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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아웃] 실금 가득한 이 단어를 보세요 (G. 안희연 시인)

책읽아웃 - 황정은의 야심한 책 (229회) 『단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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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좀 느리게 걷고 한 번 더 돌아보고 하는 그 마음이 단어의 실금을 보게 만든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2022.02.10)


“당신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합니까. 가장 깊이 찔린 기억과 가장 높이 뛰어올랐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어떨 때 흩어지거나 맺힙니까.” 

안희연 작가님의 책 『단어의 집』에 실린 문장입니다. 안희연 작가님은 처음 만났고 이제 계속 만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곳, 나이, 학벌을 묻는 대신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는 문장으로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제안을 합니다. 그 문장을 만드는 징검돌로 세 가지 단어를 책 속에서 제시하는데요. 녹는 점, 어는 점, 끓는 점입니다. 저마다 어떤 문장을 만들까, 얼마나 다양한 대답이 나올까, 궁금하고 또 재미있어서 저도 해보았습니다. 

‘방심하며 웃는 얼굴 앞에서 녹고, 속이며 웃는 얼굴 앞에서 얼고, 웃지 말아야 하는 상황인데 웃는 얼굴 앞에서 나는 자주 끓는다.’ 

안희연 작가님은 마흔다섯 개의 단어를 『단어의 집』에 실으면서 이들을 ‘무언가 태어나려고 실금 가득한 단어’라고 말을 합니다. 이때의 실금은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굳이 불을 켜고 그 불을 들이대고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보이는 균열입니다. 이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 좋아서 저는 이번 설에 말과 실금과 사람이라는 단어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실금 가득한 말은 무언가 태어나려고 힘을 가득 품은 말일 수도 있고 너무 약해서 깨지기 쉬운 말일 수도 있는데, 두 가지 상태가 제게는 모두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힘이 세고 동시에 깨지기도 쉬운 사람과 무척 닮아서 이상한 말. 오늘은 이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인터뷰 – 안희연 시인 편>

“한 단어에 대해 말하는 일은 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말하는 ‘단어 생활자’를 오늘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산문집으로 『단어의 집』을 쓴 안희연 작가님입니다. 

황정은 : 『단어의 집』을 읽으면서 말을 발견하는 시인의 능력에 정말 감탄을 했는데요. 표지에 이런 말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 실금 가득한 단어를 좀 보세요. 무언가 태어나려 하고 있어요.” 저는 이 말도 좋았고, 말 자체의 힘이 대단히 좋아서 이 말이 이 책을 끝까지 읽는 동안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이 말에서 ‘실금’이라고 하셨는데, 말 그대로 실금이라서 그 자리에 실금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실금 가득한 단어를 알아보는 것도 저는 일종의 능력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안희연 작가님은 어떻게 그런 능력을 키우셨나요?

안희연 : 뭔가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은 그냥 약간의 관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일상적인 장면 안에서 발견한 실금들이거든요. 그냥 사소해서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인데 제가 좀 미련이 많아요. (웃음) 평소에도 연연하기를 잘하고 미련이 많아서 한 자리를 빨리 떠나지 못하고 늘 서성이고 뒤늦게 다시 한 번 찾아가고, 마음의 일에 있어서건 아니면 생활의 일에 있어서건 많이 연연을 하는 편이어서 다 떠나거나 다 흩어지거나 한 뒤에도 작은 하나가 떨어져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좀 두리번거리는 성미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실금이라고, 좀 상징적인 말이기는 한데, 그런 실금들을 좀 발견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황정은 : 네, 일상적으로 그냥 스쳐갈 수 있는 말들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는 말씀이시죠.

안희연 : 네. 사람들이 물어봐요, 이런 단어들을 도대체 어디서 골라냈냐. 모두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저는 억지로 찾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드라마를 정말 열심히 보거나 TV 예능 이런 것들을 재방송에 재재방송까지 보거나 책을 읽다가 메모를 하거나 간판을 보다가 재밌어서 적어놓은 단어들이거나, 다 그런 것들이지 뭔가를 의도적으로 ‘낯선 걸 찾아야 돼’ 이런 마음으로 발굴하려고 애쓴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좀 느리게 걷고 한 번 더 돌아보고 하는 그 마음이 단어의 실금을 보게 만든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황정은 : 이번 책을 만들면서 “단어에 대한 이야기를 적기로 마음먹었을 때 세운 준칙”이 있었다고 쓰셨어요. 단어를 자석이라 생각하고 몸에 붙여보자, 라고 생각하셨다고요. 단어를 모은 책을 만들면서 또 다른 원칙이나 기준도 있었을까요?

안희연 : 가장 앞서 얘기 드린 것처럼 억지로 고르려고 하지는 않았고요. 메모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지금 (책에 실린 단어가) 마흔다섯 개라고 한다면 후보군은 거의 200~300개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책을 쓰기 위해서 제가 의도적으로 이런 작업을 했다기보다는 제가 평소에도 늘 단어 메모를 하는 습관이 좀 있거든요. 아무래도 시를 쓰다 보니까 낯선 단어가 덜컥 저한테 걸려드는 순간들이 있고, 그러면 뜻을 알지 못해도 그 말을 계속 되뇌면서 궁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말의 뜻을 모르는 채로 계속 음가를 입안에서 굴려보면 막연하지만 어떤 풍경들이 펼쳐지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런 거를 조금 즐겨본 것 같아요. 이를테면 ‘오고오고’라는 단어라면 그 뜻을 잘 모르더라도 ‘오구오구’ 같은 느낌도 좀 들고, 강아지의 턱을 쓰다듬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고, 촉각인지 후각인지 그런 감각으로써 제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즐겨보고, 그러고 나서 뜻을 펼쳐 보았을 때 의외의 것이 나타나기도 하고요. 아니면 예상한 것대로 좋을 때도 있고. 그렇게 막연하지만 단어에 가까이 다가가는 저만의 친근해지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그게 몸 안에 자석처럼 들러붙는 기분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그럴 때 어떤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것 같아요.

황정은 : ‘글을 퇴고할 때 무언가를 자꾸 덧붙이려는 나를 경계한다’라고도 쓰셨는데요.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안희연 : 퇴고하는 거 정말 힘들잖아요. (웃음)

황정은 : 힘들죠, 힘듭니다. (웃음)

안희연 : 그리고 자신이 없을 때 더 덧붙이게 되는 것 같아요.

황정은 : 네, 맞아요. 

안희연 : 그래서 정말 엄격하고 냉정한 손으로 퇴고를 해야 되는데 대체로는 그러기가 쉽지가 않아서... 저도 늘 사실은 한 문장이면 되는데 그 문장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한 단락을 해 놓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원래 있었던 그 문장만 남기고 다 지워야 되는 경우가 많이 있더라고요. 시 쓸 때 특히 그걸 진짜 많이 느껴요. 정말 시는 설명하는 순간 그 모든 감동이 다 파괴될 수 있는데 덧붙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 좀 괴물 같은 마음이 들어요.

황정은 : 어째서 괴물까지 생각을 하시나요?

안희연 : 정말 좋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엄격할 필요가 있는데 내 두려움과 겁이 덕지덕지 지방 덩어리처럼 엉겨 붙은 이상한 형태가 제 눈앞에 놓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서. 이를테면 자코메티의 조각 같은 것을 상상하면서 만들었는데 알고 보니까 점토 덩어리가 막 붙어 있는 조각을 마주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는 빨리 뒷걸음질을 치고 다시 처음에 조각을 상상하려고 하면서 진흙을 좀 덜어내는 느낌으로 언어들을 좀 지워나가는 것 같아요.

황정은 : 좀 아깝지 않으세요, 그럴 때?

안희연 : 아깝지 않고요. 좀 이상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느낌적인 느낌으로 만들고 싶은 형상은 어떤 골조 같은 거에 가깝다면 덧붙여진 지방 덩어리는 바로 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내 두려움이 만든 문장인지, 아니면 사족처럼 정말 붙여진 문장인지, 꼭 필요해서 거기 있어야 될 문장인지는 쓰면서 체감하게 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지운 부분 때문에 남은 부분이 더 풍성해지고 더 깊이 확장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지우는 것이 아깝지는 않은 것 같아요.

황정은 : 네. 말씀 들으면서 저도 깊이 공감을 하면서 들었어요. 소설 작업을 할 때 저도 유사한 고민과 유사한 느낌들을 가지고 쓰거든요. 그런데 소설 같은 경우에는 원고지 한 40~50매, 많게는 몇 백 매까지도 다 날려야 되는 상황도 있어서 그럴 때는 좀 망설임이 있기는 한데. 다른 작가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쓰다 보면 본능적으로, 안희연 작가님 말씀하신 대로 ‘이거는 사족이다’라거나 ‘쓸데없이 덧붙는 부분이다’라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건 없는 게 좋은 거잖아요. 그걸 정말 잘라내서 덜어낼 수 있는가, 이걸 선택하는 게 되게 좀 힘들긴 한데 막상 잘라내면 되게 만족스러운 기분도 느껴지고 그렇더라고요.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를 썼다.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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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단어의 집
안희연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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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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