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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가끔은 좋은 일도 있다] 작은 사랑에 빠진 상태였다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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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슬프게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2021.10.08)


오랜만에 우리 집 강아지 흑당이와 아침 산책을 했다. 줄을 채우고, 운동화를 신고, 계단을 내려와서 햇살을 받고, 바람을 맞고 알았다. 세상에나, 오늘이 가을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흑당이가 가을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보다는 많이 알겠지. 냄새에 민감한 아이니까 풀 냄새, 나무 냄새, 바람 냄새가 얼마나, 어떻게 바뀌었는지 나 같은 둔한 인간보다 훨씬 빨리, 커다랗게 느낄 것이다. 그래서인지 흑당이는 많이 신이 났다. 멋지게 꼬리를 세우고 해와 바람을 느끼며 진지하게 걷고, 진지하게 마킹을 했다. 그리고 엔간하면 인간의 제멋대로인 사정을 들어주는 다정한 강아지지만 오늘만큼은 고집이 셌다. 흑당이 길 건너서 저기까지 갈 거예요. 저기서 냄새 맡을 거예요. 그리고 흑당이는 공원도 갈 거예요. 오늘은 그런 날이에요.

보통 저기까지 갔으면 공원은 안 들르는데, 하지만 흑당이는 단호했다. 줄을 살살 당겨봐도 버티는 모습에 공원에 가기로 했다. 평일 낮의 공원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여름엔 잔디밭 한가운데 서 있으면 강한 햇볕과 후덥지근한 바람에 ‘제가 졌어요’하는 기분이 드는데 가을볕은 따가워도 그렇지가 않다. 봄볕, 겨울 볕과 다른 선명함이 있어 매번 보던 언덕과 풀밭이 옛날 윈도우즈 배경화면처럼 완벽해 보였다. (윈도우즈 그 풀밭 이제 모르려나!) 나도 모르게 같은 구도의 사진을 스무 장이나 찍어버렸다. 오는 길에는 반짝거리는 보도블럭 위를 걸었다. 보도블럭 안에 반짝이를 넣을 생각을 누가 했을까? 덕분에 지나다니는 내가 가끔 기분이 좋다.

여름 채소의 시간은 끝났나 보다. 애호박도 비싸졌다. 하지만 나는 최근 동네 농협에 로컬 채소 코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가보니 대파가 한 단에 1300원이었다. 무려 옆 동네 밭에서 자란 것이었고, 라벨에는 생산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아니 공일공…여기까지는 좀…. 집에 와서 썰어보니 매울 정도의 멋진 향이 났다. 같이 산 청경채와 버섯, 마늘도 멋진 상태였다. 신이 나서 올리브 오일을 듬뿍 넣고, 좋아하는 채소를 마음껏 넣어 파스타를 만들었다. 왜 청경채는 ‘이번엔 진짜 많이 넣었다’하고 생각해도 막상 접시에 담으면 ‘애걔…’ 하게 되지. 육수에 자신의 맛남을 많이 나눠주는 채소인가 봐. 면은 넉넉히 3인분을 넣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둘이서 한 줄도 남기지 않고 해치워버렸다. 파스타 100그람이 1인분이라는 기준은 전 지구 차원에서 수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분명 오늘은 가을의 첫날이지만 왠지 따뜻한 차를 내리고 싶지 않았다. 명도 높은 햇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최근에 티포트를 하나 장만했는데 나는 그와 작은 사랑에 빠진 상태였다. 그 친구에 대해 조금만 얘기하자면 무려 뚜껑에 거름망이 달려있다. 그 말은 포트에 잎 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뚜껑을 덮고, 조금 기다렸다가, 컵에 부을 때 ‘자동으로’ 잎이 걸러진다는 얘기다. 으으, 이 멋짐을 알아채는 분들이 분명 계시겠지. 더 멋진 점은 사이즈가 280밀리라는 부분인데, 500밀리 컵에 얼음을 가득 부어 그 티포트로 차를 내리면 양이 똑 떨어진다! 그간 얼마나 많은 티포트에게 잔잔한 아쉬움을 느껴왔던가. 하지만 우리는 드디어 만났다. 나는 잔잔한 장미 향이 나는 홍차로 아이스티를 만들었다. 새 티포트 덕분에 이 홍차는 낙엽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홍차를 오래 두면 낙엽이 됩니다. 다음엔 태워볼까 봐요) 벌써 옅은 오후가 되었다.

엄마가 사과를 보냈다. 아니, 파주에도 좋은 사과 파는데 왜 이런 걸 보내. 한 박스를 어떻게 먹어. 상하면 마음만 안 좋아지잖아. 궁시렁거리며 상자를 열어보니 내가 감히 살 수 없는 등급의 사과가 곱게 놓여있었다. 칼을 꺼내 사과를 깎았다. 사과 속살에 노란 꿀이 보였다. 접시 위에 대충 잘라놓고 한 조각 입에 넣었다. 가을의 선물 같은 맛.

세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슬프게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흑당이와 걷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내 멋대로 마늘과 버섯을 잔뜩 넣은 파스타가 얼마나 맛있는지, 가을 사과의 꿀이 얼마나 달콤한지, 마음에 쏙 드는 티팟을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나는 사실 대부분의 시간 감탄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모든 순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마음의 창은 의지로 열고 닫을 수 없다. 어쩌면 그 방법을 평생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저러나 오늘은 가끔 있는 참 좋은 날, 일 년에 단 하루 있는 가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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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지은(작가, 음악가)

작가, 음악가. 책 <익숙한 새벽 세시>, 앨범 <3>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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