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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미 에세이] 명발언: 엄마, 이제 보내지 마세요

박솔미의 오래 머금고 뱉는 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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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가 되며 하루가 바쁘고 고단해졌다. 20대에 꿈꾸던 것을 이루고 살며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그간 유예하던 어른의 고단함을 비로소 내 어깨로 온전히 떠받치게 된 것이다. (2021.03.19)


의외로 가족에게 똑 부러지게 발언하기 힘들다. 특히 부모님께 못 하는 말이 많다. 어린 시절에는 살가운 말을 못 했다. 싫은 거, 짜증나는 거, 귀찮은 건 아주 얄미울 정도로 따박따박 말했지만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는지는 굳이 알리지 않았다. 

나이가 들고 보니 반대다. 울 엄마 아빠 건강하셔라, 나도 애 낳아보니 두 분 그간 얼마나 힘드셨을지 깨닫는다 등 애틋한 말이 술술 나온다. 철이 든 건가? 반대로 싫고, 짜증나고, 귀찮다는 말을 못 하겠다. 역시 철이 들었기 때문일까?

함께한 시간보다 앞으로의 날들이 더 짧다는 걸 직감한 건 아닐까? 100세 인생 시대이니 우리의 삶을 100이라고 셈 해보자. 부모님의 연세가 쉰이라면, 지나간 시간과 남은 시간은 50 대 50으로 정확히 같다. 그 이후로는 60 대 40, 65 대 35로 숫자가 기운다. 앞으로 함께할 날이, 함께한 시간보다 짧아진다. 

시간의 저울이 매일 기우는 것을 알기에 슬슬 아픈 말은 줄이고 곰살 맞은 말만 남기려는 건 아닐까? 통화할 때, 메시지를 보낼 때, 함께 얼굴을 마주할 때 아픈 말은 최대한 아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아픈 날이 종종 생긴다.

부모님은 시골에 사신다. 스무 살에 상경한 나에게 늘 택배를 보내셨다. 내가 평소에 잘 먹던 반찬, 전, 튀김, 때로는 얼린 국까지 밀폐 용기에 담아 서울로 보내셨다. 혹시 좋아하던 과자 하나 못 사 먹고 살까 봐 봉지 과자, 박스 과자, 막대 과자도 종류별로 담아 보내셨다. 택배를 받은 날 갑자기 많이 먹어 탈이 날까 봐 소화제도 함께 보낼 만큼 각별하셨다.

20대에는 부모님의 택배가 좋았다. 학교 앞에서 파는 값싸고 기름진 음식만 먹다 보니 엄마가 만든 건강한 반찬을 보면 온몸이 했다. 빨갛게 반짝이는 엄마표 무말랭이무침을 꺼내다가 한 입 먹고 두 입 먹으며 밤을 보낸 적도 있었다. 택배가 도착하고 일주일 정도는 2킬로그램 정도 체중이 늘었다. 

30대가 되며 하루가 바쁘고 고단해졌다. 20대에 꿈꾸던 것을 이루고 살며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그간 유예하던 어른의 고단함을 비로소 내 어깨로 온전히 떠받치게 된 것이다.

아침 일찍 아이를 떼어놓고 출근해, 촘촘하게 일을 한 뒤 퇴근한다. 업무를 느슨하게 한 날에는 남은 일을 싸 들고 집으로 와야 한다. 지각하면 곤란한 후반전, 육아 전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오는 동선은 최대한 짧아야 한다. 좋아하는 식당이나 맛집에 들를 시간은 없다. 

그래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반찬 가게에 자주 들렀다. 반찬 세 종류에 만 원. 진미채 무침을 고르고, 두툼한 빈대떡도 고른다. 버섯볶음이나 두부조림을 고르는 날도 있고, 잘 부쳐놓은 완자를 택하는 날도 있다. 엄마가 해주던 음식과는 맛이 다를 거란 걸 알면서도 늘 시골에서 올라오던 반찬과 비슷한 거로 고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반찬을 뜯어 급하게 밥을 먹는다. 허겁지겁 먹다 보면 벨이 딩동 울린다.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사는 시부모님께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러 오시는 거다. 매일 비슷한 시각에 울리는 벨인데도 흠칫 놀란다. 일과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드디어 아이와 상봉한다는 기쁨, 조금 더 먹고 싶은데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아쉬움. 두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아이를 맞는다. 시어머니도 이런 내 마음을 아셨던 걸까. 된장찌개나 계란 부침, 불고기를 아이 편에 함께 보내시곤 했다.

아이와 사랑하고, 씨름하고, 울고, 웃으며 후반전을 치른다. 남편은 여러 나라로 출장을 다니며 일할 때라 집에 잘 없었다. 아이가 잠들면 집 안 꼴을 사람 사는 꼴로 겨우 정리하고 드러눕는다. 남은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잠들려던 찰나, 식탁 위에 놓인 택배가 눈에 들어온다.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님의 택배.

받자마자 풀어헤쳐서 잘 받았다고 연락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답을 기다렸을 부모님을 생각하며 이미 조금 괴롭다. 힘들어도 택배를 열어 정리해놓고 자려고 침대에서 등을 떼고 일어난다. 택배 박스는 절대 한 번에 열리는 법이 없다. 배송 중에 박스가 뜯기거나 내용물이 흘러나오기라도 할까 봐 테이프를 꼼꼼하게 붙였기 때문이다. 택배는 늘 두 가지 종류의 테이프를 두르고 있었다. 엄마가 테이프 한 통을 다 써서 봉한 것을 아빠가 택배 대리점에 맡기러 가는 길에 한 번 더 싸맸겠지.

테이프를 가위로 다 뜯어내면, 비닐에 담은 반찬은 밀폐 용기에 담아 냉장실과 냉동실에 구분해 넣는다. 박스는 착착 접어 다용도실에 둔다. 그러고 보니 재활용 쓰레기가 이미 가득 쌓여있다. 지금 바로 아파트 1층까지 내려가 분리수거함에 두고 올지, 내일 아침 출근길에 내놓을지 고민한다. 지금 힘들까? 내일 아침에 힘들까? 어느 쪽이 덜 손해일지 머리를 굴려본다. 

어느 날은 택배를 열어 볼 힘이 내게 남아 있지 않아 슬펐다. 박스에 칭칭 감긴 테이프를 뜯다 말고 엉엉 울었다. 그걸 기쁜 마음으로 열어 보지 못하는 내가 불효녀 같아 슬펐다.

‘엄마 이제 택배 그만 보내세요. 열고 정리하는 게 너무 힘들어. 다 알아서 잘 먹으니까….’라고 쓰다가도 관뒀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효녀가 되리라.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택배 박스와 씨름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울며 박스를 여는 밤과 웃으며 반찬을 꺼내 먹는 아침. 그리고 반찬 가게는 그냥 지나쳐도 되는 얼마간의 저녁.

엄마가 되어 보니 부모 자식 사이에도 역지사지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라는 자식을 두고 엄마 아빠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한 아이의 부모가 되고 보니 가닥이 잡히는 거다. 

이를테면 나는 부모님께 사랑받는 이유가 나의 행동에 있다고 여겼다. 사고 한 번 안 치고, 착실히 공부하고, 알아서 명문고에 명문대까지 가서, 한 방에 취업하고, 여태 무난히 살아서. 적당한 나이에 누군가를 사랑해 결혼도 하고, 다들 미루는 아이도 얼른 가져서. 그것 때문에 엄마 아빠가 나를 더 깊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당신들의 길고 긴 자식 농사가 합격점을 맞았으리라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우선, 자식에게 감히 점수를 매길 수가 없다. 아이는 등급이나 당락, 점수를 초월하는 존재라는 걸 낳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이의 행동이 우수해서 기쁜 날보다 그 마음이 불편하진 않을까 염려하는 날이 많다. 아이가 연필을 엉뚱하게 잡고 글씨를 써도 걱정하지 않는다. ‘지저분하다’는 말을 못 해서 ‘지져버렸다’라고 말해도 괘념치 않는다. 그렇게 쓰고 그렇게 말하며 아이가 행복하다면, 나는 그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 반대로 아이가 한석봉 뺨치는 글씨를 쓴다거나 ‘지저분하다’를 다섯 가지 언어로 말한다 해도 슬플 거다. 그렇게 해야 하는 아이 마음이 울적하다면 말이다.

뜬금없지만, 아이돌이나 유명 배우들이 종종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준다고 한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걸 본다. 그걸 보며 나도 가만히 소원을 골라본다.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누구도 그걸 대신 이뤄줄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소원을 고르며 내 삶의 최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되짚어볼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소원 하나를 골라내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여러 개를 줄 세운 뒤에 하나씩 지워나가며 정해야 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달라졌다. 다른 후보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바람 하나가 생겼다. 

나는 이렇게 답할 거다. 

“제 소원은 이 소원을 두 개로 늘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른 두 가지 염원을 덧붙일 테다. 

“첫째, 제 아이 평생에 마음이 복잡해서 잠 못 이루는 밤이 없게 해주세요. 둘째, 역시 제 아이 인생에 앞일이 두려워 눈 뜨기 싫은 아침이 없게 해주세요. 만약 그것이 누구나 한 두 번은 겪어야만 하는 과제라면, 부디 그 짙은 낮과 새하얀 밤이 얼른 그치게 해주세요.”

나의 두 개 같은 소원 하나는 여태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비장하게 가위를 들고 택배 상자에 감긴 테이프를 뜯던 밤. 나의 단단한 소원을 생각했다. 지금 내 모습을 엄마 아빠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가위를 들고 택배 상자 앞에 선 사람이 내 아이라면, 나는 뭐라고 했을까? 두 답이 서로 다르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내려놓고 얼른 편히 자거라.”

다음 날 아침, 풀지 않은 박스 옆에 풀어헤친 마음을 두고 문자 메시지를 썼다. 내 아이가 지금의 나라면, 얼른 하길 바라는 그 말을 전송했다.

“엄마 택배 그만 보내요. 고맙긴 한데, 이거 정리하고 박스 버리고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너무 힘들어. 받고 싶은 게 있으면 그때 내가 말할게요.”

어떤 딸로 살아야 할지 헷갈릴 때, 딸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답이 된다. 반대로 어떤 엄마가 좋은 엄마인지 모를 땐, 어린 시절 엄마를 바라보던 내 마음을 떠올리려 애쓴다. 괴로운 딸이나, 지쳐버린 엄마는 누구도 원치 않음을 기억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의 저울이 조금씩 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재의 괴로움을 엄마에게 털어놓는다. 설사 그것이 엄마의 택배일지라도 이 딸은 발언해버린다. 내 하루가 덜 수고롭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시간을 초월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딸을 향한 내 마음이 그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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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솔미(작가)

어려서부터 글이 좋았다. 애틋한 마음은 말보다는 글로 전해야 덜 부끄러웠고, 억울한 일도 말보다는 글로 풀어야 더 속 시원했다. 그렇게 글과 친하게 지내다 2006년,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2011년, 제일기획에 입사해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에세이 <오후를 찾아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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