가 '문(door)'을 주제로 그린 시리즈를 꼭 넣고 싶었어요. 작품 자체가 추상적이고 굉장히 아름다운 데다가, 초기 작품부터 후기까지 그림의 진화 과정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거든요. 이외에도 넣고 싶은 작품들이 많이 있었는데, 저작권 만료가 되지 않아서 아쉽게 포기해야 했어요.



의문을 남기는 그림이 좋다  

어떤 그림을 볼 때 마음이 움직여요? 

보자마자 좋다고 느낀 그림에 대해 글을 쓴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지 않게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처음 봤을 때 이상하고 불편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 훗날 너무 좋아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대표적으로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그림이 그랬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이지만, 저는 파울라의 존재를 몰랐거든요. 그런데 작년에 베를린에 사는 친구의 집에 갔다가 우연히 이현애 저자의 책 『독일 미술가와 걷다』를 읽게 됐어요. 그 책의 첫 챕터가 파울라에 대한 이야기였죠. 처음에는 그림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그림 속 여자들의 표정도 기이하고요.


<왼손에 두 송이 꽃을 든 자화상>, 1907, 파울라 모더존베커

당시 독일에 있었으니까 이 사람의 작품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브레멘에 있는 '파울라 뮤지엄'에 갔는데요. 여러 작품을 보다 보니 무언가 들어올리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계속 작가와 그림에 대해 알아보고,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점점 파울라가 좋아지기 시작했죠. 저는 의문이 생기는 그림을 볼 때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모난 구석을 가진 사람들. 뾰족함을 연마하거나 닳지 않도록 애쓴 이들. 그들은 뭉툭해지기 쉬운 세상에서 지지 않으려는 것이다(168쪽)'라고 썼어요. 작가님도 모난 구석이 있는 사람인가요? 

완전히 모났죠(웃음).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둥글게 둥글게"예요. 다 덮어두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말하는 건 재미없어요. 서로 솔직한 생각을 말하고, 맞춰가는 게 진짜 좋은 거죠. 그래서 저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오는 빌런들을 정말 좋아해요.(웃음)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누가 봐도 좋은 그림, 누가 봐도 재밌는 책은 세상에 없잖아요. 리뷰가 100개 있는데, 모두 칭찬 일색이라면 믿을 수 없죠. 뭐든 호불호가 확실한 게 훨씬 더 매력적이에요. 같은 맥락으로 저는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고 싶어요. 

작가의 말 첫 문장이 '나는 늘 글을 쓰고 싶었다(13쪽)'였어요.  

글을 쓰는 건 재능을 타고난 소수에게 주어지는 소명처럼 느껴졌거든요. 내가 그 욕망을 가지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았죠. 지금도 제 정체성이 작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 책도 에디터의 정체성으로 쓴 거죠. 물론 그림보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글이 많지만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기획하고, 그림을 고르고, 어떤 글을 쓸 지 고민했던 건 에디터의 역량으로 해낸 일이었어요. 앞으로 제가 어떻게 변해갈지 모르겠지만요. 물론 계속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또 쓰고 싶은 분야의 글이 있을까요? 

이 책을 70% 정도 썼을 때 불현듯 쓰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푸른 기운을 가진 그림들은 '우울'까지 나아가기는 하지만 이게 병적으로 진화하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우울'과 '고독' 파트를 쓰면서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훨씬 더 병적인 느낌을 가진 그림들, '폭력'과 '공포'와 '악'을 다루는 그림에 대해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지금 밝힐 수는 없지만, 이미 제목도 정해놨어요.(웃음)

책을 읽고 독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나요? 

다음 책이 출간된다면 꼭 싣고 싶은 화가가 있는데요. 몇 년 전, 뉴욕 여행을 갔을 때 어느 갤러리에서 그 화가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너무 무섭고 싫었어요. 반면, 동행한 남자친구는 그 작가에 푹 빠져서 책까지 사왔죠. 그 후로 남자친구와 결혼을 해서 결국 그 책이 우리 집 책장에 꽂히게 되었는데요. 남편이 워낙 좋아해서 자주 보다 보니 궁금해지고, 마침내 좋아지기까지 하더라고요. 쓰고 싶은 책의 주제로 떠올리게 될 정도로요. 

흔히 "그림은 위로가 된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나를 즉각적으로 위로해주는 건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림에 대해 관심이 많고, 더 알고 싶은 분들이라면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불편한 감정을 남기는 그림도 오래 들여다보시길 바라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이현아

에디터, 아트 라이터. 1990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인터뷰, 칼럼, 에세이 등 예술에 관한 다양한 글쓰기를 한다. 그중에서 2017년부터 노트에 쓰고 있는 그림일기를 가장 아낀다. 매거진 <어라운드>에서 에디터로 커리어를 시작해 퍼블리, 젠틀몬스터를 거쳤다. 지금은 IT 회사에 UX라이터로 일한다. 남산 아래서 남편과 두 고양이 말테, 미쭈와 살고 있다.




여름의 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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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아 저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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