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장강명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칼럼] 우리가 사라지면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2월호
‘한국 독자들은 유명한 작가가 쓴 작품을 읽는다’는 말은 한국 독자들의 지성을 비웃는 소리가 아니었다. 사실 책을 아예 안 읽는 사람과 열심히 읽는 사람으로 독서 인구가 양극화되면서 후자 그룹의 수준은 점점 더 높아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2021.12.02)
“한겨레문학상으로 이미 등단했는데 왜 또 공모전에 여러 번 도전한 거예요? 상금 때문이었어요?”
2015년 12월,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인터뷰 중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날까지 그런 질문들을 제대로 받지 않았던 게 이상했다. 그때까지 했던 인터뷰는 수상이라든가 신간 발간 같은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인터뷰어가 굳이 다른 상이나 책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혹시 무례한 질문이라 여겨서 삼갔던 걸까?
나로서도 그 질문을 그날 그 자리에서 받아 다행이었다. 나는 문화부에서 일해 본 적이 없고, 데뷔하고 한동안은 문학 담당 기자들을 만나면 부담스러웠다. 그들이 평론가와 비슷한 존재들로서, 그 앞에서 내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평가의 대상이 될 것 같다는 오해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이는 주말판 담당 기자였고, 내 기사도 주말 섹션에 실릴 예정이었다. 게다가 상대와 나는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다. 언론계에서는 같은 시기에 업계에 들어온 기자들끼리는 회사가 달라도 입사 동기라 부르며 친하게 지내는데, 우리가 그런 사이였다. 질문을 던진 기자는 내가 수습기자로 처음 경찰서에 갔을 때 만난 동료였다.
나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1년 동안 수입이 30만 원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조선일보 기자는 “결국 상금 때문이었느냐”고 물었다.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했죠. 한국 소설 독자들은 어떤 책을 읽을까. 재미있는 작품을 쓰면 되나.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까 사람들이 재미있는 작품을 읽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나라 독자들은 유명한 작가가 쓴 작품을 읽어요. 일단 유명해져야 합니다. 상을 여러 개 받아서 유명해지자 싶더라고요.”
인터뷰의 이 부분이 소소하게 화제를 모았다. ‘말을 왜 이렇게 재수 없게 하냐’는 반응도 있었다. 나는 본 대로 말했을 따름이다. 2015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정확한 관찰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 작가나 편집자나 문학 담당 기자들은 모이면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왜 베스트셀러 순위에 있는 소설가들의 이름은 20년째 그대로인가?
‘한국 독자들은 유명한 작가가 쓴 작품을 읽는다’는 말은 한국 독자들의 지성을 비웃는 소리가 아니었다. 사실 책을 아예 안 읽는 사람과 열심히 읽는 사람으로 독서 인구가 양극화되면서 후자 그룹의 수준은 점점 더 높아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나는 소설가, 소설가 지망생, 평론가, 출판사 대표, 편집자, 문학 담당 기자들을 만나 취재하며 그 질문의 답을 찾으려 애썼다. 논픽션 『당선, 합격, 계급』을 쓰며 나는 한국 독자들이 적절한 추천을 받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 중요한 고리들이 빠져 있거나 부서져 있어서, 독서생태계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냥 유명한 작가의 책을 집어 들게 된다고.
교양 인문서와 영미 스릴러를 꽤 읽지만 소위 순수 문학은 그다지 탐독하지 않고, 한국 소설은 드물게 시도하는 50대 독서가가 있다 치자. 당대 한국 문학에 관심이 생겨 한 권을 찾아 읽으려 할 때 그는 신문의 서평 기사나 문학상 수상작, 혹은 베스트셀러 순위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 영역의 추천은 그의 취향과는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몇 번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그는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을 추천받았다는 생각보다는 ‘요즘 한국 소설 정말 시시하다’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쉽다. 불평을 터뜨리고 싶은데 자신의 생각이 소수의견일 것 같아 조심스럽다. 문학 담당 기자나 문학상 심사위원들의 권위에 혼자 도전하기도 부담스럽다. 그렇게 쌓인 불만들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곤 한다.
신문 서평이나 독자 투표의 문제점은 『당선, 합격, 계급』에서, ‘올해의 책’ 같은 목록의 빈틈은 『책, 이게 뭐라고』에서 다뤘다. 현재 한국 독서생태계에서 그나마 작동하는 영역의 서평 쓰기나 책 추천은 지적 허영이나 과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래서 대중문학, 아동문학, 자기계발서, 실용서는 불리해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신인의 글, 트렌디하지 않은 책, ‘비평 거리’가 많지 않은 작품도.
그 책임을 문학 출판사와 평론가와 문예창작학과에 물어야 할까? 장르소설 팬덤에서 그런 목소리가 종종 나온다. 문단은 왜 이곳을 외면하나! 왜 학교에서 장르를 가르치지 않나! 나는 그런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데, 문단을 작품성을 심판하는 법원이나 문학성의 원천이 아니라 작은 취향공동체로 보기 때문이다. 그곳은 나름대로 치열하다.
2016년부터 2020년 사이에 한국 문학의 세대교체는 결국 일어났다. 하지만 ‘한국 독자들은 유명한 작가의 책을 읽는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나는 본다. 유명한 작가들의 명단이 바뀌었을 뿐. 그리고 그런 물갈이로 인해 한국 문학의 영토가 얼마나 확장됐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오래 고민해야 할 것 같다.
10년쯤 전에 사람들은 “왜 한국 소설에는 시간 강사나 백수, 출판사 직원밖에 안 나와?”라고 툴툴거렸다. 지금은 “왜 죄다 젠더 퀴어 얘기야?”라고 따진다. 이런 항의는 일리가 있지만 거칠고 공격적이어서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 문단은 이런 투박한 불만을 대체로 무시한다. 문단과 일반 독자는 이제 거의 소통하지 않는 듯하고, 이 대목이 한국 독서생태계의 부서진 고리 중 하나다.
한 인터뷰에서 나는 문단을 수도권에 비유한 적이 있다. 경계는 뚜렷치 않지만 그것은 실재하며, 자원을 독점한다. 그런데 수도권 주민들이 사악하고 욕심이 많아서 수도권 집중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을 허물어야 할까? 문단 밖 다른 독서공동체에서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책을 활발히 추천하고 비평하는 풍경이 정답 아닐까. 그리고 그 공동체들이 서로 자극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집합과 합집합을 만들어가는 거…….
그렇지. 황당하고 나이브한 생각이지. 저도 압니다. 책 읽는 사람의 수는 적고, 전문 서평은 책 깨나 읽는 독서가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짧은 감상이라도 의미 있는 내용이 모이고 쌓이면, 그 기록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맥락을 일으키게 된다면, 비평 공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플랫폼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궁리를 하는 중에 『댓글부대』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게 됐다. 이미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었고, 한 책으로 상금을 두 번 받는 셈이었다. 상금으로 나는 한국 소설 서평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중적인 재미가 있는데 언론 보도나 문예지의 평론 대상이 되지 못해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책들을 소개하는.
서평집을 전자책으로 만들면 제작비와 유통비를 절감할 수 있지 않을까? 책값을 0원으로 책정하면 주요 서점의 전자책 판매순위에서 금방 1위를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서평가 50명을 섭외해 ‘최근 10년 사이에 나온 한국 소설 중 대중적인 재미가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단행본’을 추천하고 서평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뿌듯한 작업이었다. 무료 전자책 서평집 『한국 소설이 좋아서』가 나오자 주요 서점들이 일제히 기획전을 열어 주었다. 한 달 동안 이 전자책을 내려 받은 사람이 1만 명이 넘었다. 이두온 작가의 스릴러 『시스터』가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는 과정에서 이 서평집이 미약하게나마 기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는데, 얘기를 듣고 무척 기뻤다.
다음에 또 한 책으로 상금을 두 번 받으면 『한국 소설이 좋아서 2』를 제작해야지. 『한국 소설이 좋아서 3, 4, 5……』도 언젠가 만들어야지. 2017년에는 한 독서 벤처기업에서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인상적으로 봤다며 협업을 제안해오기에, 회사 사무실에 찾아가 구상하던 무료 비평집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젊은 기업인들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실제로 이뤄진 것은 없었다.
부족한 점도 많은 기획이었다. 나와의 친분에 휘둘리지 않도록 외부 편집부에 필진 구성을 맡겼는데, 나중에 보니 청탁을 받고 나서야 조건에 맞는 책을 찾아 읽고 서평을 쓴 이들이 더러 있었다. 글은 잘 쓸지 몰라도 한국 문학의 애독자는 아니었던 거다. 어떤 필자는 소셜미디어에서 ‘좋은 한국 소설을 소개해 달라’며 네티즌 추천을 받았다. 네티즌 추천은 그냥 내가 직접 받으면 되는데.
무엇보다 이 서평집에서 권하는 책들을 독자들이 실제로 많이 찾아 읽은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한 독자가 『한국 소설이 좋아서』에 나온 책들을 읽는 독서 모임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감사하고 미안했다. 서평 모음집을 그런 독서 운동으로 보다 쉽게 연결하는 방안을 궁리하게 됐다.
한편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나는 다음과 같은 모습들을 목격한다. 긴 기사나 게시물에 ‘누가 요약 좀’이라는 댓글이 달린다. 포털 사이트들은 언론사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을 이용한 기사 요약 서비스를 제공한다. 유튜브가 미디어 세상을 정복하고, 더 짧은 동영상 위주인 틱톡이 뜬다. 사람들의 문해력이 날로 떨어진다는 탄식이 이곳저곳에서 나온다.
아아. 그러니까 이건 더 이상 독서생태계의 문제가 아니로군. 이제 사람들이 긴 글을 읽지 않는군. 아니, 읽지 못하는군. 체계적인 지식과 지혜는 긴 글에만 담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문명의 종말에 다가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여태까지 책을 읽는 사람들이 우리 문명을 지켜왔다고 믿는다.
2021년까지 한 책으로 문학상을 두 번 받는 일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 책으로 영화 판권을 두 번 팔게 됐다. 어느 영화사가 구매한 판권을 다른 제작사가 웃돈을 주고 가져갔다. 그 과정에서 내 몫이 또 생겼다. 그런 일이 가능한지 미처 몰랐다. 어쨌든 그렇게 생긴 돈으로 『한국 소설이 좋아서 2』를 만들기로 했다. 이번에는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할 계획이다.
『한국 소설이 좋아서 2』를 구상하던 중 스타트업 기업을 운영하는 대학 동기를 만났다.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업계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독서생태계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떤 플랫폼에 대한 막연한 아이디어도 두서없이 떠들었다. 한참 내 말을 듣던 친구가 말했다. “그런 건 금방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결제 기능 같은 게 필요 없다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아. 돈도 별로 안 들어.”
잉?
그날 술자리에는 아내도 있었다. 아내는 나보다 한국 소설을 더 열심히 읽는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그 기획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해보자고 했다. 얼마 뒤 친구는 개발자 두 명과 함께 왔다. 나는 화면 설계서라는 걸 처음 그려 보았다. 그래픽 툴을 사용할 줄 몰라 그냥 A4지에 볼펜으로 쓱쓱 그렸다.
“하루에 두 명쯤 방문하는 사이트가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물었다. “괜찮아. 내가 혼자서라도 운영할래.” 아내가 그렇게 멋진 답을 내놓았고…… 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대하 SF 『파운데이션』 시리즈에 나오는 심리역사학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은하제국의 쇠퇴와 멸망을 예견하고 암흑기를 줄이기 위해 지식공동체를 건설한다.
그렇게 『한국 소설이 좋아서 2』와 독서 플랫폼을 아내와 대학 동기와 개발자 청년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다. 내년 5월이나 6월쯤 공개할 수 있을까? 사이트 이름은 ‘그믐’이라고 지었다. 아직도 책을 읽는 독자들, 바로 우리들이 문명의 그믐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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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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