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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미 에세이] 명발언: 쉬는 시간에는 쉬어야죠

박솔미의 오래 머금고 뱉는 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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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견을 모두가 진심으로 이해해줬다. 제안도 정중히 취소하셨고, 그 뒤로 발언을 후회할 만한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심술궂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 뒷이야기를 만들거나 치사한 복수도 하던데 말이다. (2021.03.12)

언스플래쉬

회사에서 단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만든 조직에 합류한 적이 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 임시로 팀을 꾸렸다. 사람들 대부분은 앞으로 맡을 일과 전혀 다른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었다. 

팀의 개국 공신이나 다름없는 몇 분이 모이는 회의에, 어쩌다 끼게 되었다. 얼른 회의실을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그대로 참여한 거다. 회의 주제를 요약해보면 ‘어떻게 이 팀의 전문성을 빠르게 높일 수 있을까?’였다. 

주제넘게 회의실에 머물게 된 나. 순식간에 ‘새로 합류한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질문을 받았다. 그 내용 역시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이 전문 지식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을까요?’였다. 대표 발언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말을 아꼈다. 뭐라도 잘못 제안했다가는 다른 이들의 원망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제안했다. 

“쉬는 시간에도 00 관련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규칙으로 삼으면 어때요? 점심 먹거나 커피 마실 때도 무조건 00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여기서 00은 팀이 맡은 주요 업무와 관련된 단어다. 주식, 건축, 홍보, 음악, 스포츠, 의료 서비스 등 무엇을 대입해도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문제는 없으리라.)

‘쉬는 시간’과 ‘규칙’이 한 문장에 들어갈 수 있다니! 적잖이 놀랐다. 무엇보다도 그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서 놀랐다. 살면서 만나 본 직장 동료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총명하고 사리분별이 명확한 사람. 다만 그는 00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베테랑이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00에 관해 이야기하는 규칙을 구상할 수 있었던 걸까.

내 생각은 달랐다. 쉴 때도 일을 좀 해주십사 부탁하는 이야기로 들렸다. 나와 비슷하게 합류한 동료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확률이 높았다. 완강히 반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정중히 말하리라. 일하기 싫다는 이야기로 왜곡되면 안 되니까.

나의 발언은 이러했다. 

“쉬는 시간에는 그냥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팀을 한국 세대에 비유해 볼게요. 여러분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프로젝트를 여기까지 키워내셨어요. 쉬는 시간은 물론 밤낮없이 일하는 게 익숙할 테고요. 비유하자면 새마을운동을 하던 시절 고생하신 어르신들이랄까? 이제는 더 선진화된 팀을 꾸리기 위해 개성이 강한 우리들을 모으셨어요. 그러면 다르게 대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저희를요. 오히려 쉬는 시간에 우리 각자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알아서 잘 쉬는 게, 저희가 이곳에 온 취지에 더 맞을 것 같아요. 그리고 원래 쉬는 시간엔 쉬는 게 맞고요.”

기억을 더듬어 글로 정리한 것이라, 실제 발언과는 조금 다를 테다. ‘음, 저기, 그러니까, 어….’를 사이사이 덧붙였고, 매우 더듬거렸으니까. 어찌 됐든 우리의 의견 차이를 세대 차이에 비유하며 ‘나는 쉬는 시간에 그냥 쉬고 싶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나 같은 쫄보가 그런 명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전부를 신뢰하고 있었으니까. 총명한 그들이 내 말을 비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줄 거라 확신했다. 내 말을 곡해할지도 모른다고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용기 내지 못했을 거다. 여태 먹은 회사 눈칫밥이 얼만데. 말이 통할지 아닐지는 이제 피부로도 느낀다.

나의 의견을 모두가 진심으로 이해해줬다. 제안도 정중히 취소하셨고, 그 뒤로 발언을 후회할 만한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심술궂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 뒷이야기를 만들거나 치사한 복수도 하던데 말이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엉뚱한 제안을 하는 데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 진심으로 설명하면 오해 없이 정당하게 반대할 수 있다는 믿음. 나는 우물쭈물하는 겁쟁이라서 이런 믿음 없이는 쉽게 입을 못 뗀다. 훌륭한 청자가 있었기에 나도 명발언을 할 수 있었던 거다.

몇 년 뒤, 자발적으로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새로운 팀에서는 희한하게도 서로 외모 칭찬을 하며 인사를 주고받는 문화가 있었다. 불편한 마음을 추스르고 분위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왜 서로 외모 칭찬을 하는 거지? 내가 예민한 건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은 삼가야 하는 거 아닌가?’

“예쁘다”, “우리 중에 제일 예쁘다” 혹은 “잘생긴 오빠”라는 말을 회의 도중 주고받는 걸 더 듣고 있을 순 없었다. 결국 상사에게 정중하게 메일을 보냈다. 상사에게 말한 이유는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발언을 주고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요상한 문화를 함께 멈추려면 리더의 힘이 필요했다.

메일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부서마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 잘 압니다. 어색함을 깨고 얼른 친해지려는 의도로 칭찬을 주고받는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외모에 대한 언급을 삼가야 합니다.” 예쁘다는 말, 잘생겼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줄여봅시다. 우리의 외모는 업무와 상관이 없으며, 각자의 생김새는 매우 개인적인 영역입니다. 이를 두고 비난하는 것은 물론 칭찬하는 것도 부적절합니다. 특히나 일하려고 모인 사람들에게 덜컥 외모 칭찬부터 해버리면, 분위기를 의식해 겉모습에 신경 쓰기 시작합니다. 회사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거울 앞에서 판단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이후론 인사처럼 주고받던 외모 칭찬이 눈에 띄게 줄었다. 기뻤다. 영향력을 발휘했다거나, 틀린 걸 옳게 고쳐 놓았다는 쾌감이 아니었다. 내 말이 통했다는 것이 기뻤다. 할까 말까 하던 발언을 끝내 했을 때 오해 없이 들어줘 고마웠다. 불발언 혹은 오발탄이 될지도 몰랐던 말을 명발언이 되게 해줘 고마웠다. 덕분에 앞으로 어떤 곤란한 상황이 닥쳐도 나는 발언할 수 있다. 정확히 정중히 말하면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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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솔미(작가)

어려서부터 글이 좋았다. 애틋한 마음은 말보다는 글로 전해야 덜 부끄러웠고, 억울한 일도 말보다는 글로 풀어야 더 속 시원했다. 그렇게 글과 친하게 지내다 2006년,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2011년, 제일기획에 입사해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에세이 <오후를 찾아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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