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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의 추악한 이면

『오염된 재판』 번역한 신민영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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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보도된 주요 소송에서 여러 차례 무죄를 이끌어낸, 국내 형사사법절차 개선 전문가 신민영 변호사가 번역했다. (2021.07.06)


『오염된 재판』은 형사사법절차 개선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 브랜던 L. 개릿(Brandon L. Garrett)의 저서로, 과학수사의 오류로 잘못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DNA 검사에 의해 결백을 입증받은 최초의 오판 피해자 250명을 조사한 르포 사례집이다. 언론에 보도된 주요 소송에서 여러 차례 무죄를 이끌어낸, 국내 형사사법절차 개선 전문가 신민영 변호사가 번역했다. 

우리가 신뢰하는 과학수사 시스템이 어떠한 치명적인 허점들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악용될 수 있는지 지적하는 이 책은 ‘헌법 프로젝트(Constitution Project)’에서 헌법 해설상을, ‘미국 변호사 협회’의 실버 가벨상에서 명예 가작을 수상했다. 또한 미국 대법원, 하급 연방법원, 주 대법원뿐 아니라 캐나다, 이스라엘 등 각국 법원과 정책기관에서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언론·변호사협회의 필독서로도 회자되고 있다. 『오염된 재판』은 출간 즉시 화제가 되며 아시아권에서는 일본과 대만, 중국에서 번역됐다.



첫 책인 『왜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가』 이후로 약 4년 반만의 책이에요.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번역자로서 책을 펴낸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 책은 형사재판의 로제타스톤 같은 책이에요. 재판결과가 잘못된 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진범이 나중에 나타나서 ‘사실 범인은 나다’라고 말하지 않은 이상 재판이 잘 됐는지 잘못됐는지 알 길이 없죠. 오판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희박해요. 이 책은 ‘재판이 왜 오판으로 치닫게 되는가’를 250개의 실제 사례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번역을 해도 될지 송구스러울 정도로 중요한 책인데, 번역서가 안 나와서 그냥 제가 해버렸습니다.

처음에 이 책의 판권도 직접 구매하셨었다고 들었어요. 변호사님은 이 책의 저자처럼 ‘형사사법 절차 개선’에 앞장서온 분인데, 동종분야 책이어서 알게 되신 걸까요? 이 책을 알게 되고 판권을 구매하시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요.

20대 남성이 강간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돼서 변호를 맡은 적이 있어요. 이 남성이 가해자로 지목된 이유는 피해 여성의 진술 때문이었는데, 그 진술엔 앞뒤가 맞지 않는 정황들, 오류들이 많았죠. ‘길을 걷는 중에 갑자기 이 남성이 끌고 가서 강간했고, 자신의 휴대전화에 자기 전화번호를 남겨놓고 갔다’는 주장이었어요. DNA 검사를 해봤는데 이 남성이랑 일치하지 않았죠. 이렇게 과학적 증거가 전무하니 무혐의가 나야 하는데, 검찰이 이 남성을 덜컥 기소해버립니다. 이유가 뭔가 하고 살펴보니, ‘진술분석가’가 이 여성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독을 했기 때문이었어요. 진술분석은 경찰에서 도입한 과학수사기법인데요, 주로 성폭력 사건에서 활용됩니다. 성폭력 피해자(주로 지적장애인이나 미성년자)의 진술을 듣고 그 진위를 판독하는 일을 하죠. 저도 이 사건을 맡기 전까진 ‘최첨단 과학수사기법인가 보다’ 하고 그냥 별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적 증거도 없이 어느 한 사람(진술분석가)의 말 때문에 ‘유죄’라니... 이 기법이 의심스러워졌죠. 그래서 해외의 이런저런 자료를 찾던 중에 이 책을 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그 사건은 무죄 판결을 받았어요. 잘못된 과학수사가 바로잡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의 판권을 직접 구입했었죠.

사실 ‘과학수사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책으로 과학수사의 허점을 알고부턴 그런 맹목적 신뢰가 굉장히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변호사님은 ‘과학수사의 추악한 이면’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과학수사에서 허점은 대체 왜 발생하는 걸까요?

재판이라는 게 결국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거든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리송할 때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런 한계를 느낄 때 뭔가 절대적인 것을 찾는 식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중세 재판에서는 신이 그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과학수사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느낌이에요. 사실 과학수사에도 엄청난 오류들이 있는데 말이죠. 의심을 멈추는 순간 맹신이 파고드는 거 같아요. 계속 질문하고 의심하고, 재검증할 방법들을 찾으며 수사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신뢰하고 맹신하기 때문에 허점이 발생하는 거죠.

그럼, 한국 사회(미디어 등 여론)의 과학수사에 대한 신뢰도 지나친 맹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적어도 성폭력 사건에서 쓰이는 ‘진술분석’만은 퇴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과학적 근거도 의심스럽고 백보 양보해서(사실 형사 문제라는 게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니 한 보도 양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과학적 근거가 있다 쳐도, 지금의 진술분석가 양성과정은 제대로 된 과정이 아니라고 봅니다. 최근에 경찰에서 진술분석가 양성방식을 개혁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40시간 교육만 이수하면 진술분석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현재도 일선에서 활동하고 계시는데, 문제는 이분들에 대한 추적관리(진술분석과 재판의 효용, 연계성, 분석 오류 등에 관리)도 제대로 안 이뤄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TV 시사프로그램의 문제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예능에서 일명 ‘쇼닥터’라고 불리는 몇몇 의사들이 나와 검증 안 된 건강상식을 퍼뜨려 문제가 된 적이 있잖아요? 지금 한국의 TV 시사프로그램에 나오는 전문가분들 중에도 이와 다를 바 없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과학수사라고 불리는 기법에도 신빙성이 의심되는 ‘가짜 과학수사’ 기법들이 있는데, TV 시사프로그램을 등에 업고 현실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습니다. 제대로 된 과학수사로 진범을 가려내야 하는데, 억울한 죄인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특히 형사사건에 있어선 과학수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데요.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사건의 실제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까요?

이 책을 보면 “당대에 폭넓게 쓰였던 과학수사 기법이, 알고 보니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었다”라는 사실이 나와요. 지금도 다르지 않아요. 앞서 말씀드린 성폭력 진술 분석도 그렇고, 사이코패스 테스트, 거짓말 탐지기, 필적 감정, 위증, 목소리 성분분석 등 과학적 근거가 빈약하거나 오류 가능성이 큰 기법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앞선 답변처럼 미디어에서 명성을 얻은 ‘법과학자’들이 대중의 관심을 받아 더욱 노출되고, 이들이 수사기관의 자문위원이나 전문심리위원이 되죠. 그렇게 판결결과에 당연히 영향을 미치고요. 그런데 이들이 주장하는 기법이 과연 법적으로 검증됐을까요? 한국에선 특히나 이런 타당한 의심과 ‘오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합니다. 미국, 유럽 등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이 책이 한국 사법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룬 오판 피해자들의 죄목인) 강간, 강간살인 사건의 경우 DNA 검사로 구제가 가능하지만, 그 외에 수많은 형사사건들은 어떻게 오판인지 가려낼 수 있지요? 어떻게 하면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일단 수사과정에서 무조건 모든 진술을 원칙적으로 녹음해야 합니다. 수사과정에서 한 얘기를 수사관이 (녹음하지 않고) 직접 적어서 그걸 증거로 쓰는 경우가 많고, 그게 중요한 자료가 돼서 재판이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진실 왜곡이 상당해요. 유의미한 정보 손실도 어마어마하고요. 책에도 언급했지만, 이밖에도 과학적 근거가 없는 수사기법이 많습니다. ‘과학수사’라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말고 합리적 의심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과학수사 기법만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수사기관과 법원부터 수사관행이나 수사기법 통제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사건을 담당해보면 피고나 원고의 진술이 누락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그 위험성을 지적하면 법원은 ‘수사기관이 알아서 했겠지’ 하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경우가 많고요. 요새 검경수사관 재조정 문제가 시끄러웠는데, 이게 대체 국민들 입장에선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진짜 중요한 건 오판이 발생하지 않도록 수사기법에 대해 제대로 관리하는 것인데 말이죠. 


저자 브랜든 가렛

이 책이 한국 사회에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사람, 예비 독자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한 말씀해주세요. 

‘형사재판의 로제타스톤’ 같은 이 책이 한국의 수사기법 개혁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법조인분들이나 예비 법조인분들은 꼭 읽어보셨으면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크게 이슈가 됐던 실제 사례로 분석하니 재밌습니다. 전 어려운 건 죄라고 생각하는데, 어렵지 않아요. 




*신민영

사법연수원 41기 수료. 서울대학교 법학부 졸업. 형사사법절차 개선에 큰 관심을 갖고 1,500여 건의 형사소송을 수행하였다. 남들이 포기한 사건, 패색이 짙은 사건을 되살리는 데 힘써왔으며 언론에 보도된 주요 소송에서 여러 차례 무죄 선고를 이끌어냈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서 [옆집 변호사] 코너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형법의 숨은 쟁점을 파헤친 《왜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가》가 있다.



오염된 재판
오염된 재판
브랜던 L. 개릿 저 | 신민영 역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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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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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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