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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소설가와 사회 비평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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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사회성 짙은 칼럼을 쓸 때에는 부담감이 상당했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쓰던 칼럼과는 달랐다. (2021.01.04)


몇 년 전부터 일간지 두 곳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누가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애정을 갖고 작업한다(여전히 내가 신문업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 곳에는 독서 칼럼을, 다른 한 곳에는 음…… 그냥 칼럼을 쓴다.

그 ‘그냥 칼럼’ 코너에는 스님, 시인님, 심리학과 교수님과 내가 돌아가며 글을 싣는다. 다른 분들은 인문학적 향취가 담뿍 느껴지는 글을 쓰시는데, 내 글만 유독 시사 칼럼에 가까워서 함께 보면 좀 튄다. 그래도 아직껏 신문사에서 원고 방향에 대해 뭐라고 지적하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으니 이렇게 써도 되나 보다.

처음에 사회성 짙은 칼럼을 쓸 때에는 부담감이 상당했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쓰던 칼럼과는 달랐다. 데스크가 아닌 평기자 칼럼은 대개 현장 칼럼이다. 얕게나마 한 분야를 몇 달에서 몇 년간 맡아 사건을 취재하고 취재원을 만나며 보고 느낀 것들, 그러나 저널리즘 문법에 맞지 않거나 지면이 넉넉지 않아 기사로는 소개할 수 없었던 감상들에 대해 쓰면 된다. 요령이 붙으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제 내게는 그런 현장이 없다. 그러면서 사회 평론 같은 글을 쓰려니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사회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긴 있나? 깊은 밑바닥에서 돈과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고,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본 적도 없고, 제 집을 살 타이밍조차 놓친, 책이나 좋아하는 샌님 아닌가. 글쟁이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남다른 통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다분히 조선시대스러운 것 아닐까?

칼럼 원고가 쌓이면서 그런 우려는 점차 사라졌다. 내 식견이 그 사이 풍부해졌다기보다는, 다른 ‘지식인’들의 처지도 나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기게 되어서였다. 깐깐하게 따져보면 그네들 역시 자기 전문 분야의 지식을 일종의 문학적 비유로 활용해서 상식적인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많은 듯했다. 가끔은 그들이 한 분야에 깊이 몸담고 있기에 오히려 그 견해를 경계해야 할 때도 있다.

예컨대 과학자의 발언을 살펴보자. 해외의, 작고한 학자를 예로 들어보자. 칼 세이건은 위대한 천문학자다. 그러나 지구가 명왕성 궤도쯤에서 보면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므로 인류가 더 겸손해져야 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는 말의 설득력은, 과학이 아니라 감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지구의 크기와는 상관없는 문제다.

인류를 위해 우주를 탐사하자는 제안은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국 돈 문제이며, 『코스모스』 말미에도 돈 얘기가 나온다. 세이건이 ‘스타워즈’ 계획을 강력히 반대했고, 유인 탐사가 아닌 무인 탐사를 지지했음을 안다. 하지만 우주개발 예산 확대를 부르짖는 천문학자는 업계 이해관계자이지, 공평무사한 재정 전문가는 아니다.

‘그래, 한 분야가 아닌 세계 전체에 대한 전문가는 어디에도 없다, 상식선에서 말하면 된다, 너무 몸 사릴 것 없다’고 여긴 것도 잠시, 얼마 뒤에는 정반대의 문제로 고민하게 됐다. 언론에서 코멘트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저출산에 대해 쓰신 칼럼을 읽었습니다, 저희가 저출산 관련 기획을 하는데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는 식이었다.

돌이켜보면 기자 시절 내가 비슷한 부탁을 여러 사람에게 수없이 했더랬다. 기자들 스스로 한국 언론 한심하다고 한탄하면서 절대 못 고치는, 오랜 관행이다. 전문가 코멘트를 따서 기사 말미에 해법이랍시고 뻔한 소리 적어놓는 거. 새로워 보인다 싶은 사회 현상에 여러 전문가 멘트를 더덕더덕 이어 붙여서 분석 기사를 뚝딱 만들어내는 거.

그런 요청을 질색하는 학자도 있고 이름 알릴 기회다 싶어 반기는 이도 있다. 후자의 명단은 기자와 방송작가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퍼진다. 사회학, 심리학 같은 분야의 교수들이 가장 환영받는다. 학위가 없지만 문화평론가, 사회평론가, 시민단체 간부나 활동가 같은 직함으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 비꼬는 이들로부터는 ‘온갖 문제 전문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끄트머리에서, 나는 관심 있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해 내레이터 역할을 맡기도 했고, 책 홍보에 도움이 될까 싶어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라디오 고정 코너에서 한동안 사회 현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도 했다. 아니다 싶어 거절한 요청도 있었다. 특히 내가 질겁한 건 ‘청년 세대의 생각을 들려 달라’는 유의 요구들이었다(그런 건 40대인 제가 아니라 청년들에게 직접 물어주세요).

일관성은 없었다. 어, 어, 하다가 청탁을 거절 못하고 쓴 기고문도 있고, 상대가 절박하게 매달리는 통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는 ‘분석’을 웅얼웅얼 읊은 적도 있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고 밝히면서 참고하라고 관련 서적을 추천해줬더니 그 책 내용을 내 입을 통해 멘트로 내고 싶어 했던 매체도 있었다.

칼럼을 쓰는 것과 논평가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임을 한참 나중에 깨달았다. 적어도 칼럼을 쓸 때는 내가 주제를 골라서, 할 수 있는 얘기를 한다.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혹은 내심 그저 잠시의 소음에 불과하다고 보는 현상에 대해 억지로 말을 꾸며내야 할 필요는 없다. 써놓고 보면 당연한 차이점인데, 이런 것도 혼자 깨달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오르부아르』를 쓴 피에르 르메트르와 대담을 할 때 궁금해서 물어봤다. ‘사회파 소설가’로 불리기 시작하면 정치나 사회 현안에 대해 논평을 요구당하지 않나? 프랑스에서는 안 그런가? 나는 매번 당혹스러운데 당신은 어떤가? 르메트르는 그 역시 마찬가지라며, 그래서 원칙을 정했다고 했다. 자기 책에 대해 말하는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답하고, 그게 아니면 거부한다고. 유용한 팁이었다. 나는 요즘 그냥 낮에 전화기를 꺼두는 편이다.

과거에는 소설가들이 이런 요청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 선배 문인이 한국 문학의 위상이 추락했다고 아쉬워하며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어 세대 전에는 소설가가 오피니언 리더 대접을 받았는데, 이제는 아니라면서.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상이 복잡해졌고, 상식으로 논평할 수 있는 일이 줄었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정부 시절 문학이 반독재 투쟁의 전위 역할을 하며 사회적 위상이 과하게 높았던 측면도 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헷갈린다. 고색창연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문학 종사자에게는 어떤 앙가주망 같은 게 있지 않나, 펀드매니저하고는 다르지 않나, 하는 마음이 있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넘길 수 없었고, 조지 오웰은 스탈린에 대해 그랬다. 소설가는 지식인인가? 사회 현안을 살피고 목소리를 내야 할 책무가 있나?

그렇게 자기 SNS 계정에 정치 관련 발언을 꾸준히 올리는 소설가나 시인도 있다. 견해가 같은 이들이 뭉쳐 성명을 내기도 한다. 검찰 개혁 관련 문학인 성명서―언론에서 ‘조국 지지 성명’이라고 불렀고 실제로도 발표 현장에 ‘조국을 지지한다!’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던―에는 1200명이 넘는 작가가 이름을 올렸다.

문인 단체도 정치사회 이슈에 대해 성명서를 은근히 자주 낸다. 최근에는 주요 문학 단체 5곳이 종전선언을 촉구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내용과 타이밍에 대해서는 여기서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그 단체들이 북한 인권이나 집단수용소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침묵해 온 사실에 대해서도 따지지 않으련다. 그 영향력에 관해서만 적어본다.

문학 단체 회장, 이사장, 사무총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선언을 발표했는데, 검색해보니 그걸 기사로 쓴 매체가 10곳 정도다. 인터넷 매체가 아닌 종이신문 중에서는 딱 두 곳이 그걸 지면에 실었다. 1단짜리 단신이었다. 나훈아가 콘서트 중에 던진 몇 마디의 반의 반 만큼도 반향이 없었다. 이쯤 되면 소설가의 사회적 발언에 관한 고민 자체가 허망해지는데…….

소설가가 사회적 발언을 해도 되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소설가는 사회적 발언을 해야 하나? 어떤 책무가 있다손 치더라도 한 개인이 모든 이슈에 의견을 가질 순 없을 터다. 소설가의 사회적 발언에는 문학으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통찰이 담기나? 그러면 뿌듯하겠지만, 아닌 것 같다.

소설가의 사회적 발언은 어떤 식으로 하는 게 효과적일까? 나는 문학인은 모두 글을 쓰는 단독자이며, 단독자로서 글을 쓸 때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사회에 대해 하고픈 말이 있으면 같은 의견인 동료를 모아 결의나 세를 보여주는 것보다, 그 주제로 정교하고 치밀하게 글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계간 〈대산문화〉 2020년 가을호에는 한수산 작가의 에세이가 실렸다. ‘군함도가 울고 있다―우리의 역사왜곡3: 언제까지 죽창가를 불러야 하나’라는 제목이었다. 군함도 강제 징용이라는 비극을 기억하고 알리는 데 있어서 한국 측의 역사왜곡도 있음을 아프게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27년의 치열한 취재를 통해 소설 『군함도』를 펴낸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용기 있는 글이었다. 그런 글을 더 많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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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강명(소설가)

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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