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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하루] 1미터의 세계 – 모범피

에세이스트의 하루 14편 – 모범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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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1미터도 되지 않는 활동반경 안에서 사는 삶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본다. (2021.08.04)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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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1미터도 되지 않는 활동반경 안에서 사는 삶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본다. 조금의 산책도 허락되지 않는 삶. 매일 똑같은 풍경을 보고 똑같은 음식을 먹는 삶.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삶. 매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기다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 시골 개의 삶.

지난겨울, 부모님이 한적한 시골마을로 이사하셨다. 나는 부모님 집에 내려갈 때마다 우리 집 백구를 데리고 자주 마을을 산책하곤 했다. ‘감자’라는 이름의 시골 개는 마을 언덕 위 외딴집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목줄에 묶여 길 아래를 빼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고 싶었지만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서 나는 언덕 아래에서 그 아이를 향해 ‘안녕’하고 손을 크게 흔들어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자가 언덕 밑을 지나는 우리를 향해 집요하게 짖어댔다. 지독한 폭염이었다. 혹시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게 아닌가 싶어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가까이에서 본 감자의 세계는 좁았다. 7kg 정도의 포메라니안 믹스인 듯 보이는 감자는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줄에 묶여 있었고, 주변엔 배설물이 쌓여있었다. 감자는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반겼다. 우리 집 백구와 서로 코를 맞대며 탐색을 하기도 하고, 흥분하여 개집 주변에 마구 영역표시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소변이 밥그릇과 물그릇으로 마구 튀었다. 감자는 조그만 개집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격한 동작으로 우리를 반겼다.

자기를 1미터의 세계에 가둔 것이 사람이건만, 감자는 동종인 백구보다 사람인 나를 더 좋아했다. 나를 향해 낑낑 소리를 내며 꼬리를 흔드는 그 몸짓이 애처로워 머리를 슬며시 쓰다듬어주었더니, 감자는 기분 좋다는 듯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의 손길을 즐겼다. 사람이 그리워서 우리를 그토록 애타게 불렀구나. 외로움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구나. 그날 그 무더위 속에서 감자와 최대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다.

몇 주 뒤, 백구와 함께 반려견 간식을 싸 들고 다시 감자네를 찾았다. 싸구려 사료만 먹던 감자에게 간식을 건네자 감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아이고 백구 왔구나~ 감자랑 재밌게 놀다 가거라.”

그러다 우연히 외출하시는 감자의 주인 할머니를 만났다. 막연히 개에게 못되게 구는 무서운 노인의 이미지를 상상했는데, 의외로 선한 인상을 가지고 계셔서 놀랐다. 할머니는 내게 반갑게 인사하시며, 주말마다 집에 내려오는 거냐고, 나중에 식사하러 한 번 집에 놀러 오라고 하셨다. 할머니를 오해한 것이 죄송할 만큼의 친절함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시 찾은 감자의 공간은 놀랍도록 깨끗해져 있었다. 주인 할머니가 치워주신 것이다. 다만 짧은 줄에 매인 모습은 그대로였고, 할머니가 보행보조기에 의지하시는 모습으로 보아 감자의 산책은 언제까지고 기약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를 1미터 줄에 매어놓는 어르신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악하기만 한 마음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시골 어르신들에게 개는 추우나 더우나 당연히 밖에서 키우는 동물이고, 가족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가축의 개념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런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덮어놓고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게 이것뿐은 아니니까. 어르신들은 개들이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도록 오랜 시간 진화해왔다는 것도, 산책이 개들에게 꼭 필요한 행위라는 것도, 예방접종을 제때 해줘야 한다는 것도, 다만 모르시는 것일 뿐이다.

감자의 주인 할머니께 반려견 간식 한 봉지를 드렸다. 백구 간식을 너무 많이 사서 나눠드리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인사를 드렸으니 다음에 올 때는 감자에게 짧은 줄 대신 와이어 줄을 설치해주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려볼 생각이다. 와이어 줄은 기둥이나 나무에 양쪽으로 연결하여 반려견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줄이다. 할머니네 집은 마당이 꽤 넓은 편이라 감자의 활동반경이 지금보다 몇 배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지자체의 정책적인 사업보다 이웃의 작은 관심이 시골 개의 삶을 더 낫게 만든다고 믿는다. 내가 감자의 산책까지 챙기지는 못하더라도 이웃집 할머니에게 개의 특성에 대해 친절하게 이야기하고, 와이어 줄 정도 설치해드리는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심한 내가 그 정도 오지랖은 부려보려고 한다. 집에서 쿨조끼를 입고 시원하게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는 우리 집 백구를 보면서 생각한다. 수많은 1미터의 세계를 잊지 말자고 말이다. 

(*감자의 이름은 실제와 다릅니다.)



*모범피

모범생이 아니고 싶은 모범생. 글쓰고 디제잉하고 요가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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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모범피(나도, 에세이스트)

불치의 사춘기를 앓으며 디제잉하고 글 쓰고 요가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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