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에세이스트의 하루] 맥시멀리스트의 변명 – 이수연

에세이스트의 하루 6편 – 이수연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맥시멀리스트에게 원룸은 너무나도 가혹한 공간이다. (2021.05.26)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언스플래쉬

맥시멀리스트에게 원룸은 너무나도 가혹한 공간이다. 서울에 자취를 시작한 동생은 옷이나 식기류 같은 것보다도 자기가 초등학교 때 쓰던 일기장과 어렵게 구한 인디밴드의 1집 앨범을 소중히 챙겼다. 뒤이어 내가 가져간 것은 친구들의 편지와 아끼는 소설책이었다. 처음 우리가 같이 산 집은 다섯 평짜리 원룸이었고 맥시멀리스트 두 명이 살기엔 턱없이 좁은 공간이었다. 발을 제대로 뻗고 자기도 힘들었다.

추억에 빚진 물건들은 점점 늘어났다. 영화 포스터와 전시회 팸플렛, 여행지에서 사 온 진열하기 곤란한 기념품, 사은품으로 받아온 텀블러와 에코백, 매년 사서 반도 못 채운 다이어리. 그리고 읽고 싶은 신간은 왜 이렇게 많은지. 다 읽지도 않은 책 위에 또 다른 책이 쌓여갔다. 다 읽은 책은 읽어서 놓치기 싫은 문장이 많아서, 다 읽지 못한 책은 읽지도 못하고 놓치는 문장이 생길까 봐 쉽게 버리지 못했다.

‘만약’과 ‘혹시’를 대비한 물건들도 넘쳐났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종이백이나 비닐봉지, 버리기 아까운 예쁜 노끈, 각종 화장품 샘플, 살이 쪄서 입지 못하는 옷까지. ‘만약’을 위한 물건이 ‘만약’의 상황에 잘 쓰일 때의 쾌감을 아는 사람은 물건을 더더욱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다. 애매한 크기의 물건을 전해야 할 때 자로 잰듯한 종이백에 쏙 들어갈 때의 기쁨.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더 많고 다양한 것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놔야 했다. ‘만약’의 상황이 틀어지면 마음이 초조해졌다.

공연 티켓이나 해외에서 받은 영수증(잉크가 거의 날아가서 보이지도 않는), 손으로 쓴 포스트잇 따위는 쓸모를 따지기 무색해진다. 처음부터 버렸으면 몰랐을 물건들을 마주하면 또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버리기 더 어려워졌다.

즐겁게 본 공연은 다음번에 또 보면 되고 지나간 여행은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추억을 쌓으면 된다. 내가 기념하는 것들은 대부분 그때 누렸던 순간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행복했던 순간이 없어져 버릴까 봐 붙들고 싶은 것들을 자꾸만 버리지 못하고 모으게 된다. 빛바랜 영수증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지워야 할 것은 지워야만 한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 자체가 위로되는 물건도 있다. 초등학생 조카에게 선물 받은 포켓몬스터 카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다. 서울에 취직해서 부산을 떠날 때 조카는 포켓몬이 이모를 지켜줄 거라며 자신의 소중한 것을 선물했다. 나는 덕분에 무탈하게 서울 생활을 견디고 있다. 그런 마음은 도통 함부로 버릴 수 없다.

동거인이 맥시멀리스트라는 건 행운이자 불행이다. 서로가 가진 물건에 대한 애착을 이해하면서도 자꾸만 발 디딜 틈이 사라지는 이 물리적인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집이 조금만이라도 더 넓으면 이런 고민을 좀 더 내려놓을 수도 있을 텐데. 괜히 나의 가난을 탓해본다. 맥시멀리스트는 오늘도 추억으로 좁은 집에서 달게 잔다.



*이수연

부산에서 상경해 동생과 불편한 동거 중.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



*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페이지 바로가기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이수연(나도, 에세이스트)

오늘의 책

사람을 남기는 독서와 인생 이야기

손웅정 감독이 15년간 써온 독서 노트를 바탕으로 김민정 시인과 진행한 인터뷰를 묶은 책이다. 독서를 통해 습득한 저자의 통찰을 기본, 가정, 노후, 품격 등 열세 가지 키워드로 담아냈다. 강인하지만 유연하게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손웅정 감독의 인생 수업을 만나보자.

쉿, 우리만 아는 한능검 합격의 비밀

한국사 하면 누구? 700만 수강생이 선택한 큰별쌤 최태성의 첫 학습만화 시리즈. 재미있게 만화만 읽었을 뿐인데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가 저절로 풀리는 마법! 지금 최태성 쌤과 함께 전설의 검 ‘한능검’도 찾고, 한능검 시험도 합격하자! 초판 한정 한능검 합격 마스터팩도 놓치지 마시길.

버핏의 투자 철학을 엿보다

망해가던 섬유공장 버크셔 해서웨이가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거듭난 과정을 보여준다. 버크셔의 탄생부터 버핏의 투자와 인수 및 확장 과정을 '숫자'에 집중한 자본 배분의 역사로 전한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담아 가치 투자자라면 꼭 봐야 할 필독서다.

뇌를 알면 삶이 편해진다

스트레스로 업무와 관계가 힘들다. 불안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다. 이런 현대인을 위한 필독서. 뇌과학에 기반해 스트레스 관리, 우울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수면과 식습관에 관해 알려준다. 처음부터 안 읽어도 된다. 어떤 장을 펼치든, 삶이 편해진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