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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12월 우수상 - 일단 몸을 움직여본다

일상 속 나만의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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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애매하고, 가진 게 없고, 이룬 게 없어서 우울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발레 하러 가는 날을 기다린다. (2020.12.04)

언스플래쉬

작년 늦가을, 저녁 일정 전에 짬을 내어 극장에서 봤던 영화 <벌새>에선 이런 대사가 나온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움직여져. 그 대사와 함께 배우는 화면 속에서 양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선 유난히 그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아있었다.

그런 날이 있다. 유난히 나 자신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 시간은 흘러가고 연차는 쌓여만 가는데 나이만 먹고 제대로 된 실력도, 남아있는 재산이랄 것도 없는 내가 보이는 날. 그런 날일수록 휴대폰에 손가락만 몇 번 움직여도 남들의 번쩍이는 자랑거릴 구경하기가 쉬웠다. 내가 갖지 못한 것,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 눈앞엔 아른거리는데 손으로 당장 쥘 수는 없는 것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쳐보기만 하다가 밤늦게 잠들기도 했다.

목요일 아침 여덟 시 반, 때르릉 울리는 알람 소릴 듣고 일어났다. 목요일 오전은 발레를 하러 가는 날이다. 아직 덜 깨어난 몸을 보채서 짐을 싸 들고 학원에 갔다. 수업을 들으러 가면 본격적인 발레 동작을 배우기 전에, 각자 몫의 요가 매트를 하나씩 깔고서 눕는다. 그리고 가장 먼저 숨쉬기를 한다.

코로 공기를 들이마셔서 폐를 가득 채운다. 자연스레 갈비뼈가 벌어지고 배가 부풀어 커진다. 다시 입으로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공기가 폐에서 빠져나가고, 갈비뼈가 중앙으로 모이고, 배가 납작하게 가라앉는다. 매일매일 의식도 않고 반복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일이 그 순간만큼은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제대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

꼭 레오타드가 아니어도 정확하게 몸동작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발레를 할 때는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는다. 몸매가 다 드러나는 옷차림으로 있으니 부끄럽기도 하다. 레오타드 가격이 부담스러워서 원래 가지고 있던 운동복을 입고 있던 나와는 달리, 색색의 레오타드와 스커트를 입은 다른 수강생들이 눈에 보인다. 나는 취미라는 이름으로, 아마추어라는 느슨한 범주에서 발레 세계를 누리고 있다. 취미는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도 나는 비교가 습관이 되어 발레를 배우면서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앞에서 동작을 가르쳐주기 시작하면 그곳으로 눈을 돌린다.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가기만도 벅찰 때도 있다. 난생처음 알게 되는 동작들, 이미 존재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뼈와 살과 근육들. 수업에 집중하다 보면 정신없이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 다른 어떤 이의 것도 아닌, 나 자신이 내 몸을 움직여서 흘려낸 땀.

바를 잡고 기대어 동작을 배우고, 그 후에는 바를 치우고 센터로 나와 다시 동작을 해본다. 손에 잡을 것 하나 없이 맨몸으로 거울에 비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다. 실력에 따라 동작은 천차만별이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조금 더 어려운 수준의 짧은 춤동작을 배운다. 다양한 기술이 섞인 발과 다리의 움직임, 팔을 곧게 뻗어서 몸이 가장 길어 보이게 만드는 손짓, 그리고 땅을 밀어내어 온몸을 하늘로 끌어 올리는 점프, 점프, 점프!

여전히 애매하고, 가진 게 없고, 이룬 게 없어서 우울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발레 하러 가는 날을 기다린다. 학원에 가서 나는 내 머리와 목, 어깨, 가슴과 팔, 손, 배, 허벅지와 종아리와 발, 발가락까지. 내 온몸을 구석구석 움직여보고 탐색한다. 내 몸이 지금 어떤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지 인지하려 애써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의 나로부터 결코 떼어내지 못할 나의 소유, 내 손에 쥐어진 내 손가락. 발레 하는 시간은 그저 내 몸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시간이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부끄러워 마치 알몸이 된 것 같지만, 이 시간이 나는 정말 싫지가 않다.

일단 몸을 움직여본다. 당장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내 몸이 움직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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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글 홍참빛(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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